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여름 방학동안 두 차례(8.7-10, 8.14-18)에 걸쳐 일본 나가사키에 다녀왔다. 앞에 다녀온 것은 이문희(바울로) 대주교님과 함께 성지순례차 간 것이었고, 뒤에는 가톨릭스카우트 캠프를 겸해 간 것이다. 두 번의 일본행은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이뤄졌다. 친구들은 같은 곳을 두 번씩이나 연달아 가다니 미쳤다며, 왜 또 가냐고 물었지만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첫 번째 여행의 기억이 정신없는 가운데 아쉬운 느낌이 들었기에 다시 갈 수만 있다면 정말 제대로 성지순례를 해 보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한 번 갔던 곳에 또 다시 간다는 것은 매우 지루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나 느낌이 다르다면 장소가 같은 곳이라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일본 천주교 선교사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549년 예수회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가고시마에 입국하면서 히라도를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일본에서 2년 반 정도 선교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가서 선교활동 중 상천도에서 운명하였다. 그 뒤를 이어 예수회의 토레스 신부가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과 함께 열심히 포교해 유력한 영주인 오무라 스미타라를 포함한 25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서양 문화를 환영하고 불교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크리스천을 지원하던 일본 집권자인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리스도인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해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어 실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길고도 잔혹한 박해가 계속되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잡혀 죽거나 배교하기에 이르렀다.
박해 기간 중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숨어서 어렵게 신앙생활을 해 나갔다. 그리고 200여 년이 지나서 도로라는 신부님이 프랑스에서 건너와 35년간 일본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선교하시다가 돌아가셨다. 도로 신부님은 판화를 찍어서 교리를 가르치고 생계의 방법으로 넓은 토지를 사서 밀농사를 지었다. 1등급 밀은 식빵에 사용하고 2등급 밀은 소면에, 3등급 밀은 마카로니로 사용하였다. 소면은 크게 인기를 얻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도로 신부님은 정어리 양식장을 건설하고 방파제도 설치하였다. 이 밖에 산모들에게 출산의 과정을 설명하고 의원을 설치하여 사람들을 돌보았는데, 이곳이 소토메 마을로 현재 이 지역은 유네스코 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 시츠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에서는 2명의 추기경이 선출되었고, 사제성소를 받은 사람이 300명이 넘는다. 현재 신자는 800명이 넘으며 140년 이상 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도로 신부님은 프랑스에서 종과 성모님상, 예수님상을 들고 왔는데 종은 원자폭탄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이러한 도로 신부님의 노력으로 천주교의 박해는 완화되고 선교활동 역시 자유로워졌다. 나의 꿈도 단순한 교구의 사제가 아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하느님을 알리는 선교사제가 되는 것이다. 남의 행복을 위해 내가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닌가 싶다.
원자폭탄도 없애지 못한 성지, 니시사카 순교지
일본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으로, 이곳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순교자 26명은 1862년 성인 반열에 올랐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이때 천주교 신자 75,000명 정도 사망했다고 한다. 그 중 12,000-13,000명이 조선인이었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지만 나가사키의 천주교 신자들은 이 모든 것이 일본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라며 죽은 신자들이 하느님께 봉헌된 것이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함으로써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대단한 신앙심이라 생각되었지만 한편,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사키 평화공원과 나가이 다카시
원폭지인 이곳에 공원을 만들고 평화를 상징하는 조각상들을 세워놓았다. 매년 8월 9일 원자폭탄 투하 날에 평화를 기원하는 미사를 지낸다. 이번 순례 중에 8월 9일 이문희 대주교님과 함께 기념제와 미사를 봉헌하였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전하는 평화의 의미를 마음 안에 새롭게 새길 수 있었다.
나가이 다카시는 일본 천주교 신자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적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킨 소설 《나가사키의 종》의 저자이다. 1908년 주고쿠 지방 시마네현 이이시마을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무사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치밀한 사고력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으나,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고, 혼자 독서를 하거나 조용한 담화를 즐겼다. 고교를 졸업하고 나가사키 의대에 진학하여 방사선학을 전공하였는데, 의대에 들어가서 시체를 해부하는 등 인체를 다루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부터 빠졌던 유물론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생각을 바꾸게 하였고, 점차 가톨릭 신앙에 가까워져 우라카미로 거처를 옮기면서 가톨릭 전통이 이어지는 마을의 분위기에 힘입어 가톨릭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1933년 2월 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하여 군의관으로서 만주사변에 종군하였다. 이때 아내가 가톨릭 신앙을 전도하여, 이듬해 귀환하자 바로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귀환 후 대학병원에서 결핵성 질환을 근절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에 백혈병에 걸리게 되었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그는 병원에서 X-Ray 필름을 선별하고 있었다. 원폭 피해의 복판에서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피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이미 죽어 있었고, 두 아이만 남아 있었다. 그 후 그는 폐허가 된 집터에 ‘여기당’이라는 움막을 짓고 아이와 함께 생활하였다.(如己愛人 :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여기당’에서 그는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집필 활동에 전념하여 5년 반 남짓한 동안에 무려 14권의 책을 썼다. 그리고는 스스로 ‘내 사랑하는 신부’라 불렀던 ‘죽음’을 맞았으며, 《묵주알》, 《만리무영》, 《이 아이들을 남겨 두고》 등 인간애 넘치는 작품들을 남겼다.
순례의 마지막 날 
비가 내린 뒤의 숲의 아침이란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이 맑고 순수하여 조금도 더러움이 없었다. 밤부터 울려 퍼진 매미 소리나 귀뚜라미의 노래는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캠프 순례의 마지막 날, 아침부터 매우 분주했다. 아마도 비가 와서 그랬나 보다. 4박 5일이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막상 익숙해진 캠프장을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꼭 이렇게 정이 들어갈 때 우리는 떠나야만 한다. 이것이 마치 삶의 정해진 원칙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다행히 몸이 불편하거나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에게 이곳에 다시 오라고 한다면 난 “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캠프나 여행이 아니었다. 나 자신에 대해 알고 내 성소를 확인한, 하느님이 불러주신 잔치였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이번 성지순례에 참여했고, 많은 것을 느끼고 얻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