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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교리상식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하창호(가브리엘)|신부, 5대리구 사목국장

신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은사 신부님께서 책 한권을 소개해 주시고 수업시간에 가끔 인용도 해 주셨다. 후안 아리아스 신부님의 《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이란 책인데 그 중 몇 구절을 옮겨 본다.

“그렇다. 나는 이러한 하느님을 결코 믿지 않는다. 나약이라는 죄악 안에 인간을 ‘붙들어 매놓는’ 하느님. … 물질을 죄악시하는 하느님. 고통을 사랑하는 하느님. 인간의 기쁨을 시기하여 중단시키는 하느님. … 마술사와 요술쟁이인 하느님.  … 자신을 그릇된 일에 이용할 수 있게 하는 하느님. 손에 쥐고 있는 법조문에 따라 항상 판결을 내리는 심판관 하느님. …  철학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는 하느님. … 온갖 절망 속에서 내가 희망할 수 없는 하느님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렇다. 나의 하느님은 전혀 다른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끔 내가 만들어낸 하느님을 믿을 때가 많다. 잘못된 하느님 상을 가진다는 말이다. 내 잘못일 수도 있고, 이웃들의 영향일 수도 있다.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내가 만들어낸 틀 속에 가두는 일이야말로 우상숭배가 아니겠는가?

“하느님”이라는 말의 사용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라틴어 데우스(Deus)를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으로, 프로테스탄트에서는 하나님으로 부른다. 누가 옳고 그른지 혹은 어느 단어가 더 합당한지를 따지는 일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분은 자유로운 분이시고 설명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후안 아리아스 신부님의 ‘전혀 다른 하느님’이란 표현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에 하느님의 대답은 “나는 있는 나다.(야훼)”였다.(탈출 1, 13-15) 이름을 가르쳐 주시는 것 같기도 하고 가르쳐 주시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이름 사용의 위험성’ 때문이 아닐까? 사실 고대 근동지방에서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기능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지닌 사물이나 인물의 본질을 나타내 주거나 그 본질을 암시하기도 한다. 성경 안에 드러나는 지명이나 인물들의 이름을 봐도 알 수 있다. 아담은 ‘사람’, 하와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물들의 사명에 따라 이름이 바뀌기도 한다. 아브람이 아브라함(민족들의 아버지)으로, 사라이가 사라(여주인, 황후)로, 야곱이 이스라엘(하느님을 드러내는 사람)로 바뀌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시몬을 베드로(반석)로 바꾸어 주셨다. 하느님이든, 하나님이든, 알라든, 상제(上帝)든, 단순하게 신(神)이든 그분을 부르는 호칭은 다양할 수가 있지만, 우리는 그 호칭이 그분의 본질을 드러내는 절대적인 이름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탈출 3, 15) 그분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란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함께 인간을 위하여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우리의 하느님은 한없이 자유로운 분이시지만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누가 착한 일 하나, 누가 나쁜 짓 하나?’ 팔짱끼고 감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이시다. 내가 기뻐하면 함께 기뻐하시는 하느님, 내가 슬퍼하면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위험에 처해 있으면 손을 뻗치시는 하느님이시다.

조용히 그분을 불러 보자. :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그리고 나 O O O(가브리엘)의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