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2월 중순경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서울의 밤을 기억한다. 육군 졸병 두 명이 외박을 나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소주를 한 잔하고 늦은 밤에 여관을 찾았는데, 여관마다 방이 없다고 했다. 그 다음 날이 00대학의 편입시험일이라 여관이란 여관은 다 만원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야간통행금지에 군인이 걸리면 영창을 가던 때라, 영창을 면하기 위해 불이 켜진 상점은 무조건 문을 두드렸고, 심지어 예배당 문까지 두드렸다. 다 퇴박맞았다. 새벽 3시가 넘어 기대도 하지 않고 목욕탕 문을 두드렸는데, 목욕탕에서 일하던 때밀이 청년이 기꺼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물론 목욕까지 하고 가라는 보너스까지 받았다.
1985년 김천 지좌성당 본당신부로 지내던 어느 이른 봄날 밤이었다. 본당으로 오르는 외진 언덕길 옆 시멘트 단 위에서 누군가가 윗옷을 뒤집어 쓴 채 봄비를 다 맞으며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 아가씨는 그 다음 날 아침부터 시외버스 차장으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하룻밤 묵을 데가 없어 비를 맞으며 밤을 새울 작정이라 하였다. 딱하여 사제관 2층에서 하룻밤을 묵게 하였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을 때 그 아가씨가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참 오래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 일들과 그 아가씨의 이름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2006년 본당사목을 할 때의 일이다. 예비신자 교리반에 대학생 누나와 입시생 남동생이 등록을 하였다. 성당에 다니면 등록금을 보조해준다는 말에 예비신자 교리반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는 아이들은 이미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자라면서 성당에 다니지 않아 성당에 관해선 백지상태였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소식조차 알길 없었던 사정이 딱한 아이들이었다. 누나는 미대에 다니기 때문에 물감을 비롯한 한 달 생활비로 80만원이 들었다. 그 아이의 등록금과 함께 매달 80만원을 돕는 것이 나로서는 쉽지 않았지만 술, 담배를 끊었던 터라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에겐 크나큰 삶의 보람으로 여겨졌었다.
그래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 한 끼 100원의 사랑을 실천하자는 캠페인을 본당에서 벌렸다. 가난과 배고픔으로 눈물을 흘려본 사람은 가난하고 배곯는 사람의 심정을 알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본당 예산의 7%를 사회복지를 위해 사용하라고 권고하지만, 본당 재정현실은 그렇게 예산을 배정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한 끼 100원의 사랑 실천 캠페인을 벌이게 되었고, 고맙게도 많은 신자들이 동참을 하였다. 어떤 분은 익명으로 480만 원이 든 봉투를 어려운 이웃을 돕도록 내놓기도 하였다. 아마도 자신의 한 달 봉급 전부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을 것이다.
교구설정 100주년을 준비하며 우리교구 전체에 이 운동을 벌이고 싶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한 끼의 식사가 헐벗은 이들에게는 배고픔을 겪는 고통의 시간이다. 그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나누기 위해, 내가 작은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 기쁨은 과연 누구의 기쁨이 되겠는가? 100주년을 맞으며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라는 살아있는 신앙의 잣대로 우리를 바라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 끼 100원의 사랑을 실천하고, 버스 세 정류장 이하는 무조건 걸어 그 차비를 이웃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내놓는 사람이 우리이면 좋겠다. “비단옷을 차려입으신 그리스도를 이곳 성당에서 공경하면서, 바깥 추위 속에서 헐벗고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못 본 체하지 마십시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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