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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9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박영식(야고보) 신부

9월 6일 연중 제23주일 : 마르코복음 7,31-37

31 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에 있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과 데카폴리스를 지나 갈릴래아 호수 동쪽 물가로 오셨다. 이 호숫가에는 주로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귀가 먹고 언어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언어장애는 많은 경우 귀가 먹기 때문에 생긴다. 사람들은 이 병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안수를 해달라고 빌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전에 오셨을 때에는 배척했지만(마르 5,1-20), 이제는 그분께 도움을 간청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이 병자를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병자의 귀에 넣고 그의 혀에 당신 침을 발라 주셨다. 이는 당대 유다인들의 생각으로 침이 치료하는 힘이 있다고 여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이 하늘을 바라보고 한 숨을 쉬고 ‘열려라’ 하고 권위 있게 말씀하시자 즉시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똑똑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 숨을 쉬신 것은 당대 치료방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 나서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치유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 기적의 참된 뜻은 예수님이 그 병자의 청력을 회복시키고 다시 말을 하게 하신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심을 믿고 따르게 하는 데 있다. 귀가 열려 남의 단점들을 듣거나 입이 열려 남을 욕하라고 치유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활동을 듣고 찬양하고 이웃의 장점들에 대해 듣고 칭찬하라고 귀와 입을 열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은 부활하신 뒤에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에게만 드러나는 신비이다. 부활하기 전에 이 지상에서 병자를 치유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메시아 신분과 하느님의 아들 신분을 감추려 하셨다. 부활하시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비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기적장이로 곡해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당대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는 그분의 신분을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권능을 입으셨음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기적을 통해 부분적으로라도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기적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마르 7,37) 하고 칭송했다. 이 말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라는 하느님의 창조활동이 연상된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적인 치유를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버금가는 것으로 알아들었던 것 같다. 이는 하느님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약속하신 구원이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이사 35,5) 이러한 새로운 창조의 날과 새로운 구원의 날이 예수님의 기적활동과 함께 도래했다.


생명과 기쁨과 행복은 많이 가지는 데 달려 있지 않고 하느님과 이웃과 맺는 대화관계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대화는 실망 가운데 희망을, 미움 가운데 사랑을 창조한다. 그러나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거나 내가 말할 상대방이 없으면 나는 병들고 나의 생명은 고갈되고 만다. 대부분의 질병은 대화결여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라고 우리의 닫힌 귀와 입을 열어주신다. 하느님과 대화하는 사람은 사람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웃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웃의 약점만 보고 그가 싫어지게 된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와 만나는 것보다 바로 옆에서 사는 이웃들과 잘 지내는 것이 행복과 영생을 더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다.

 

 

 

9월 13일 연중 제24주일 : 마르코복음 8,27-35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 자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셨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이 하느님의 구원약속에 대한 이스라엘의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종말에 오기로 된 그리스도이시라고 대답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그리스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마르 8,31-32)

 

예수님은 당신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사람의 아들(인자)’이라고 여기셨다. 이 칭호는 다니엘서(7,13-14)에서 인간과 같은 존재로서 고난을 당하지만 사흘 뒤에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천상인물이다. 하느님은 그를 굳건하게 하시고 승리자로 만드시며 그에게 왕권을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위의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여기고 고난을 받고 지도자들의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예수님은 당대 정치와 사회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당신의 복음선포가 미치는 영향과 일으킨 반응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다. 몇 차례 예루살렘에서 대사제, 제사장들, 원로들, 율사들과 갈등을 겪으셨는데, 이러한 대립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에는 그들이 당신을 죽일 것이라고 예감하신 것 같다. 그러나 당신이 십자가에 처형되더라도 하느님이 사흘 만에(= 빨리) 당신을 부활시키실 것이라고 여기셨다. ‘사흘’은 하느님이 예수님을 빨리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성금요일 오후 늦게 무덤에 안치되시고 주일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기 때문에(마태 28,1) 사흘이 되지 않는다. 요한복음(16, 16.17.19.20)에서는 ‘사흘’ 대신에 ‘조금 있으면, 잠깐 동안’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예고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분을 보호하려는 듯이 붙잡으면서 말렸다. 그가 예수님이 고난 받는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한 채 그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그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야 그의 메시아 고백은 참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나무라셨다.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받는 분이 아니라고 여긴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도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도록 유혹한다는 뜻에서 사탄을 닮았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채워야 한다.


첫째,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고 예수님의 뜻을 생활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둘째,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 수반되는 난관과 박해를 감내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결심을 해야 한다. 그래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다음 주일 복음 해설을 보자.)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할 때만 비로소 그분이 누구이신지 제대로 알고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우리가 깊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마침내 언젠가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 된다.”(헬렌켈러)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랑해야 한다. 끊임없이 사랑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타성에 빠지고, 타성의 노예가 되면 사랑은 사라지고 만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분의 신비를 더욱더 깊이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이 참된 신앙고백이다.


이런 뜻에서 신앙고백을 자주 하면 예수님의 신비에 더욱더 깊이 스며들어 가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의 아들이요 우리와 같은 사람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 가운데서 당신을 찾고 이웃의 인간성을 폭넓게 이해하는 눈을 뜨게 하며 이웃을 사랑할 힘을 주실 것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예수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자.

