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사순 제3주일 : 루카 13,1-9
1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예수님은 심판받지 않기 위해 서둘러 회개하라고 이르셨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 총독이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을 바치려 한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제물이 그들의 피로 물들게 했다고 알려드렸다. 이 갈릴래아인들은 파스카 축제(과월절)에 순례하러 와서 성전 마당에서 어린양을 도살하다가 빌라도의 손에 살해되었는데 왜 그가 그들을 죽였는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은 위 학살사건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갑자기 닥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회개하고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예수님은 실로암 탑의 골조공사가 부실했는지 갑자기 무너져서 열여덟 명이 깔려 죽은 것을 사례로 들어 죽음이 갑자기 닥치기 때문에 늘 회개하고 있으라고 훈계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지 않는 군중들을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셨다. 무화과나무는 4.5cm에서 6m쯤 자라고 매년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화과나무는 삼 년 동안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고 땅만 차지하여 쓸데없이 양분만 먹어치울 뿐이었다. 그래서 포도밭 주인은 그 나무를 잘라버리라고 명했다. 이런 무화과나무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신자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원과 시간만 낭비할 뿐 회개할 희망이 없는 이들이다. 하느님은 그들을 빌라도의 손에 살해된 갈릴래아 사람들과 실로암 탑의 붕괴로 죽은 열여덟 사람들의 운명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심판하신다. 그런데 포도밭 일꾼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도록 애를 써보겠다며 주인에게 한 해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이는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심판을 보류시켜주실 것을 간청했다는 뜻이다. 하느님이 인내롭게 기다려주시기 때문에 회개를 서둘러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최후심판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주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주위에서 암이나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망선고와 같은 슬픈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 불행이 항상 자기를 비켜 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나는 과연 잘 죽기 위해 사는가? 자기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로 만들고 남의 인생을 기쁘게 해주는 존재가 되자. 하느님의 일과 이웃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땅만 썩히는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처럼 무용지물의 인간, 기생충과 같은 인간이 되고 만다. 이와 반대로, 젊을 때, 건강할 때 남을 돕는 사람만이 늙고 병든 뒤, 죽기 전에도 선행을 할 수 있다. 마음이 늘 사랑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이다. 평생 자진해서 사랑의 고통을 받는 사람만이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3월 14일 사순 제4주일 : 루카 15,1-3.11-32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분이 죄인들과 어울리신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와 되찾은 아들과 불평하는 큰아들’(루카 15,11-32)의 비유를 이야기 하셨다. 이 비유에서 농부인 아버지와 작은아들과 큰아들이 등장한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작은아들은 어림잡아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유산으로 받아 현금으로 바꾸어 멀리 객지로 떠나가서 난잡하고 방탕하게 살아 구원받을 희망을 버린 채 모든 재산을 탕진해버렸다. 그러다가 돈에 쪼들리고 설상가상으로 그 지방에 닥친 심한 기근 때문에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다. 작은아들은 유다인들에게는 혐오스러운 일인 돼지사육이라도 하며 돼지사료로라도 빈 배를 채우기를 애원했으나 악덕고용주는 그것마저 주지 않았다.
