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하다가 많이 듣는 말, “우째야 될지 모르겠심더. 목사님도 교회 나오라 카지예, 뒷집 아지매는 절에 가자 카지예! 쪼매만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께예.”, “안 그래도 종교는 하나 가져야 하겠는데 그 중 천주교가 낫다고는 생각합니더.”
사람들이 입교하기 전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여러 종교 중에서 내가 천주교를 선택한 걸로 말이다. 여차하면 다른 종교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협박으로도 들린다. 사실 세례 받은 초기에 냉담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이런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특징 중 하나는 부르심과 응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겉으로는 내가 천주교를, 하느님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신다. 끊임없이 부르시는 하느님, 초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내가 여러 신들 중에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내가 그 초대에 응답한 것이다. 우리 천주교는 하느님을 나의 주인(주님, 라틴어 Dominus)으로 모시는 종교이다. 내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나의 주도권을 그분께 넘겨드린다는 뜻이다.
영화 <달마야 놀자>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조그마한 암자에서 벌어지는 코믹 조폭영화. 은신처를 찾던 조폭들이 암자에 머무르기를 원하지만 스님들은 반대다. 그래서 내기를 한다. 족구, 고스톱, 3-6-9 게임, 삼천 배, 물속에 오래 버티기 등을 해도 결판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큰스님께서 마지막 문제를 낸다. :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워라!”
조폭들은 난리다.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고무신, 바가지 등 물을 퍼 나를 수 있는 도구는 있는 대로 동원하고, 물동이를 사람의 배 위에 거꾸로 올려놓고 물을 채워보기도 하고…. 그래도 헛수고다. 스님들은 가만히 있다. 큰스님이 자기편이라 자만하면서 말이다. “마음이 물이요 몸 또한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하면서 한 스님이 깨진 독 안으로 들어간다. 큰 스님의 호통 : “나는 물을 채우라 했지 몸뚱아리를 채우라 하지 않았느니라.” 다시 조폭들 : 깨진 항아리를 개울에 집어 던져서 가라앉힌다. 그리고 조폭들은 절간에 머무는 것이 허락된다. 얼마 후 조폭 두목의 질문 : “스님께서는 왜 저희들을 감싸 주십니까?”, “너희들이 문제를 풀었기 때문이야. 깨진 독 같은 놈들을 내 마음속에 던졌을 뿐이야.”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기도를 많이 한다. “주님, 저에게 오소서.”, “주님, 항상 제 안에 머무르소서.” 이런 기도를 하면서도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항상 갈증이 나는 신앙생활이다. 마치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처럼 영적인 충만이 없다. 나 중심의 신앙생활은 초보신앙이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만들어낸 하느님, 내가 상상한 하느님을 믿는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밑 빠진 항아리 같은 나를 하느님께 던지자. 밑 빠진 항아리도 물속에 머무르는 한 물 걱정은 없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기댄다는 것이고 하느님께 나를 맡긴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나에게 맞추려 하지 말고 나를 하느님께 맞추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만일 하느님께서 속 좁은 내 안에 들어오신다면 얼마나 답답하실까?
* 이번 달부터 새로 글을 써주시는 하창호(가브리엘) 신부님은 1992년 서품, 큰고개성당 보좌, 오스트리아 인스브룩 유학, 4대리구 주교대리 보좌, 구룡포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5대리구 사목국장으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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