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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11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심탁(끌레멘스) 신부

11월 1일 연중 제31주일, 모든 성인 대축일 : 마태 5,1-12
1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마태복음의 낯선 행복론, 그것은 세상의 행복론과 다르다.

1. 제2독서 요한 1서가 비추어주는 복음적 행복론
1) 아직은 드러나지 않는 행복(1요한 3,1) :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행복론은 ‘하느님을 아는 것’으로 결정이 난다. 하느님을 알면, 하느님의 종들-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의 복음적 행복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의 복음 선포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적 행복을 선포하기 위하여 주님의 종들이 선포자로 파견되고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임을 세상에 증거한다.


2) 그분께서 나타나셔야 비로소 알게 되는 행복 :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하느님을 아는 것’에는 대원칙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기계시를 해 주셔야 한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쥐신다.’는데 있다. 하느님의 주도적인 자기계시를 얻어 만나는 사람은 그분의 현존과 함께 하는 영원한 행복에 이미 초대된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를 만나는 자체가 이미 완전한 행복의 시작이다.
일찍이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곧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얼굴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신다. 하느님의 자기계시와 현현으로 인간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행복의 완성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지복직관의 상태이다. 이것이 하느님 자기계시의 궁극적 비전이며, 신앙인의 완성된 그림이다.


3) 따라서 그리스도처럼 순결하게 되는 미래를 희망하는 행복론(1요한 3,3) : 행복의 완성된 모습의 유일한 모델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고통(苦痛)과 한(恨)이 서려있는 지금의 이 세상에서 그 행복은 ‘지금 당장’ 현실이 아니다. 게다가 도무지 육안(肉眼)으로 볼 수도 없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참 행복(幸福)은 현세적이지 않다. 이점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행복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행복을 맛보고 체험한 사람은 현실의 고난과 역경을 넘어 그 행복의 완성이 천상(天上)적이며 미래지향(未來指向)적인 것임을 안다.
    
2. 제1독서 묵시록이 증언하는 복음적 행복
1)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때를 기다림’ 안에서의 행복(묵시 7,2-4) :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묵시 7,3) 요한 묵시록의 시대적 배경은 가장 혹독한 그리스도교 박해(도미시아누스 통치, 기원후 81-96년) 시대이다.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론적 신앙으로 현재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다. 지금이 혹독한 박해의 시대라 하더라도,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아는 사람은 고난의 현재를 감내할 수 있다. 그리고 기다릴 수 있다.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과 참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현세의 고난과 역경을 견딜 수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불이익은 순수하게 부당하게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2) 선택된 이들의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행복(묵시 7,9-14) :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묵시 7,14) 그리고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한 사람들”(묵시 7,14)을 요한은 환시로 본다. 현재의 박해(고난과 역경, 불의와 폭력 등)를 긍정적 태도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고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성취한 사람들의 모습을 미리 바라봄으로써 가능하다.  미래의 궁극적인 희망이 없다면, 궁극적으로 성취되어야 하는 참된 진리가 없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견딜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걸고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며 고생을 피해야 한다.

 

3. 모든 이가 행복의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당신도 나도 행복의 주인공이다.
두 가지 독서에서처럼 세상의 고통과 억울한 박해의 현실에 대한 관점이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기준으로 정돈이 된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불행에도 상처입지 않는다. 참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믿음을 가진 사람이 (모든 불행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참 행복의 주인공이다. 만약 지금 내가 현실의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내가 바로 그 행복의 주인공이다.
1)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2)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3) 모욕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 거짓말로 중상모략을 받는 사람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의 주인공이다. 이제 긍정적 사고와 판단력을 가지고 희망차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자.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 : 마르 12,38-44
38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1. 자신의 위선을 파악하라. 위선을 제거하라. 
예루살렘 입성 후, 예수님의 언행은 종교 권력의 한 그룹인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더욱 직설적으로 공격하신다. 율법학자들은 본래 평신도들이다. 그들은 율법학교를 졸업하고 일종의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상설법정인 산헤드린에 자신의 자리를 가지며, 한 주에 두 번 성전에서 모인다.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율법박사’라는 칭호를 받는다.
집회 38,34-39,11은 율법학자들에 관하여 길게 다룬다. 특히 집회 39,1-3 참조.
율법학자들은 대중의 인정(認定)을 받으며 항상 시나고가에서는 가장 앞줄에 앉는다. 그들이 설교를 할 때는 대개 대중을 향하여 서서, <율법서>를 등지고 설교를 한다. 이 때 율법대신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거나 내용상 위선적인 가르침이 드러나기도 한다. 설교자가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이나 권위로 무장을 하는 수가 있다. 마르코복음의 문맥에서도 마치 예수님께서 죽음을 재촉하시는 듯하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후 권력자들이 집단적으로 적대감에 휩싸여 음모를 꾸밀 정도로 직설화법을 쓰신다.

