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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 마리애 체험사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윤복자(마르타)|죽도성당 ‘애덕의 모후’ 쁘레시디움

저는 1978년 충북에서 남편 하나 바라보고 포항으로 시집왔습니다. 하지만 시댁 집안에는 스님이 두 명이나 있었고, 절까지 가지고 있는 독실한 불교집안이었습니다. 성가정을 바랐던 저의 종교생활은 참 힘들었습니다. 집에 십자고상이나 성모상 하나 제대로 모실 수 없음은 물론이고,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면 남편과 시댁에서는 모두 저의 종교 탓이라 원망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남편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제 남편이 주님을 알게 해주시고 이 세상 떠나기 전에 꼭 주님을 믿게 해 주소서.’

남편이 방황할 때, 딸아이가 어긋날 때 저는 많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제 인생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와 남편은 하는 일마다 순탄치 못했고 제 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딸은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매번 1, 2점 차이로 아깝게 떨어졌습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고, 열심히 살아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그러던 2007년 여름, 주일에 미사를 참례하고 나오던 길에 갑자기 딸이 청년회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러라고 했습니다. 시험에 자꾸 떨어지고 아빠 때문에 힘들어 하던 딸은 성당에서 위안을 받고 싶었던지 청년회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딸아이가 점점 밝아지고 기도도 더욱 열심히 하더니 2008년에는 공무원 시험에도 두 군데나 합격하고 성당에서 착한 남자친구도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늘 제 딸만큼은 제가 이루지 못한 성가정을 이루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제 소원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듯 했습니다.

딸아이가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2008년 봄에 해미로 성지순례를 갈 기회도 생겼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는 차안에서 레지오 활동을 하는 분을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애덕의 모후 쁘레시디움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레지오 가입이 저의 삶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딸도 저도 기도하는 시간이 늘었고 성당에 가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우리 가정에 주님이 평화를 주시는 듯 하여 조금씩 행복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나봅니다. 딸아이가 시험을 치기 전날 남편이 위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갔습니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중태에 빠질 때까지 남편은 대세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죽어서도 같은 곳으로 가자고, 하느님 믿고 하느님 나라로 가자고 했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하고 침대에 누워 그제야 남편은 알겠다고 하더군요.

대구 경북대학병원에서 대세를 받고 며칠 뒤 포항의료원으로 옮겼습니다. 딸아이에게 성당에 가서 묵주를 하나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딸아이는 성당에 가서 묵주를 사고 축복을 받기 위해 보좌신부님께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보좌신부님이 포항의료원까지 와서 병자성사를 주고 가셨습니다. 남편은 보좌신부님의 눈을 보며 하느님을 믿느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완전히 의식이 없어졌습니다. 저도 딸도 옆에서 밤을 지새가며 간호했습니다. 구룡포성당에 다니는 친구가 와서 임종예식을 해주었습니다. 제게도 임종기도를 계속 올리라고 하기에 임종기도를 했는데 그때가 11월 13일 2시 30분이 좀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임종기도를 막 마치는데 딸아이가 남편을 막 흔들며 “아빠! 아빠!”하고 부릅니다. 그리고 불과 몇 분 만에 남편의 맥박이 멈추더군요.

포항의료원에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참 많은 사람이 와서 연도를 해주었습니다. 대세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부님이 스스로 찾아와 병자성사를 주시고 임종기도를 받고 많은 사람들의 연도도 받고… 참으로 남편은 신자가 될 운명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딸아이가 청년회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많은 신자가 찾아 왔을까? 해미성지 순례의 차안에서 제가 쁘레시디움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이런 많은 분들의 연도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보다 더 열성적으로 제 남편 장례를 위해 봉사하는 저희 쁘레시디움 단원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라고 느꼈습니다.

죽도성당에서 장례도 치렀습니다. 저희 친척들도 장례미사에 참석했는데 모두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장례를 마치고 불교신자인 저의 맏형님은 자신도 하느님을 믿고 싶다며 성당에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삼촌도 성당에 어떻게 해야 다닐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삼촌은 6월말에 교리반에 입교하여 현재 교리를 받고 있는 중이며 12월 24일에 세례를 받을 예정입니다.

아마도 하느님은 남편을 하느님의 도구로 쓰신 것 같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딱 5일 정도를 주님의 자녀로 살았지만 저는 그 짧은 기간에 주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심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저는 그렇게 기도했던 성가정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하느님, 이렇게 해 주세요. 저렇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힘든 길이든 행복한 길이든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남편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힘든 일이 있다고 원망하지 않으며 모든 것에 감사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