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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내가 남산동에 간 까닭은?


김정자(나타샤)|두류성당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요?”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스스럼없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 왜 그리스도를 믿나요?”라는 질문 앞에서는 망설이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시라는 사실을 30년 넘게 듣고 있으면서도 늘 우물쭈물 거리는 나에게 화가 날 정도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수녀원에 가려는 둘째 언니는 엄마를 깊은 절망 속으로 빠지게 하였는데, 이 일은 처음으로 예수님이 아닌 성모님을 믿는다는 황당함으로 가톨릭을 접하게 하였던, 가톨릭에 대한 어린 나의 첫 기억이었다. 또한 예쁘고 똑똑하여 멋진 형부를 만나게 해주리라 기대했던 언니의 돌발 상황이 너무 화가 나서 가톨릭은 나에게 미움의 종교로 자리하고 말았다. 그 후 한 번씩 집에 다니러 왔던 수녀 언니는 편찮으시던 아버지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대세를 받으시도록 도왔다. 그리고 아지랑이가 어지럽던 봄날의 중 2학년 때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나셨다.

그렇게 아버지가 떠나가신 후 엄마와 나는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수녀원에 간 언니로 인해 가톨릭에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엄마가 왜 내 손을 꼭 잡고 성당엘 다녔는지, 그 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그 당시 학생은 나 혼자였었고 꽤나 똑똑했었던 것 같다. 정말 외우기만을 잘 하여 같이 교리를 배우던 어른들께 신부님의 강의를 설명해주곤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대학교,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에 이르기까지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십계명을 어기면 대죄이며 고해성사를 봐야 한다.’는 협박성 교리에 잔뜩 주눅이 들었던 탓에 주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었다. 아무런 불편 없이….

그래도 모양만은 그럴 듯한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며 남편과 결혼을 하였고, 다행히 시댁이 구교집안인 관계로 신앙의 박해는 꿈도 꾸지 않은 채 안락하면서도 나태한 생활을 하며 ‘내가 행복하면 예수님도 행복하시다.’는 근거 없는 신앙으로 첫 아이의 첫영성체를 맞게 되었다. 당시 남편은 동성로에서 제법 규모가 큰 의류매장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하루하루 매출과의 전쟁으로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또한 앞서 나아가지 아니하고 뒤돌아보는 사람을 게으르다는 잣대로 평가하던 오만했던 나는 매일미사와 봉사라는 이름 아래 성당에서 얼쩡대는 사람들을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첫영성체 준비하는 엄마들과 선생님과의 나눔 형식의 가정교리 1년 과정을 마치면서부터 서서히 내 삶에 뭔가 부족하고 어딘지 모르게 방향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났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또다시 동성로 한가운데서 사람을 상대로 전쟁 중이었고, 이 세상에서 노력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오만함으로 가득차서는 조금 내는 교무금으로 하느님께 대한 빚 청산을 끝내는 것쯤으로 여기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큰 회오리에 휩쓸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가 상당한 금액의 돈으로 권리금을 치른 의류매장이 바뀌게 되어 1/3 정도의 금액만 회수한 채 물러나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처음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은 채 혼란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분노가 일기 시작하더니 아예 생각이 멈추어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은 돌아왔지만 바뀌지 않는 상황을 깨닫게 되면서 결코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이 내 마음을 차곡차곡 채워 감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신앙’이라는 희망이 있다고 굳게 믿으며 남편과 손을 잡았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매일 열심히 돌리고 또 돌리며 살고 있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오직 하느님만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하나만으로 마음을 다잡아 갔다. 그러는 사이 둘째 아이의 첫영성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불과 2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이미 변해 있었다. 불안과 초조, 오만으로 어우러져 냉정해 보이던 얼굴은 어느덧 느긋하고 온화함으로 채워졌고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어졌다. 나약함의 상징이라 여겨 왔던 성당 봉사도 하게 되었다. 기쁨이 찾아 들었고 이 정도면 다 된 줄 알았다.

그러다 또다시 찾아온 허무와 무지의 괴로움. 신학생들만 있는 줄 알았던 그 곳에 친구는 몇 년째 성경공부를 하러 다닌다고 했다. 햇살이 너무 눈부시게 빛나던 봄날, 나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났다. 주일 그리스도인에서 약간의 성당 봉사활동을 하며 지내던 나에게 자꾸만 느껴지던 허무함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하고서 “엄마, 왜 자꾸 성당에 가라고 해요. 이유를 알려주세요.”라며 따져 묻는 아들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기 위해서지.”라는 뜬구름 잡는 대답 대신 뭔가 나에게도 확신이 있는 대답을 해야 했기에, 목마름이 극에 달하고 있던 나에게 물을 주어야만 했기에 나는 용기 내어 남산동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랐다.

그러는 사이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 주보 뒷면의 바오로 딸 영성포럼 안내를 보고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서던 때부터 지나온 시간이다.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지내온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다시 2년의 시간이 흘렀다. 남산동에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을 알고자 지낸 시간들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참나무의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 이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알기 위해서는 믿고 믿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내가 2년여의 남산동 참나무 길을 바라보며 알아낸 사실이다.

얼마나 가슴을 깊이 찌르는 칼날 같았던지 늘 이 말을 품고 산다. 매일 교문까지 태워다주는 남편에게도 이 말로 남산동 행을 동의 받았다. 이제 나는 아홉 번의 계절의 변화를 보고 있다. 그리고 지난달 견진을 받은 딸과 아들에게 눈을 맞추고 손을 꼭 잡고 ‘엄마의 신앙을 보여줄 수는 없어. 하지만 느낄 수는 있을 거야.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거야. 하느님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는 거야. 그리고 이젠 대답해 줄게. 나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지표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참된 삶은 무엇인가를 예수님을 통해 보고 예수님의 기준으로 살고 싶어. 옳고 그름의 판단,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예수님을 통하고 싶어.’라며 마음으로 전하였다.

그리고 난 딸아이의 미소를 받았다. 이전과 별로 달라진 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내면이 이미 바뀌어 있었음을 우리 아이들은 느끼고 있었다. 입술의 구원이 아니라 마음이 전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은총을 느낀다. 기쁨을 머금은 미소가 입가를 물들인다. 아들 녀석이 “엄마, 행복해?”라며 우리 서로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넌지시 던진다. 그리스도인인 내가 참 예쁘다. 그리고 자주 나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곤 한다.

남편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다. 성인의 박식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나에게 자주 성인의 고백록 이야기를 들려준다. 멋진 세례명이 참된 그리스도 신앙의 완성쯤으로 여기는 걸까? 신랑은 매주일마다 세 번씩 성당을 오가고 있다. 우리 어머니 그리고 아버님을 미사에 참례케 하려고 차량봉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서 인상을 쓴다. 심오한 신랑만의 예수님 사랑법이다. 나의 희망이신 예수님께 신랑에게 미소를 주십사 기도드린다. 입술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은총을 주십사 기도드린다. 또 한 번의 2년이 지나가면, 그때는 신랑과 손잡고 남산동의 참나무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님의 은총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