 

2. 최고의 봉헌을 하라.
1) 양보다 질을 의식하라.
가난한 과부의 액수가 매우 작은 헌금(그리스 동전 ‘렙톤’ 두 닢 = 로마 동전 ‘콰드란스’ 한 닢)을 부자들의 큰 돈 헌금에 비교된다. 그러나 과부의 헌금이 예수님 눈에는 훨씬 훌륭하다. 세상은 주로 양적 차원의 비교를 한다. 예수님은 질적 차원에서 바라보신다. 가난한 과부가 바친 헌금은 양적 차원에서는 부자의 헌금에 비교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은 최상급의 봉헌임을 선언하신다.


2) 부(富)나 지식(知識)보다 사람의 됨됨이를 보라.
큰돈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다. 큰돈은 공동선을 위하여 현실적으로 더욱 결정적으로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다. 못난 부자들은 사회적으로 부의 ‘권력’을 누리며, ‘교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내리누른다. 그릇된 율법학자들은 율법지식을 ‘권력’으로 삼아 ‘능력’을 과시하고, ‘교만’과 ‘실천이 없는 말만의 율법’으로 사람들을 기만한다. 현실적으로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생계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전적인 봉헌’의 태도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꿰뚫어보시고 높이 평가하신 과부의 봉헌은 바로 그것이다.


3) 자신의 것을 다 내어놓는 순종이 더 크고 훨씬 오랜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생계의 위협을 받던 사렙타의 과부가 엘리야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언자에게 우선적으로 음식대접을 ‘실천’하고, 그 결과 그의 예언대로 ‘축복’이 내려머물러 그 과부의 집안에는 오랫동안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1 열왕 17,10-16)

 

3. 영원한 축복을 원하는가? 그리스도의 구원 공로를 믿고 받아들여라!
히브 9,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 모든 죄인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치르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제사는 산 이와 죽은 이, 사람과 자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단 한 번의 완전하고 충만한 대가를 치르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믿고, 그 능력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믿는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한다. 믿는 자는 종말의 온갖 위협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의 위협도 그들의 믿음과 행복을 앗아가지 못한다. 부자의 돈도, 율법학자들의 지식도 모두가 죽음의 위력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다만 수명을 연장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 평신도 주일 : 마르 13,24-32
24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1. 마지막 날의 앞 모습은 재앙이나, 마지막 날의 진면목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
1) 마지막 날의 시작은 대재앙이다.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온다.(다니 12,1) 환난과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어둠이 닥치고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려(마르 13,24) 대혼란이 생긴다. 


2) 그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가져 오신다.
그 가운데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신다. 그것을 사람들이 본다.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들을 위협하거나 겁주는 것이 아니며,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희망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역사의 모든 장막을 걷어내고 하느님 구원의 현존과 현현을 드러낸다.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위대하신 날을 선포하고,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하느님의 결정적인 승리를 예고한다.(참조. 요엘 2,10-11;3,1-5;4,15-16) 그들이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승리다. 결코 인간에 대한 위협이 아니다. 또한 그들이 선포하는 것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믿음을 북돋우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구원은 총체적이다.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수직) 사방에서(수평) 모을 것이다. 신약성경은 종말에 대한 말씀을 선포한다. 여기서도 역시 궁극적인 선포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는 ‘악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이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4)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원은 단 한 번이며 영원한 것이다.
다니 12,1-3, 마지막 재앙의 그 때, 미카엘 대천사가 나타나고,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고,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중의 많은 이가 깨어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히브 10,11-14.18,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의 제물과 예물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시고, (죄인인) 우리를 무죄하게 만들고 우리를 영원하고 완전하게 거룩하게 하신다. 여기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사를 바치셨으므로 이제 더 이상의 속죄예물은 필요 없다.

 

2. 마지막 날의 과정은 표징으로 드러난다.
1) 누구나 쉽게 표징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에 의지하여, 깨어 그 표징을 읽어라.(마르 13,28-31) 마지막 날의 표징을 읽는 것은 자연 속에서 무화과나무의 가지와 잎을 보고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이치와 같이 쉽다. 표징을 통하여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세대 안에 모든 일이 일어남(현재성)을 믿을 것이며, 특히 예수님의 말씀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말씀의 성취)을 믿어라. 그것을 위하여 믿음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때’에 대한 집착은 버려라!
하느님의 ‘때’를 예고하는 사이비 교주나 광신도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의 때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가 하면, 행운과 행복의 때는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오래’ 머물기를 원한다. 사람의 상황에 따라 그 길이가 다르게 느껴지는 ‘실존적 의미의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일이 성취되기를 바란다. 즉 ‘때’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때의 절대 주인’이시다.


