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저의 꿈은 마당 있는 집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의 그 바람대로 자그만 잔디마당을 갖고 있고, 어릴 적 나의 꿈이 이뤄져 무척 기쁠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작은 넓이인데도 잔디를 가꾼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얼핏 보면 잘 가꿔진 것처럼 보이지만 잔디 속에는 꼭꼭 숨어있는 토끼풀, 민들레, 이름 모를 잡초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지요.
그런 잡초들을 제거해 주지 않으면 잔디가 제대로 자라지 않기에 틈만 나면 쪼그리고 앉아 잡초제거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뽑고 또 뽑아도 어디서 그렇게 홀씨가 날아와 자리를 잡는 건지, 중국의 황사바람이라도 세게 불어대는 날이면 우리 토종 잡초뿐 아니라 멀리서 날려 온 중국 잡초 홀씨까지 날아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랍니다.
잘 자라줬으면 하는 식물들과 나무들은 작은 벌레의 침입으로 잎이 오그라들고 말라죽어가는 듯해 내 마음을 안타깝게 만듭니다. 반면 없어줬으면 하는 잡초들은 날마다 무럭무럭 잘도 자라서, 특히 비가 한번 오고 난 다음날은 나의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키가 훌쩍 커서는 옆으로 벌어진 가지들이 정말 놀랍기만 하지요.
예전에 아파트에서 생활을 할 때는 봄에 길가에 노랗게 피어있는 민들레를 보면 어찌나 반가웠던지,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곱게 흙까지 퍼서 조심조심 화분에 옮겨 담곤 했습니다. 잘 키워 보겠다고 온갖 정성을 다해도 집으로 가져가는 그 즉시 죽어버려 안타까워 한 적도 있었고, 클로버 풀을 발견하면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아보겠다며 바닥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민들레나 클로버 풀이 내 집 마당에서는 잡초로 분류되어, 잔디 사이로 삐져나오는 어린잎까지 뿌리 채 모두 캐내지 못해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대학 축제의 한 행사로 본관 앞에서 들꽃 전시회가 있어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들꽃 전시장에는 소위 제가 잡초라고 취급하며 뽑아 버린 온갖 풀들을 돌에도, 고목에도 붙여 소복이 모아 장식을 하여 아주 멋진 작품이 되어 저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어요. 심지어는 비싼 값으로 사 가려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잔디 속의 잡초 제거를 하찮은 일거리로 생각한 저의 의식에 변화가 생겼고, 들꽃들의 개별특성을 살리지 못한 제가 무능해 보일 정도였답니다. 잡초들을 그들만의 특성을 살려 보살피니 잡초가 아닌 멋진 야생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다수의 일반인 속에 소수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과 같이 급변하는 정보화 시대에 사회가 빠르게 변하고, 변하는 환경에 의하여 심리적 스트레스와 인간관계의 갈등, 핵가족화 등으로 심리적인 불안과 갈등이 증가하면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 감수성이 예민하여 쉽게 상처받는 사람,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 정서적 행동 면에서 정상범주에서 벗어난 일탈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가 있지요.
우리는 일탈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왜?’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합니다. ‘왜?’ 라는 질문은 자신의 의도에 의해서 일탈된 행동을 일시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할지 모르나, 특수한 교육과 지원이 필요한 정서·행동장애 대상자들에게는 부적절한 물음입니다. 그들에게는 ‘왜?’ 라는 물음에 대답할 이유가 있어서 일탈행동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들에게 우리가 ‘왜?’ 라고 질문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왜 그렇게 걷나요?”, “왜 당신은 지금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나요?”, “왜 숨을 몰아쉬고 있나요?”, “왜? Why? 왜? Why? 왜? Why?….” 그건 마치 사시가 있는 사람에게 “당신에게는 왜 사물이 그렇게 보이나요?” 하고 질문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들을 보기 좋게 키워야 하는 잔디 속의 잡초처럼 골칫거리로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독특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특수성을 없앤 일반화에만 초점을 두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왜?(Why?)’ 라는 질문을 ‘어떻게(How)’로 바꿔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저 사람은 저런 특성이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해 줘야지!’, ‘이 아이는 이런이런 행동을 하니까 내가 이렇게 해 주면 되겠다.’로 말입니다. 또 눈을 옆으로 비껴 뜨고 사물을 바라보는 아이가 있다면 ‘왜 저렇게 볼까?’보다는 ‘햇빛이 눈부셔 빛의 반사로 그 같은 행동을 하는 건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정 부분만 보여서 그 같은 행동을 하는지.’라고 먼저 생각해 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원인에 맞는 적절한 지원행동을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동상담을 하러 오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동의 전형적이지 못한 특이한 행동에 초점을 두고 고치려고 하다 보니 그것이 고민스럽고 문제가 되어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상담에서의 접근법은 의외로 간단한 것에서부터 처음 시작되는데, 아동이 나타내는 특이성을 일반화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거나, 특이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즉 특이한 행동이 일반화된 환경을 조성해 주는 생태학적 접근법으로 심리적 안정을 먼저 꾀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손을 흔드는 행동을 하는 아동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아동이 손을 흔드는 것이 눈에 거슬리고 이상하게 보인다면, 아동의 손에 탬버린을 끼워 가요방에서 동요노래를 부르게 한다면 더 이상 아동의 행동은 이상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아동은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을 해서 좋고, 하고 싶은 행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장소를 알았고, 행동하는 데 도움 되는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 교육적 효과와 목적적인 행동으로 전환이 되어 좋은 것이지요. 따라서 이제는 ‘왜?’ 가 아닌 ‘어떻게’로, 즉 ‘Why?’가 아닌 ‘How’로 바꾸어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다음 호부터는 실제 사례들을 중심으로 글을 싣기로 하겠습니다.
* 조정연(안젤라) 님은 현재 대구사이버대학교 행동치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초록꽃 행동치료연구소장, 국제행동분석학회(ABAI) 아동·청소년행동치료 한국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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