이 탕아는 이 세상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자기 아버지밖에 없다는 것을 통감하고 자기가 하느님의 법을 어기고 아버지의 사랑과 권위를 무시한 죄를 뉘우치기로 했다. 작은아들이 회개하기 전부터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아버지는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달려와서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그를 용서하고 기꺼이 아들로 다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죄인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야 회개할 수 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준비하게 했다. 죽은 줄 알았던 작은아들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죄인들이 회개하면 당신의 온 백성과 함께 기뻐하신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자기 동생을 편애하고 집에 남아서 효성을 다한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신 것이 섭섭했다. 큰아들은 온 가족의 생명줄인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탕진해버린 동생의 죄를 비난하며 그를 받아들인 아버지에게 성을 냈다. 그러나 아버지는 윤리적으로 죽은 작은아들이 다시 살아났고 그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기 때문이라며 자기의 기쁨에 참여하라고 타일렀다. 예수님은 이 비유로 하느님이 죄인들의 회개를 반기는 것을 본받으라고 이르셨다.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애로우신 모습을 무시하고 하느님의 노여움을 자초한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와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인품을 비교해보자. 아버지는 자기의 뜻에 순종한 맏아들을 사랑하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뜻을 무시한 작은아들을 괘씸하게 여겨 내치지 않고 무조건 그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큰아들은 원칙에 사로잡혀 잘못한 자기 동생에게 자비롭지 못하다. 작은아들은 죄인이지만 아버지의 자비를 믿고 회개하여 아들의 권리와 혜택을 회복했다. 나는 이 세 인물 중에서 누구를 닮았는가?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완전무결하시기 때문에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사시는 분이다. 사람들이 그분을 배신하거나 욕을 해도 그분의 품성에는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으로 넘쳐흐르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필요로 하고 우리의 회개를 바라신다. 또한 하느님은 자기에게 불평하는 큰아들과 같은 사람들을 배척하시기는커녕 자기와 함께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자고 부르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배워야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남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면 하느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는가? 이것도 본능이다. 또 남을 도와주면 기분도 좋고 보람도 느낀다. 이것 역시 본능이다. 이 두 가지 상반되는 본능을 잘 다스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3월 21일 사순 제5주일 : 요한 8,1-11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은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가 이른 아침에 다시 성전에 와서 당신 주위로 몰려온 백성을 가르치셨다. 그때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기혼녀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분의 뜻을 물었다. 그를 기혼녀로 여기는 이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간음죄가 결혼한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불륜을 가리키고 기혼남과 처녀의 불륜은 간음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그를 돌로 때려죽이려 한 것은 기혼녀가 간음을 한 경우에 적용된 율법이기 때문이다.(신명 22,23-24) 그의 남편도 아내를 회개시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는커녕 그녀의 간음현장을 덮치게 하여 증인까지 확보한 것 같다. 예수님이 그의 간음죄를 용서하고 집으로 돌려보내면 율법을 어기시게 된다. 또한 율법규정에 따라 그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신다면 사형집행권을 독점한 로마 총독과 알력관계를 자초하게 된다. 예수님은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 여자를 볼모로 잡았음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시는 상징행동을 보이셨다. 그 뜻은 예레미야서에 제시된 대로 상징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희망이신 주님, 당신을 저버린 이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이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저버린 탓입니다.”(예레 17, 13)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단죄하려고 광분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이 성경 구절에서 말하는 이들과 같은 인간임을 위의 상징행동을 통해 드러내신 것이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상징행동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간음한 여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거듭 묻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각자 자기의 죄를 돌이켜보고 죄 없는 이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이르셨다. 예수님은 간음에 대한 율법규정을 격분한 상태에서 강행하려는 열성분자들인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율법의 취지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명하셨다.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는데, 이는 하느님이 심판주이시고 죄인의 죄를 먼지 속에 쓰신다는 뜻이다. 그러자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죄 없는 이가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는 말씀을 듣고서는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하나씩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리를 떴다. 그래서 현장에는 예수님만이 간음한 여자 곁에 남아 계셨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용서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이르셨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하고 구원하러 오신 분이다.
남이 연애하면 간통이고 내가 연애하면 로맨스라고 하지는 않는가? 또 나는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유한 사람은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기 때문에 남을 단죄하려고 하지 말아야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 남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도 잘못하는 사람임을 잊기 때문이 아닐까? 죄의식을 가지기 위해 십계명에만 의존하지 말고 사랑의 이중계명을 잘 지키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죄는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고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쳐 이 계명을 몸소 실천하신 예수님을 닮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께 많은 죄를 용서받는 반면, 예수님을 적게 사랑하는 사람은 적게 용서받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습니다.”(1베드 4,8) 고해성사 때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자.
3월 28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루카 23,1-49
1 그리하여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2 그리고 예수님을 고소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3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그분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4 빌라도가 수석 사제들과 군중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5 그러나 그들은 완강히 주장하였다. “이자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유다 곳곳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6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7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8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9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11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12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13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 모아
14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백성을 선동한다고 나에게 끌고 왔는데, 보다시피 내가 여러분 앞에서 신문해 보았지만, 이 사람에게서 여러분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15 헤로데가 이 사람을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을 보면 그도 찾지 못한 것이오.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16 그러니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18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19 바라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였다.
