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 대림 제2주일 : 루카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티베리우스 황제(기원후 14-37년)의 치세 제 십오년, 즉 기원후 28- 29년 인류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났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 메시아께서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팔레스티나, 카야파가 유다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환심을 싸서 대사제가 되어 유다를 다스렸을 때 대중 앞에 나타나셨다. 이처럼 구원은 강대국의 점령 밑에서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작은 땅, 저버림 받고 척박하고 가난한 곳이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독선과 횡포를 자행하는 곳에서 실현되기 시작되었다. 예수 메시아와 선구자 세례자 요한은 절망의 시대에 강자의 억압을 받고 있는 이들 가운데 하나가 되셨던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고 유다 광야에서 요르단 강 주변을 두루 다니면서 죄의 용서를 목적으로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다. 물로만 주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예수 메시아께서 베푸실 성령과 불의 세례와 비교될만한 가치가 없었다. 죄 용서는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은혜이고(루카 5,17- 26),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신 데서 비롯된 것이다.(사도 2,38; 5,31) 세례자 요한의 세례만 받은 사람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성령을 받고(사도 19,4)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 죄를 용서받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고 죄의 용서에 대한 지식을 주었을 뿐이다.(루카 1,77)
세례자 요한이 펼친 세례운동은 이사야의 예언을 실현한 것이다.(루카 3,4-6) 이사야는 하느님이 바빌론 유배(기원전 587-538년)에서 당신 백성을 해방시켜 광야를 거쳐 고향으로 데리고 오시도록 주님의 길을 준비하게 하라는 신탁을 받았다.(이사 40,3-5)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는 위 이사야의 예언이 유배생활에서 해방됨으로써 실현되지 않고 예수 메시아께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 것으로 성취되었다고 알아들었다.
세례자 요한이 그것을 광야에서 선언했다. 광야는 정화의 장소요 구원이 베풀어지는 곳이다.(호세 9,10)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 43,19) 광야에는 메시아의 선구자 요한의 목소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다. 광야에는 도시의 화려한 건물이나 각양각색의 광고물이나 물질 만능을 조장하는 유혹이 없고 가난과 고독과 시련밖에 없다. 바로 이런 곳이 메시아께서 계시되는 장소이다.
나는 구세주께서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고 번영과 성공을 누리는 곳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 마음속에 광야를 만들어야 예수님이 임하신다. ‘영적 광야’는 하느님 말고는 그 어떠한 사람이나 물질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마음을 상징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이 오심을 준비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교만한 사람은 겸손해야 하고, 마음이 비뚤어지고 악하며 예수 메시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 하느님과 이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교만과 이기심을 없애고 오히려 자기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처신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겸손과 순종은 인류가 예수 메시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 이와 반대로, 현세생활에 집착하면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이웃의 기쁨이나 슬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허와 고독의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하느님보다 이 세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은 어둠과 죽음의 세계 속에 갇히고 만다.
12월 13일 대림 제3주일 : 루카 3,10-18
10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18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군중과 세리들과 군인들은 임박한 심판을 대비하기 위해 회개를 서두르라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고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루카 3,10-14) 그는 군중에게 생활필수품이 궁핍한 이들을 보살피라고 일렀다. 세례를 받으러 온 세리들에게는 직업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정액만 징수하며 정직하라고 일렀다.(루카 3,12-13) 당대 로마제국의 식민 통치 아래 세관장은 총독부에서 할당한 세금을 미리 지불하고 정액보다 더 많은 액수를 거두어들이곤 했다. 또 자캐오(루카 19,2)와 같은 세관장이 고용한 세리들과 이들이 고용한 부하 세리들 중에도 탐욕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세관장과 세리들은 유다 사회에서 악명이 높았다.
