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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10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박병규(요한 보스코) 신부

10월 4일 연중 제27주일 : 마르 10,2-12

2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이러하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들의 질문은 일단 ‘버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버려도 된다는 것이 유다전통이 가르치는 바이고 모세의 율법이 허락한 내용이다.(신명 24,1; 마태 5,31 참조) 이 ‘버림’의 주체는 남편이다. 남녀의 불평등이 만연된 유다사회에서 남자의 우월성은 당연한 것이다. 남자의 관점에서 버리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따져보는 바리사이의 질문은 그래서 하나의 차별화를 낳는다. 아내가 시원찮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남자들의 특권,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사회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면, 너무 지나친 해석인가?


어찌되었든 이러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마음’의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마음이 완고해서 남편과 아내가 갈라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는 것이다. 완고한 마음은 분리를 낳는다. 바리사이들 역시 자기네들끼리 깨끗하고 흠 없이 살려고 일반 서민들과 갈라진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바리사이라는 말 자체가 ‘갈라진 자’임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닫고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딱딱한 마음들, 예수님이 마뜩찮아 하는 마음들이다. 


예수님은 창조섭리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창조는 남자와 여자의 ‘화합’의 기초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다는 설명은 외과수술적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없는 노릇이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라는 일치의 의미를 가리키기 위한 재밌는 이야기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창조섭리를 통해 남자와 여자의 한 몸 되기를 강조하신 것이다. 더욱이 이 한 몸 되기는 하느님의 손길, 그분의 뜻이 담겨져 있다. 하느님께서 엮어주신 사랑의 끈을 누가 감히 떼어놓겠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남을 딛고 일어서려는 가치관, 남과 경쟁 하에서 내가 더 특출 나고자 하는 가치관, 이런 것들은 모조리 폐기처분해야 하지 않나 싶다. 분리는 악의 편이다. 갈라짐은 사탄의 술수다.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지 혼자 잘나면 그건 몹쓸 일이다. 함께 할 수 없는 누군가가 있다면, 연민의 정으로 보듬어주자.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예수님 따르는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말이다.

 

 

 

10월 11일 연중 제28주일 : 마르 10,17-30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 횡령…. 모두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해야 할 일 하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이다. 전자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들이고 후자는 감동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인간의 덕목이 된다. 부자는 전자의 것이든, 후자의 것이든 다 잘 지켰다 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는 부자에게 딱히 흠잡을 데가 없다. 예수님이 사랑으로 부자를 바라보신다. 영원한 생명을 향한 첫 번째 관문은 일단 통과인 셈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보자면 미래에 다가올 사건이 된다. 흔히들 세상 종말을 떠올리게 되는데, 다니엘서 12장 2절에 이런 말이 있다.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마지막 심판의 날에 현명하고 슬기로운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으리라는 이 말씀은 현재의 삶이 미래를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런데 신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의 시기는 그 관점을 약간 달리한다. 요한복음을 보자.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지금, 이 자리에서 믿어버린다면 이미 주어진 것이다.(‘내주시어’에 주목하자. 그리스 동사가 아오리스트 형으로 쓰였다.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여기에 있는 한, 이미 영원한 생명은 보장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부자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답은 간단하다. 예수님을 따르면 그만이다. 예수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이 나오니, 그분을 받아들이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 부자의 눈앞에 계신 예수님, 그분에게 온전히 달려가면 끝인 셈이다. 문제는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의 도덕적 덕목이나 윤리적 의무들을 훌륭히 수행하는 것으로는 안 될 일이다.


남들이 ‘착하다, 착하다’하는 올바른 삶을 살아내어도 예수님 따르는 일에 있어서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버려야’ 한다. 세상 것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세상이 주는 칭찬이나 환대, 그리고 세상이 판단하는 옳은 가치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그것들의 긍정적 해석이든 무엇이든 간에,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한다.


예수님만이 내 생애의 정답이 되도록 숱한 날들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따르는 것은 그토록 힘들고 슬픈 일이 되는 것이다. 세상살이 하는 우리에게 있어 세상을 나로부터 잘라내는 크나큰 통증이 수반되는 것이다. 호락호락한 취미생활마냥 세상살이 도구로서 신앙을 살아서는 안 되겠다. 큰맘 먹고 오늘부터 하나씩 버려나가 보자. 버릴 게 꽤나 많을 듯하다.