3) 다만 아버지만이 그 때를 아신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의탁하라!
천지만물과 인간의 창조주, 자연의 시간과 공간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해와 달과 절기를 만드시고 운행하신다. 그러므로 존재와 시간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만 ‘때’에 대한 답이 있다.

 

3.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이 최선이다.
존재와 시간에 관계된 모든 문제는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와같이 하느님을 알고 믿고 의탁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과 인간의 죽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다.

 

 

 

11월 22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연중 제34주일 : 요한 18,33-37
33 그리하여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1. 빌라도의 태도에서 나 자신의 그릇된 태도를 발견하고 반성하라
1) 자신의 신념이나 소신의 말을 하라.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빌라도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는 말을 받아 예수님을 취조하고 있다. 거기에는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에 관계된 자기만의 생각도 없다. 그저 사건의 소요를 막고 조용하게 일처리를 하고 싶을 뿐이다.
그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예수님은 재판 자체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을 생전 처음으로 마주하는 빌라도의 영혼 내부를 꿰뚫어 보시며 질문을 던지신다. 사실 빌라도는 재판을 하는 입장에서 ‘인간 생명관’이나 ‘세계관’이나 ‘가치관’ 등에 입각해 있지 않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연연해 있는 불안한 정치가로서, 소요사태 진압을 원할 뿐이다.
국민을 섬기는 사람들이나,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신앙이나 신념의 가치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사목형태나 대인관계가 옳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이나 그분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실제로 무지하고 무관심하다. 그의 관심은 정치적 이익(외적인 안정)을 구하는데 있다. 또한 이것은 빌라도 자신에 대한 로마황제의 정치적 평가를 의식한 것이다.


2) 모든 일을 이 세상의 일로만 보지 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며 실권을 가장 두려워하는 총독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된다. 그러나 기본 관심이 너무나 다르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담기지 않는다.


3) 빌라도여, 참된 진리를 추구하라!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빌라도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에서 나온 말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거짓 증언이나 고발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범죄자 취조하듯 대하고 있다. 그는 사건의 사실성 여부나 특히 진리에 대한 관심은 없다. 정치적 이익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소인들은 매사에 이익(利益)을 추구하고, 군자는 매사에 의(義)를 추구한다고 했다. 빌라도는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진리를 무시하고, 로마 제국의 시선과 백성의 여론 사이에서 줄타기 처세술을 펼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존재다.

 

2.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증언하는 법을 배우라.
1) 자신의 말과 상대방 말의 생명성, 진실성을 꿰뚫어라.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취조 질문에서 ‘남들이 하는 거짓 고발’과 ‘빌라도 자신의 양심적 판단이나 신념의 말’을 구별하신다. 빌라도는 자신의 ‘양심적 판단이나 가치관과 신념도 없이’ 또한 남들이 왜곡해서 전하는 말에 대해 ‘검증이나 건전한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심판하는 자리에 권력을 행사하며 사람의 생사가 달려있는 말을 하고 있다. 참으로 위험천만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을 높이기 위한 교만한 말뿐 아니라, 얼마나 남의 말을 쉽게 하는가? 얼마나 자주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 치명적인 인권침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을 하는가? 더구나 ‘이웃을 살리는 말’, 긍정적이고 활력을 불어넣는 사랑의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일이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말의 생명성과 진실성을 꿰뚫고 계신다.

 

 

2) 우문현답(愚問賢答). 하느님 나라의 내용을 말하고, 하느님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라.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빌라도와 대화를 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생명과 진리에 대한 기본 입장을 갖추지도 않은 채, 남들을 지도하고 생사(生死)를 좌우하는 재판을 주도하고 있는 빌라도에게 ‘생명과 진리에 대한 깨우침을 주고자’ 하신다. 생명과 진실을 지키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간직해야 한다.
이제 빌라도는 예수님을 만난 이 순간에, 그분과의 대화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생명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눈을 떠야 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정치적 이익을 향해 거짓고발을 한 유다 지도부와 우중(愚衆)의 여론을 수렴하여 판결을 내리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자 손을 씻는다. 물로 손을 씻는다고 생명과 진리를 저버린 어리석음이 씻기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의 판단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많은 생명들이 되돌아오지도 않는다.