세례자 요한은 군인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등쳐먹지 말고 제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일렀다.(루카 3,14) 그들은 헤로데 안티파스 군대의 용병들인 것 같다. 세리들을 두둔해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거나 무력으로 돈을 강탈하거나 갈취하곤 한 것 같다. 제 봉급에 만족함으로써 부패한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 앞장을 서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당대 불의한 사회구조를 전복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공직에 근무하는 이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직을 남용하지 말고 사회의 공동선을 존중하여 사회적인 차원에서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고 일렀다.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는 자기와는 달리,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메시아라고 밝혔다. 성령과 불의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하느님의 권능으로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을 그분과 일치시키고(사도 2,1-13.43) 당신을 구세주로 증언하게 하며(루카 24,8-49), 심판을 집행하시는 활동을 뜻한다.(사도 5,1-11) 성령은 불처럼 정화와 심판을 이루는 힘이다. 성령과 불의 세례는 농부가 추수 때 키를 까불면 무거운 알곡은 바로 떨어지고 가벼운 찌꺼기나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가듯, 예수님이 의인들을 죄인들 가운데서 분리해내어 구원과 심판을 행하심을 뜻한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노예처럼 심판주로 임하시는 예수 메시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했다.(루카 3,16-17)
인간사회는 모방사회이다. 어린이는 외부를 별로 보지 못하는 성장단계에서는 욕심을 모른다. 그가 많은 것을 볼수록 욕심을 내고 자기의 것을 확보하려 애를 썬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욕심과 심술을 부리는 것을 보고 배우는 것이다. 이러한 모방은 어른이 된 뒤에도 죽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사람은 남의 좋은 점을 모방하면 자신이 이웃에게 모방할만한 본보기가 되고 악한 세상을 착한 세상으로 바꾸는 힘을 낸다.
회개는 사회전체가 추구해야할 몫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 전체가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행, 빈부격차가 없는 정의로운 사회건설, 정직한 공직생활을 통해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고 일렀다. 우리 주위에 가난과 불의와 사기행각이 발견된다면 우리 모두의 회개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남이야 어떻게 살든 아랑곳하지 않고 나 혼자 잘 살면 구원받는다는 개인주의를 버리고 운명과 구원의 연대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자신의 구원을 희망할 수 있다. 고해성사를 받는 날 가족이나 공동체 단위로 하느님과 가족과 화해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족들과 이웃이 서로 사랑의 힘을 실어주면 회개할 힘을 얻어 원수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와 전보다 더 친한 사이로 발전시킬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각종 신심단체, 공동체 차원에서 회개하고 선행을 베풀어야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세상에 증언할 수 있다. 각 가정이나 단체나 본당별로 지역사회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으며 구원 공동체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는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하겠다.
12월 20일 대림 제4주일 : 루카 1,39-45
39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하느님은 성 마리아를 당신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로 간택하시고, 성 마리아는 이 간택을 겸손하게 믿고 따랐다.(루카 1,26-38) 성 마리아는 늙은 나이에 아기를 임신한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스도교 전통으로는 이 집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인 카림’이라는 곳에 있고 여기서 세례자 요한이 출생했다고 여긴다.
성 마리아는 몸이 무거운 그녀에게 시중들기 위해 그녀를 방문한 것이 아니다. 엘리사벳이 정작 도움을 절실히 필요한 임신 아홉 달째 나자렛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루카 1,56) 성 마리아는 하느님이 자기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푸셨음을 알리기 위해 나흘이나 걸리는 먼 거리를 서둘러 갔다. 성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 만나 하느님이 자기 두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여 인류에게 구원을 베푸심을 찬양했다. 이처럼 성 마리아는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한 분이 되었다.
엘리사벳은 성 마리아가 믿음에 힘입어 하느님의 크나큰 은혜를 받았다고 칭송했다.(루카 1,39-45) 성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 친척이었다고 하는데(루카 1,36), 정확하게 어떤 친척관계인지는 본문에 제시되어 있지 않다. 사촌이었다고 하는 견해는 교황권과 성직자제도를 반대한 죤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가 성경을 처음으로 영어로 옮기면서(1382-1384년) 보급시킨 것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시는 동안 세례자 요한의 친척이셨다고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요한복음(1,31.34)에서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과 친분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 같다. 실상 세례자 요한은 가족관계를 끊고 유다 광야에서 홀로 성장했다.(루카 1,80)
성모님과 엘리사벳 이 두 분의 만남은 태중에 계시는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영적인 만남을 중개하게 되었다. 그녀의 아기 세례자 요한도 성령으로 가득 차서 메시아가 성 마리아의 태중에 현존하심을 알고 기뻐 뛰놀았다.(루카 1,41.44)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예수 메시아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요(요한 3,29), 아기 예수께서 당신 선구자가 될 세례자 요한과 그의 어머니를 이미 당신의 어머니 배 속에서 기쁘게 하셨음을 강조한다.