 


9월 20일 연중 제25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 루카복음 9,23-26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 첫째, 자기를 부정하고, 둘째,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며, 셋째, 당신을 믿고 따르라고 명하셨다. 이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 실천한 것이다. 자기부정은 이기심이나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을 본받아 영생을 누리기 위함이다.
이는 자기 존재이유를 실현하는 방법이다. 자기를 실현하는 것은 현세생활에 탐닉하거나 물질적 안정에 의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하는 사랑, 진리, 선,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예수님과 인격관계를 맺는 데 있다. 온 세상을 얻는다 하더라도 자기를 잃어버린다면 백해무익이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집착하는 사람은 예수께 충성하기를 거절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르든지 현세의 위로를 찾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중심주의를 버리지 않은 사람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이유를 밝히셨다. 당신과 당신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겨 배신하면 하느님의 심판대전에서 천사들과 함께 그를 부끄럽게 여겨 배척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긴 경우와 그 이유를 살펴보자. 이와 반대로, 예수님은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당신이 메시아요 구세주이심을 이웃에게 삶으로 증언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왕국을 미리 체험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삶으로써 이 왕국을 미리 체험한다.


비누는 스스로 녹아 자기 형체를 없애버리고 때를 씻어준다. 좋은 비누는 잘 녹는다. 사람도 온 마음을 다해 자기를 희생하여 사랑할 때 좋은 비누와 같이 된다. 비누가 녹아 형체가 없어지듯이, 예수님의 삶은 좋은 비누와 같다. 그분은 날마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이 부르심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에게 필요한 존재,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과 행복과 희망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되려고 애를 쓴다. 훌륭한 사람은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소진해버린다. 자녀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부모는 자녀들의 발전과 성공을 보면서 부모로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자녀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들의 타락과 실패 때문에 자아를 실현하지 못할 뿐더러 자기 인생도 실패작으로 끝내고 만다. 이처럼 인생은 얻는 것이라기보다 힘껏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마음을 주고 자기를 소모시켜 가는 것이다.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실현하는 것이 인생이다. 이와 반대로, 일신의 안일을 위해 몸과 마음을 사리고 이해득실에 민감한 사람은 제 기능을 다하지 않는 비누와 같다. 자기를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에는 자기를 잃어버리고 만다. 주님과 이웃을 향해 마음을 드높이 올리자.

 

 

 

9월 27일 연중 제26주일 : 마르코복음 9,38-48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4)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6)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1) 9,38-41 :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가 그분의 이름으로 악마를 내쫓는다고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그분께 보고했다. 제자들 자신은 악마를 추방할 수 없었는데도(마르 9,14-29)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마를 내쫓을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제자들은 그가 예수께 권한을 위임받지 않았으므로 그분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인격관계를 맺어야 그분의 권능에 참여하여 악마를 추방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악마를 내쫓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마술적인 방법으로 도용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가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를 내쫓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 사람은 당신과 제자들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곧바로 당신을 비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이다. 또 그가 사탄의 왕국을 파괴하시는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하고 제자들에게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들만이 사탄의 힘을 파괴하고 하느님의 왕권을 실현하시는 예수님의 구원활동에 참여한다는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과 같다.(마르 9,41) 비신자라도 선행을 하거나 예수님의 이름에 의지하여 구원을 찾는 이들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2) 9,42-48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 즉 교회 안에서 어린이와 같은 약자와 가난한 이를 죄 짓게 하지 말라고 이르셨다. 믿음이 강하거나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은 상처입기 쉬운 약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저버리게 하면 하느님의 가혹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이 벌이 너무나 혹독하여 노새가 끄는 커다란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사형을 받는 것이 믿음을 저버리게 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이르셨다. 또 불구의 몸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멀쩡한 몸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하셨다.


우리는 손으로 상대방을 때리거나 죽이거나 도둑질을 할 수 있고, 발로 사람을 차거나 죄를 지으러 갈 수 있고, 눈으로 교만, 증오, 탐욕, 음란한 생각을 드러내고 성희롱을 할 수 있다. 죄를 짓게 하는 신체부위를 찍어버리고 빼내버리더라도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낫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뿐 아니라 예수님이 사탄의 힘으로 악마들을 내쫓으신다고 비난함으로써 성령을 거스르는 죄, 즉 회개를 거절하는 죄를 짓는 사람도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 스스로 죄를 짓거나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매사에 변명을 늘어놓는다.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세상 탓이다.” 이처럼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변명하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자기를 기만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운명이나 남의 탓으로 돌린다. 자기의 잘못을 알고도 안락한 삶을 위해 의식적으로 잘못된 생활을 고집하거나 무식하면서도 유식하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식적인 자기기만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의식적인 자기기만이다. 요컨대 습관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자기를 표준으로 여기며 자기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의 인품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고 여기는 사람도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또한 전교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도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자기를 속이지 않으려면 하느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영웅적으로 실천한 성인(聖人)들의 삶에 자기를 비추어보는 것이다. 성인은 계속 노력하는 죄인을 의미한다.

 

* 박영식(야고보) 신부는 1976년 사제서품 후, 1978년 로마 유학, 1982년 로마 교황청직속 성서대학(Pontifical Biblical Institute)에서 석사학위(S.S.L.)를 취득, 1990년 같은 대학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받으셨습니다. 현재 복현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