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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제들의 성지순례기
신앙의 여정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김정희(바오로)|새신부, 복자성당 보좌

8월 3일 월요일, 그동안 책으로만 보고 귀로만 듣던 성지 중의 성지인 이스라엘로 향한다는 설렘에 밤잠을 설쳐 가며 이른 아침 공항으로 향하였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예수님과 성경 속의 인물들이 살아간 그곳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12시간이 넘는 비행시간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우리가 밤늦게 처음 도착한 곳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본격적인 일정은 이튿날부터 시작되었고, 먼저 인류문화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피라미드와 이집트 국립박물관을 견학하였다. 그 엄청난 위용과 찬란한 문화유산을 바라보며 입이 쫙 벌어지면서 이집트라는 고대 왕국의 강력한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미국보다 더 강력했을 이집트에서 어떻게 이스라엘이라는 그 작은 민족이 탈출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과 이스라엘에 대한 크신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그 무렵에는 이집트의 국력과 파라오의 위상이 최절정에 달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뒤로 점차 쇠약해져 갔다고 한다.

이집트의 놀라운 힘을 목격한 우리는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걸었던 광야 여정을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에게 쫓겨 어렵게 갈대바다(홍해)를 건너갔지만 우리는 수에즈 운하를 거쳐 버스로 아주 편안하게 광야로 들어섰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풀 한 포기 보이지 않고, 물 한 모금도 구할 수 없는 황량한 광야.

모세의 인도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사흘 만에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는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인간이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더욱 간절히 하느님을 찾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 앞에 놓인 어려운 상황만 보일 뿐 하느님은 어디가고 계신지 모르고 잊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 상황을 극복해주실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한 순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 삶을 통해 하느님을 점점 더 가까이 체험하는 하나의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지 순례에서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시나이산이었다. 낙타를 타고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모두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명을 받으러 시나이산에 오른 모세의 마음으로 새벽 일찍 시나이산으로 향하였다. 젊은 남자들로만 모여서인지 몰라도 다른 순례단보다는 훨씬 더 빨리 정상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 백성으로 첫 출발을 했듯이 주님의 사제로 첫 발을 내딛는 우리 각자의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성가 2번 ‘주 하느님 크시도다’를 부르면서 다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여정을 거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40년이 걸렸지만 우리는 불과 이틀 만에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입성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사전에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스라엘 국경을 통과하는 데 번거로운 일들이 많이 있었다. 함께한 신부님들 가운데 몇 분은 따로 불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하고 짐을 다 풀어 검사를 받아야 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하지만 어렵게 도착한 이스라엘은 과연 약속의 땅이었다. 물론 지금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경제력 차이도 있겠지만, 광야보다 이스라엘 땅은 정말 풍요롭고 비옥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구원을 이루신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에는 가슴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비록 2000년 전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성당들과 성지들을 순례하면서 거기에 해당되는 성경말씀을 봉독했고, 성경의 그 말씀들이 지금 이곳에서 우리에게 이뤄지길 기도하는 시간도 가졌다.




예루살렘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예수님 무덤 부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던 일이다. 원래 정교회 관할 구역인 이 성당은 하루에 딱 45분만 가톨릭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데 마침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미사에는 우리 사제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도 함께 하였다. 한국말로 미사를 봉헌했지만 모두들 한마음으로 하느님께 찬양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민족도 언어도 풍습도 다르지만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한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마지막 파견성가로 노(老) 수사님이 파이프 오르간으로 애국가를 연주할 때에는 가슴 뭉클한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예수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 8km 떨어진 곳인데 팔레스타인 구역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들어갈 때에는 검문을 받아야 했는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가로 놓여 있었다. 비록 왕래는 할 수 있지만 그 장벽은 우리나라의 휴전선보다 더 높아보였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고향에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불목과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인사말이 왜 ‘샬롬’이 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베들레헴, 아인카렘 등을 순례한 뒤, 우리는 예리코, 나자렛을 거쳐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갈릴래아로 향하였다.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지날 때에는 어부였던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면서 숙연해졌다. “나를 따르라. 그 그물을 버리고….”

성지순례의 마지막 종착점은 로마였다. 비록 24시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이었지만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우리 교회의 심장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특히 성베드로대성당 지하 베드로사도 무덤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은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외에 성바오로대성당, 라테라노대성당, 성모마리아대성당, 성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 등도 순례하였다.

성지순례를 마치면서 한 가지 기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집트, 이스라엘,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통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사업을 어떻게 이뤄 가시는지, 그리고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무엇보다 우리 새 사제들에게는 사제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더할 나위 없이 큰 은총의 시간이었으며 값진 선물이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