 

 

 

10월 18일 연중 제29주일 : 마르 10,35-45

35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37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39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40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41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42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4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청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 우리가 숱하게 드리는 기도다.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애절히 빌어보자.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왜일까? 하느님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잘못 빌어서 그리된 것일까?


대부분 우리의 청함은 지금보다 ‘더 나은’쪽에 무게를 둔다. 지금 이 상황이 해결되기를 바라는 데 청함의 이유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과 더불어 ‘영광’스럽게 되는 그 때를 청함의 목적지로 마구 정해버린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라는 것은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큰 권능과 더불어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님의 찬란한 재림을 의미한다.(13,26)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때는 고통을 수반한다. 예수께서 마시는 잔, 예수께서 받는 세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인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굳이 따오자면, 예수님의 이러한 영광은 그분이 ‘들어 높여지는’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들어 높여지는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일컫는다. 마르코도 요한도 예수님의 영광을 고통의 또다른 이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베대오의 두 아들, 그리고 우리! 고통을 빼낸 영광만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니 빈다고 이루어질 리가 있나.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비는 모습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볼썽사나운 모양이다.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프기 마련인가. 남이야 어떻든 자기네들만 잘 되길 바라며 애쓰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도 불편해진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다른 제자들에게 밉상인 건 그래서 우리 인간사에서도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자기네들끼리만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려 하니 곱게 보이지가 않는다.
이런 미움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단언컨대 ‘줄 세우기’이다. 함께 사는 세상에 너와 내가 어떻게든 달라야 하고, 내가 너보다 나아야 한다는 어리석은 확신이 이러한 미움과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당신도 섬기러 오셨다는데 우리는 섬김을 받는 자리에 늘 목을 맨다. 당신이 목숨을 바쳐 우리를 구하겠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다른 이의 피눈물을 애써 무시해가며 어떻게든 나만 잘 되겠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이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들었다면 이제 우리 다시 한 번 제대로 빌어보자. ‘우리’가 잘 되도록 빌어보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희생하여 이웃을, 우리 사회를 살맛나게 해달라고 빌어보자. 예수님이 살리려 하신 이 세상, 등지고 나만 잘 되기보다 모두가 잘 되어야 하지 않겠나?

 

 

 

10월 25일 연중 제30주일 : 마르 10,46-52

46 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눈이 먼 사람의 외침을 다시 들어보자.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외침의 대상은 분명 예수님이다. 그러나 외침의 주체는 눈이 먼 사람이다. 보지 못한 자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인즉, 메시아에 대한 고백이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 유다전통에서 메시아를 다시 일컫는 말이다.(마르12,35) 눈이 먼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앙고백의 결과는 무엇보다 눈이 다시 보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뻐한다. 예수님의 또 다른 기적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바르티매오의 청을 예수님이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을 예수께서 기적적으로 이루어주셨음을 우리는 통쾌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말이다, 예수님은 그 어떤 치유행위를 보이지 않으셨다. 다만 하신 것이라곤 이 말씀 한마디를 내뱉으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치유의 원동력은 바르티매오의 ‘믿음’이란 말이다.


예수님의 많은 치유기적들을 곰곰이 보자면, 대부분 예수님은 간절히 바라는 이들의 청원 안에서 그들의 믿음을 살펴보신다. 그리고 믿음 때문에 그들의 청원들이 이루어진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그렇게도 신뢰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 기적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치유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문제와 연결시켜야 한다.


괜한 육체적 변화에 대한 신비적 사건에 휘둘리지 말고, 나 자신이 치유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을 얼마나 믿고 있느냐, 그분과 함께 얼마나 내 삶을 꾸려가고 있느냐의 문제에 몰두해야 한다. 바르티매오 역시 자신의 치유 이후에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되었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다. 눈이 떠져서 온갖 세상 구경을 하겠다고 내가 보고 싶었던 것, 다 보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분만을 보겠다고 새로운 삶을 걸어간 것이다.  


우리 신앙인은 모두가 ‘성소’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네 삶이 예수께서 그렇게 불러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부르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자꾸 옆을 보고 자주자주 일탈의 유혹에 빠져드는가. 예수께서 저만치 가시는데, 왜 그렇게 자주 머뭇머뭇 하는가. 갈 길이 바쁘다, 용기를 내어 힘 있게 걸어가자.


* 박병규(요한 보스코) 신부는 5대리구 청년담당 사목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