 

3) 진리를 위하여 존재하고, 진리를 위하여 세상에 나서고, 진리를 증언하라.
흔히 사람들은 인생과 세상에는 먹고사는 문제와 정치적 사회적 명예와 권력의 문제를 주로 고민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인생이 참으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자신의 일시적 권력을 지키기 위해, 불의한 선동과 배타적인 거짓 여론을 받아들이는 빌라도는 결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는 결코 평화로운 내면세계를 갖출 수도 없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현세의 불이익과 불행을 피해가는 정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불이익과 불행을 겪는다고 파괴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현세의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에 속한 것이다.

 

3.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사수하라.
<묵시 1,5-8>
1) 예수 그리스도(성실한 증인-죽은 이들의 맏이-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의 은총과 평화가 가장 혹독한 그리스도교 박해(도미시아누스 통치, 기원후 81-96년) 시대에 선포된다. 그 박해를 이기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피로써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하느님 나라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요한묵시록은 구약성경의 에제키엘, 즈카르야, 다니엘서의 묵시문학적 전승들을 수용하고 있다. 또한 묵시문학은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후 200년 사이에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대중적이었다. 시대적으로는 그리스 통치와 박해 및 로마의 통치와 박해시기를 반영한다. 요한묵시록에서는 많은 상징적인 모습과 사건들이 시각적으로 현실적인 무엇으로 묘사된다.

 

2)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보편 사제직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심이 선포된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 모든 눈들이 그분을 본다. 그분을 찌른 자들 뿐 아니라, 땅의 모든 민족들은 그분을 보고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종말론적 그날, 온 우주가 그것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과거와 현재의 현존과 미래에 완전한 행복과 평화를 위해 도래하실 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파요 오메가이시기 때문이다.

 

 

 

11월 29일 대림 제1주일 : 루카 21,25-28. 34-36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1.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루카 21,28)
하늘의 표징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와 두려운 예감들이 닥칠 때가 온다. 민심은 천심이라, 그 때는 민심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늘의 위기의 순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때이므로, 앞선 위기감은 구원의 전조(前兆)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표징들이 민심을 뒤흔들면, 앞선 위기감을 뒤따르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 한다.

 

2. 스스로를 조심하라.(루카 21,34)
하늘의 표징들이 민심을 뒤흔들면, 즉시 자기 자신을 살펴야한다. 밖으로 향하던 자신의 관심과 에너지를 자기 안으로 되돌려야 한다. 남의 탓에서 원인을 찾기보다 자신의 인생의 기본적인 선택을 확인하여야 한다. 나는 어디서 온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나는 무엇으로 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며 삶의 본질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복음적 자기 살핌을 위하여 마태 5-7장 산상설교를 참조할 수 있다.)

 

3.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라.(루카 21,34)
이사 6,10 :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이사 59,1 : 그분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잠들거나 둔감한 자는 그저 자기 자신만 곤란을 겪고 난처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선을 해치며 사회악을 조장하고 허용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치명적이다.
로마 1,18-32 :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둔하고 신의가 없으며 비정하고 무자비한 자입니다. 하느님의 법규를 알면서도, 그들은 그런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4. 그 날이 너희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라.(루카 21,34)
1) 항상 최악의 사태가 무엇인지 생각하라.
2)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유롭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행동하라.
3) 최고의 이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라.
4) 그리고 항상 펼쳐지는 시대의 표징을 읽어라.
5) 기회를 기다리기보다 항상 준비하고 매일 전진하라.

 

5.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 21,36) : 기도하는 원칙들을 배워라!
1) 올바른 기도를 드려라.(마태 6,5-8)
① 위선자처럼 기도하지 마라.
② 숨어계신 하느님께 기도하라.
③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을 닮지 마라.

 

2) 주님에게 직접 배운 기도의 모델을 따라라.(마태 6,9-15) : 주님의 기도를 본 받아라.
①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과 이름을 빛내라.
② 아버지의 나라와 뜻을 먼저 받들라.
③ 그것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라.
④ 그런 다음 일상의 필요한 바를 청하라.
⑤ 내가 하느님께 용서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어라.
⑥ 유혹과 악에 빠지지 않도록 청하라.


3) 단식기도를 할 때 하느님께 보이도록 하라.(마태 6,16-18)


4) 보물을 하늘에 쌓는 자세로 살라.(마태 6,19-21)


5) 내면을 먼저 닦아라.(눈은 몸의 등불 마태 6,22-23)


6) 걱정을 하지 마라.(마태 6,25-34) : 기도는 걱정을 덜어준다.


7) 남을 판단하고 탓하지 마라. 자신을 돌아보라.(마태 7,1-5)


8) 멈추거나 주저하지 말고,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라.(마태 7,7-11)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서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주시겠느냐?”


9) 주님의 뜻과 말씀을 실천하라.(마태 7,21-27)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심탁(끌레멘스) 신부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사제로 사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