이어서, 성령의 힘에 이끌리는 엘리사벳은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했기 때문에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고 아기 예수님도 복되신 분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어서, 엘리사벳은 성 마리아를 자기 주님, 즉 메시아(시편 110,1; 루카 20,41-44; 사도 2,34)의 어머니로 불렀다. 이토록 고귀한 분이신 메시아의 어머니의 방문을 받는 영예를 하느님이 자기에게 내리신 데 대해 감탄했다. 또한 엘리사벳은 성모님이 주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칭송했다.(루카 1,45)
성모님은 동정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언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하느님의 힘으로는 이루어진다고 믿었다.(루카 1,38) 천사의 발현과 전언이 믿음의 눈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성 마리아는 신앙인의 모형이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예수님을 자기 몸에 잉태하게 하신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엘리사벳을 찾아가셨다. 우리도 구세주 예수님이 오심을 이웃에게 증언해야 딸이 어머니를 닮듯, 성모님을 본받을 수 있다. 또한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와 함께 찾아오신 예수님의 방문을 기뻐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우리 가정과 공동체 안에 오시는 것을 진정 기뻐하는가, 혹은 부담스럽게 여기는가? 마지막으로, 성모님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잉태한 것도 믿음에 힘입은 것이다. 예수님이 성모님의 태내에 잉태되셨듯이,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시도록 성모님처럼 믿음의 눈을 뜨고 있는가?
12월 27일 예수,마리아,요셉의 성가정 축일 : 루카 2,41-52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과월절(파스카)에 예루살렘 성전 구내에서 양을 잡아 해거름에 적어도 열 명 정도의 가족 단위로 축제를 거행하고 양고기를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과월절이라는 말의 어원인 ‘파스카’의 의미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지나감’(=’면제시킨 것’)을 뜻한다. 이 말은 하느님이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하실 때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양이나 염소의 피가 발린 집을 그들의 집으로 알고 그들의 맏배들을 치지 않고 지나가신 것(탈출[출애] 12,13)을 뜻한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유다인 남자들은 해마다 과월절, 오순절과 장막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규정이 있었다.(신명 16,16)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 밖에서 사는 유다인 남자들은 평생에 한 번, 팔레스티나에 사는 유다인들은 매년 한 번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했던 것 같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이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성모님이 과월절을 지내기 위해 순례를 간 것은 성전에 대한 대단한 신심의 표현이다.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129km이고 도보로 3∼4일이 걸렸다. 이처럼 성모님과 성요셉은 예수님과 함께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전통적인 신심활동을 옹호하신 분들이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이 친척들과 함께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약 32km)을 간 다음 저녁에 일행이 다 모였을 때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예루살렘까지 돌아가서 찾아다니다가 사흘 뒤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분은 열성적으로 선생들의 발치에 서서 가르침을 받고 계셨다.
열두 살밖에 되지 않으신 소년 예수님의 통찰력 있고 지혜로운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경탄해 마지않았다. 예수님의 부모는 깜짝 놀랐다. 성모님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서 기뻐하기보다 안도와 원망이 교차한 말투로 질문했다. “얘야,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보아라,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몹시 걱정했단다.”(루카 2,48) 그러나 예수님은 “왜 저를 찾고 계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실망조로 질문하셨다. 예수님은 혈연으로 만들어진 인간적 가정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현존 속에 있어야 한다고 이르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언한 뒤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와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셨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이 순종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에 관한 모든 사건의 뜻을 묵상하고 있었다. 이는 아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신비를 성모님이 이해할 수 없어 심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이 신비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는 뜻이다.
성모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부활신앙의 빛으로 그 신비를 믿고 따르게 된다.(사도 1,14)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그분의 부모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도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거나 부활하신 뒤에만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신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의무라고 여기셨다.(루카 11,27-28) 성가정의 목적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 인류구원의 요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가정도 성가정을 본받아 가족들과 이웃의 구원을 위한 요람이 되어야 한다.
가족 이기주의는 개인 이기주의보다 훨씬 참혹할 때가 있다. 자기 때문에 남의 행복이 희생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남을 이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톨스토이)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라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날 용기가 있는가?
* 박영식(야고보) 신부는 1976년 사제서품 후, 1978년 로마 유학, 1982년 로마 교황청직속 성서대학(Pontifical Biblical Institute)에서 석사학위(S.S.L.)를 취득, 1990년 같은 대학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받으셨습니다. 현재 복현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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