20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이야기하였지만,
21 그들은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22 빌라도가 세 번째로 그들에게,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하자,
23 그들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그치며 요구하는데, 그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24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25 그리하여 그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풀어 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26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
27 백성의 큰 무리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28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29 보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30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 할’ 것이다.
31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
32 그들은 다른 두 죄수도 처형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끌고 갔다.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35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44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5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47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48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49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아침 일찍 본시오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가서 신문을 받게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백성들을 나쁜 길로 유인하여 타락시키고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유다인들을 선동했다고 거짓으로 고발했다. 또한 예수님이 메시아와 임금으로 자처하셨다고 고발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정치적 색채를 띤 ‘유다인들의 임금’, 혁명을 일으킬 정치적 뜻의 임금이신지 추궁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렇게 말합니다.”(루카 23,3)라고 애매하게 대답하여 당신이 로마제국을 뒤집어엎으려는 왕이 아니라고 하셨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신문한 결과 아무런 죄를 찾아내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온 유다에 복음을 선포하시어 온 민족을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에 빌라도의 정치 생명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민중을 선동하여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인물이라는 고발을 듣고 약삭빠르게 예수님을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는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보내 신문을 받게 했다.
헤로데는 예수님이 묵비권을 행사하시자 실망하고서 예수님을 경멸하고, 조롱하며 그분께 화려한 옷을 입혀 그분의 품위를 무시하고 놀린 뒤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고 살인자인 바라빠를 풀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그들의 압력에 굴복함으로써 소송이 끝났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루카 23,38)라는 죄명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처형되셨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고서도 정의를 고수하지 않고 다수의 압력에 굴복한 비겁쟁이가 되었다. 우리도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보다 자기 이익을 더 중요시한 빌라도를 닮은 적이 없었는가?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목덜미에 십자가의 수평대를 얹어 두 손으로 잡고 사형장으로 가게 한 것 같다. 이 수평대는 이미 매질을 당해 지치신 예수께 너무 무거웠고 예수님은 길 위에서 쓰러질 지경이 되신 것 같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형수는 자기의 양팔이 십자가 수평대에 높이 올라가 있기 때문에 호흡하기가 어려웠고, 형리들이 그의 몸을 떠받쳐 호흡할 수 있게 하여 더 오래 동안 고통을 받게 하기도 했다. 사형수는 질식해서 혹은 과다출혈로 혹은 체내 분비액의 결여로 죽는다. 예수님은 발가벗겨지고 외로운 인간이 되어 뼛조각이나 쇠붙이나 못이 달린 가죽 끈으로 채찍질을 당하신 뒤 잔인하게 죽음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해 이처럼 참혹한 고난을 당하셨는가? 날마다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을 느끼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당신을 죽이는 유다인들과 로마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루카 6,29.35)은 원수를 용서하며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왕권을 행사하여 당신과 함께 처형된 범인의 죄를 용서하고 낙원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는 순간에 낙원을 만드셨다. 우리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다 죽으면 곧바로 낙원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받는다.
정오쯤 어둠이 온 팔레스티나에 깔려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하느님의 심판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또한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지성소와 백성들 사이를 분리시킨 휘장이 찢어졌다. 하느님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진노하여 지성소를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 장소로서의 구실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사형을 집행한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죽음이 내는 구원의 힘에 이끌려 그분을 의로운 분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삶에는 어떤 열매(화해, 희생, 일치, 사랑 등)를 내는가?
예수님의 지인들과 예수님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여자 제자들이 멀찍이 서서
그분의 죽음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체포되어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대사제 관저까지 갔으나 무서워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베드로(루카 22,54)를 닮고 제자의 도리를 저버렸다.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자기희생의 고통을 보면 몸을 사리거나 피하지는 않는가?
* 박영식(야고보) 신부는 1976년 사제서품 후, 1978년 로마 유학, 1982년 로마 교황청직속 성서대학(Pontifical Biblical Institute)에서 석사학위(S.S.L.)를 취득, 1990년 같은 대학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받았습니다. 현재 복현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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