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개신교 원로 목회자들이 우리나라 개신교가 물량주의에 빠져 “예수축복”이라는 감언이설로 “예수무당”을 만들었다고 질타하는 소리를 가끔 접하게 된다. 현세적인 복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기만 하면 노다지가 눈에 보이는데, 그 유혹을 과연 마다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1티모 6,10을 다시 잘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 가톨릭교회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지난 70-80년대 산업화와 민주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분출된 사회 갈등과 혼란 속에서 김수환 추기경님을 중심으로 가톨릭교회는 그나마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한 교회의 모습에 감화를 받아 수많은 이들이 가톨릭교회를 찾았었다. 가톨릭교회가 사회 정의와 구원 진리의 메시지를 어렵고 혼란스런 사회에 전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현재의 가톨릭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타 종교들 가운데 하나쯤으로 생각한다. 이래저래 매력이 사라진 모양이다. 급변하는 세상에 교회가 사회를 선도하는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지 못하니까 교회가 교회다움을 서서히 상실하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치는 모양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비신자가 급감하고, 냉담자는 급증하는 현실에 부닥치게 되었고, 젊은이들은 교회에 관심조차 두지 않으려 한다.
이런저런 걱정 속에 대구대교구의 교세통계표를 새삼 펼쳐보았다. 신자 수가 괄목할 만하게 증가하였지만, 지난 십년 동안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신자 수는 약 십만여 명 그대로이다. 그동안 선교운동을 펼쳐 수많은 이들을 입교시켰지만, 많은 이들이 주저앉고 말았나 보다. 사회의 변화 속에 ‘교회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구나.’ 하는 반성도 하지만 가톨릭의 매력이 가파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불안감도 많이 든다.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얼마 전 신문에서 일본 경제가 오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뒤따라가기 정책” 때문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1등을 뒤따라가는 정책은 결코 1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를 늘 뒤따라가면 교회는 결코 사회를 복음화 할 수 없구나.’하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된다. ‘시대의 징표를 읽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회를 정확하게 읽고 사회를 선도하는 교회로 거듭 태어나야 하겠다.
사실 우리 교구는 일찍부터 경제 발전의 그늘에 파묻힌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위해 사회복지 분야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교구장께서는 ‘사회복지에 힘쓰지 않으면 교회가 제 모습을 잃게 된다.’고 강조를 하셨다. 그래서 교우들은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는 것을 배웠고, 그들을 위해 희생할 줄도 알았으며, 자신들이 천주교 신자라는 대단한 자긍심도 가졌다. 아쉬운 것은 이 분야에도 차츰 국가 지원이 늘어나면서 교우들에게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참여”라는 의식교육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회를 선도하는 교회!” 100주년을 준비하는 우리 교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의식을 신자들에게 불어넣는 일이다. 투철한 “사명 의식”은 그 존재를 반드시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가? 예수님은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사명 의식”을 마치 혼을 불어 넣듯이 불어 넣으신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신 지가 1년이 되었다. “서로 밥이 되십시오!”라는 그분의 말씀이 “교회의 사명 의식”을 불어넣는 주님 말씀의 핵심임을 깨닫는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루카 22,19; 참조 요한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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