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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부의 먼 곳에서 만나는 예수님
부패


마진우(요셉)|대구대교구 신부, 볼리비아 선교 사목

이곳 산타 크루즈에 와서 생활이 익숙치 않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공소 첫영성체를 준비하기 위해 꽃을 사러 나섰습니다. 시외버스 정류장 근처에 차를 대고 꽃을 사고는 나와 차를 타려는데 한 경찰이 옆에 다가와 문을 두드렸습니다.

“주차위반 구역에 차를 대셨네요. 면허증 좀 주시죠.”

“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여기….”

“어이쿠, 차량 검사 필증도 없으시네요. 이건 벌금이 100볼리비아노인데요.”

그러면서 들고있던 수첩을 펴보입니다. 거기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위반한 항목과 벌금이 형광펜으로 죽 그어져 있었습니다. 환율에 따라 다르지만 100볼리비아노면 한국돈으로 대략 2만 원 정도의 돈입니다. 여기선 좋은 레스토랑에서 네 번 정도의 식사를 할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뭐 100볼리비아노면 적지 않은 돈인데… 하지만 조금만 기부를 하시면 그냥 가실 수 있습니다.”

“얼마를 원하시는데요?” “20볼리비아노 정도….”

전에 형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액수가 지나치게 많으면 같이 경찰서를 가버리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주고 말라는 것이 생각나서 그냥 20볼리비아노를 주고 와 버렸습니다. 집에 와 형들에게 이야기를 하니 김종률 신부님이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건 꼴라보라시온(Colaboracion=기부)이 아니라 꼬룹시온(Corupcion=부패)이다!’

다른 날은 내가 담당하는 시골 공소에서 한 아저씨가 나무에서 일을 하다 머리부터 떨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었습니다. 급한 대로 병원에 가서 응급치료는 받았지만 돈이 부족해 엑스선 사진을 찍는 간단한 검사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도와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곳 볼리비아의 도로 사정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최근 들어 중고차들이 싼 값에 무차별적으로 들어와 시내의 교통은 그야말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신호등이 노란색으로 변하려는 찰나 사거리를 건너다가 경찰에게 저지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찰은 대뜸 내 차에 올라타서 면허증을 요구했습니다.

“왜 여기 타는 거예요? 벌금 통지서 주세요. 나중에 가서 벌금을 낼게요.”




“지금 벌금 통지서가 다 떨어졌습니다. 저와 같이 경찰서에 가 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동네 경찰들이 종종 쓰는 수법입니다. 사람들을 귀찮게 만들고 그게 싫으면 돈을 좀 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한국인 신부인데 지금 병원에 급한 환자가 있어 도와주러 가는 중이거든요. 그럼 저와 같이 먼저 병원에 들렀다가 그 다음에 제가 경찰서에 갈게요.”

내 면허증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침묵하던 경찰이 물었습니다. 그나마 양심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톨릭 신부입니까? 개신교 목사입니까?”

“가톨릭 신부예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차는 벌써 거리 몇 개를 지나 왔습니다. 그 경찰은 좀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이번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요. 헌데 여기까지 왔고 하니 제 경찰 오토바이 기름 값이라도 좀 주시면….”
다 알아들었지만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을 했습니다.

“예? 뭐라구요? 기름을 달라구요? 무슨 기름요?”

“아, 아닙니다.” 그러고선 그 경찰은 내려 버렸습니다.

이 곳 경찰들은 가난하다고 합니다. 들은 말로는 권총도 경찰서에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시장에 가서 사와야 한다고 합니다. 자연스레 위에서 언급한 모습의 어두움들이 만연하게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동양 사람은 좋은 표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부패는 단순히 외적인 조건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삶이 어렵노라고 모두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단순하고 편협한 논리입니다.

진정한 부패는 내 안에서 시작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패의 첫 걸음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이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고,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진짜배기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은 부유한 나라입니다. 많은 이들이 입버릇처럼 돈이 없다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이면 전세든 월세든 자기 집 안에서, 하루에 적어도 식사 한 끼를 하며, 따뜻한 옷을 입고 게다가 여분으로 <빛> 잡지 한 권 정도를 살 돈은 있는 분이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본적인 것을 갖추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냅니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누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탐욕은 곧 어두움, 죄로 이어집니다. 세상 안에서 들려오는 온갖 어두움의 소식들 중에 돈이 관련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어두움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가 신자이건 아니건, 사제이건 수도자이건 모두가 그 유혹의 대상이 됩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예외가 될 순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탐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절제해야 하고, 나눔을 연습해야 합니다. 길가다 마주치는 걸인에게 그야말로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단돈 100원이라도 적선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나눔을 실천하다보면 어느 샌가 내가 지금 가진 것이 원래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고 좀 더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먼 훗날에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아무런 미련 없이 남은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절제와 나눔, 다시 말해 <기도와 단식과 자선>, 이 세 가지 덕목은 바로 재물에 대한 탐욕을 예방하기 위해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앙 선조들의 훌륭한 유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예비하는 이 대림시기, 우리가 가진 것을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면서 올 한 해를 아름답게 마무리 지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