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7월 초 논산 육군 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배치되던 그 암울했던 날을 잊을 수 없다. 훈련소 중대장님이 아버님께서 별세하셨다는 비보를 전해 주었다. 며칠이 지나 고향을 찾았지만 아버님은 이미 무덤 속에 계시고, 돌아가시기 전에 그토록 큰 아들인 나의 이름만 부르셨다는 허공의 메아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아버님이 이 세상 숨을 거두시며 부르시던 그 이름인 나 자신이 다시 이 세상 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성호야! 성호야!” 부르시던 아버님의 그 마지막 절박했던 외침을 어찌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가 있겠는가!
지난 6월 28일 병원 중환자실에 계신 최 대주교님을 찾아뵙고 교구청 신부들의 안부를 전해드렸다. 최 대주교님께서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시며 “교구청 신부들이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짧은 단어 몇 개의 연결에 불과한 그 말씀이 왜 이토록 마음에 그리움을 사무치게 하는지, 얼마나 그리우셨을까? 병마와 외로운 투쟁을 하시면서도 그날과 같은 그 간절한 마음의 그리움을 한 번도 표현해주시지 않으셨는데….
최 대주교님께서 생의 마지막을 직감하시고 표현하신 “교구청 신부들이 보고 싶다.”는 몇 개의 단어 연결에 함축되어 있는 그분의 마음을 하나 둘 풀어 나의 마음에 담아본다. 대주교님을 만날 때 나누었던 대화들, 교구 사무처장으로 발령받아 교구청 숙소에 짐을 풀고 있을 때 직접 나의 방에 들러 수고를 당부하시던 말씀, 투병생활 중에서도 교구의 제반 업무들을 챙기시며 당부하시던 말씀들을 비롯한 그분의 마지막 삶의 당부가 그 짧은 몇 마디의 말씀 안에 다 녹아들어 있음을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더욱 새롭게, 그리고 크게 깨닫게 된다.
교구장에 착좌하시면서 그분은 무엇을 꿈꾸셨을까? 오늘의 대구대교구를 설계하시고 발전시켜주신 쟁쟁하신 역대 교구장들을 계승한다는 마음의 큰 짐을 잠시 접어두시고 곧바로 2011년 교구설정 100주년 준비를 위한 마스트플랜 마련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시고자 하셨다. 하지만 당신께 보고되고 들려오는 소문들은 그리 탐탁치가 못했다. 그런 분위기를 새롭게 긍정적인 분위기로 전환시키지도 못하시고 건강이 악화되어 투병생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최 대주교님의 그 고독함을 어찌 멀쩡한 우리들이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2009년 8월 31일 월요일 아침 6시 20분, 그토록 멋진 교구장의 꿈을 품으셨던 최영수 요한 대주교님께서는 모든 이 세상의 짐과 고통, 고독과 외로움을 당신의 마음에 부여안으신 채 67세라는 나이로 세상의 눈을 감으셨다. 아쉽게도 일생의 꿈, 교구장으로서 가지셨던 포부를 내려 놓으셔야만 하셨다. 가시는 마지막까지 일선사목에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주일을 피하시고 당신 죽음의 시간을 월요일로 주님께 청하셨던 모양이다.
그분의 일생, 아니 그보다는 더 정확하게 2년 반도 채 못 되는 교구장 재임기간 동안 주님과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적으로 봉헌하시며 가지셨던 그 푸른 희망의 꿈은 이제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는가? 그분의 죽음과 함께 그분이 품으셨던 그 희망의 꿈도 사라져 버리는 것인가? 누구를 추모한다는 것은 그분이 품으셨던 꿈과 희망을 헤아리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최 대주교님을 추모한다는 것 그 이미는 과연 무엇일까? 숨을 거두시며 “성호야!”라며 부르시던 아버님의 당부를 채워드리지 못해 오늘도 난 불효자임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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