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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몬시뇰의 세상이야기
물따라 세월따라(16)


김영환(베네딕도)몬시뇰

다시 기숙사에 돌아왔다. 친구들이 “살아 돌아왔구나.”하며 반가워했다. 그간 서울에서 일어난 일들을 친구들로부터 들었다. 주일이 되어 명동성당에 갔더니 미군 지프차가 여러 대 올라와 있었고, 보통 때보다 신자들이 훨씬 많이 와서 미사가 끝나면 성당 마당에 나와 북적거렸다. 그 당시 서울 명동성당은 마치 만남의 장소 같았다. 해외에서 헤어졌거나 귀국해서 가족들을 찾지 못한 경우, 우선 명동성당의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가족들도 만나볼 요량으로 많은 사람이 찾아왔던 것이다. 전쟁 때문에 강제 철거된 집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소개사업으로 뜯기어진 집들이 많았기 때문에 집이 사라져서 가본들 식구들의 행방이 묘연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학교에는 내가 없는 몇 달 사이에 같은 반 아이들조차 좌·우익으로 갈라져 있었다. 친했던 친구들조차도 서로 주의·주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이가 나빠지고 원수처럼 외면했다. 학생들이 이러니 어른들은 어찌했겠는가. 나라 전체가 이제는 이데올로기의 대결로 매일같이 시위와 테러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때 학생들은 좌익 계통에서는 전국 학생 통일연맹이라고 해서 ‘학통’을 만들었고, 우익 계통에서는 전국 학생 총연맹이라 해서 ‘학연’을 만들었다. 우익단체의 장이 나중에 자유당 국회의원이 된 이철승이었다. 나는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우익에 속하였다. 이렇게 갈라진 좌·우익 세력 사이에 치고 받고 싸우며, 상대방 사무실을 부수고 난동을 일삼는 일들이 서울시내 구석구석에서 벌어졌다. 

 

빨갱이로 잡히거나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 잡혔다가 옥살이를 하고 나와 다시는 좌익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들만 모아 정부에서 ‘보도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나와 가까운 전 아무개, 이 아무개라는 친구들도 가담하고 있었다. 그 친구들을 포함해서 보도연맹 사람들은 빨갱이를 비난하는 기사가 실린 신문을 의무적으로 팔아야만 했었다.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신문은 책임을 맡은 부수만큼 팔아야 하는데 팔리지 않으니까 친구가 나에게 와서 좀 사달라는 것이었다.

 

나도 넉넉하지 못했지만 잡비를 털어서 그 신문을 다 사주었다. 그러다 보니 그 친구와 더욱 친숙하고 깊은 사이가 되었다. 그 친구가 때때로 내가 있는 기숙사에 찾아와서 놀다 가면 기숙사 친구들이 “영환이 너, 빨갱이하고 친한 것 보니, 너도 빨갱이에 물든 거 아니야?”라며, 농담 속에 위협을 가했다. 세태가 그렇게 살벌하고 서로를 믿을 수 없는 비애스러운 상황이었다.

 

그후 신부가 되고 난 뒤, 1958년 미국에 갔을 때 뉴욕 주재 대한민국 총 영사관에서 뜻밖에 그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외교관으로 영사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 친구의 초대로 그날 밤 그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지난날의 이야기로 쌓인 회포를 풀었다. 그 친구 말이 그 당시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좌익이 되어 있었고, 친구를 따라 몇 번 회합에도 갔었는데, 그것 때문에 말로 다 못할 곤욕을 치렀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모임이 좌익계 학생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오로지 내가 친구가 되어 주었으니 자기로서는 항상 나를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때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당하는 개인으로서는 운명을 바꿔 놓는 비극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가 아는 친구의 친구 아버지는 일제 때 독립운동자금을 비밀리에 대어준 재산가였다. 해방이 되자 대구에 인민위원회가 생기고 자신도 모르게 인민위원회 간부가 되어 있었다. 그는 빨갱이로 잡혀 옥고를 치르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6.25 사변이 나자 좌익에 대한 숙청이 벌어지자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 가두었다.

 

부인이 감옥에 면회를 갔더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미쳐 있었다. 부인도 못 알아보고 배가 고파서 가져간 음식을 손으로 움켜쥐고 허겁지겁 먹더라는 것이다. 그 후에 진짜 빨갱이든 억울한 사람이든 모두 트럭에 싣고 대구 가창 골짜기에 가서 총살한 후 구덩이에 끌어 묻었다고 한다. 그 우국지사도 결국 해방이 된 후 자기 동족의 손에 총살당하고 만 것이다.

 

일제 말기 저들의 단말마적인 포악한 조선인 말살정책을 보았고, 해방 후에는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이성을 잃고 동족 간에 서로를 중상모략하고 죽이는 폭력과 혼동의 격동기를 겪었다.

 

1930년을 전후한 나이대의 사람들은 오늘까지 안정된 나라꼴을 보지 못하고, 지금 이 순간 역시 나라가 어떻게 될지 걱정을 한다. 여전히 서울에서는 좌익, 우익으로 나누어져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테러, 폭력도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세월은 흘러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가 되었다. 비로소 내 인생의 길을 확정할 때가 온 것이다. 기숙사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미사에 복사를 섰고, 그때마다 중국에서 어렸을 적 복사를 서던 생각도 났다. 그리고 언젠가는 신학교에 들어가겠다고 품었던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잘 알고 지내던 노기남 대주교를 찾아가 나의 앞길에 대해 상의하면서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때 노대주교님께서는 “네가 신학교에 들어간다니, 참 반갑게 생각한다. 그러나 너는 외아들이고 또 대구교구 소속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대구교구장 최덕홍 대주교님과 상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졸업 후 대구에 와서 최주교님께 말씀드렸더니 참말 반갑다고 하시며 “순교자 집안이나 다름없는 너희 가정에서 신부가 난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우냐?”고 하셨다. 집에 와서 아버지께 인사드렸더니 뜬금 없이 “너, 신학교 간다며?” 하시고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서울교구 노대주교님께서 대구교구 최주교님과 회의차 만났을 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다. 최주교님께서는 대구로 돌아오셔서 아버지께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들었다. 어차피 아버지께 신학교에 가겠다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아버지께서 먼저 말씀하시자 오히려 일이 쉽게 풀렸다고 생각되었다. 그후 나를 볼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그래, 신학교 갈래?”라고만 말씀하셨다.

 

시간은 흘러 신학교에 입학할 날이 가까워 오자, 내 마음은 급해져만 갔다. 입학하기 사흘 전, 비로소 아버지께서는 신학교에 가도 좋다고 허락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신학교 가거라. 신부가 되려면 착하고 열심한 성인 신부가 되어라. 그리고 남의 사정을 헤아려줄 줄 아는 어질고 너그러운 신부가 되고, 주교님께 순명하고 교회에 성실한 신부가 되어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신부가 되겠다고 수시로 말했었고,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좋아하시면서 “참말 그랬으면 오죽 좋겠느냐!”라고 말씀하시던 것을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시고, 본당 신부님과 주교님께서도 신학교에 가도 좋다는 명이 떨어졌기 때문에 1950년 5월 초하루, 서울 신학교에 갔다. 신학교 정문에 들어서서 초인종을 눌렀더니, 그때 총급장인 대구교구 김수환(현 추기경) 신학생이 나를 맞이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