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밤, 형제 신부님들과의 간단한 나눔 자리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요란한 벨소리와 함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번호를 보니 ‘예시까’라는 여교사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교사를 그만두고 지금의 남편과 사회혼만으로 살다가 얼마 전 나에게 찾아와 다음 달에 교회혼을 하겠노라는 약속과 함께 교사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해서 가정방문을 간 적이 있는 한 여교사였습니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수화기를 통해서 예시까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여보세요. 예시까? 무슨 일이니?”
“시댁 식구들이 저를 집에서 쫓아냈어요. 그래서 지금 길거리에 나와 있어요. 흑흑….”
“뭐야? 알바로(아들 이름)는?”
“저하고 같이 있어요.”
“그래? 지금 그리로 갈까?”
“네, 흑흑흑….”
그 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차에 시동을 걸고 그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신부가 찾아온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남편이 나와 머뭇거리고 있었고 예시까는 옆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둘을 붙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앉히고는 나도 그 앞에 마주앉아 어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듣자하니 까르나발(Carnaval : 사육제<謝肉祭>,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전 3일간 춤추고 먹고 마시며 즐기는 축제) 축제로 시댁 식구들이 술을 잔뜩 먹으면서 즐기는 가운데 예시까가 이튿날 재의 수요일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남편을 재촉해서 자게 하려다가 그만 취기가 오른 시댁 식구들의 화를 산 모양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예시까는 줄곧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남편도 조금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둘에게 서로 처한 환경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시댁 식구들과도 대화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식구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인사를 하고 앉았습니다.
“좋은 밤입니다. 저도 한 잔 주시겠어요?”
난데없는 동양인 신부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는듯 하면서도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고 술도 건네었습니다. 잠시 그렇게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하고 연달아 내어주는 포도주를 너댓 잔 들이켰습니다. 전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그들이 내미는 담배마저도 선뜻 받아 물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모임 안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이 꺼내는 사연들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저 취기에 한 소리겠지만 예시까의 형부로부터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식당에 오면 밥도 한 끼 대접하겠다는 제안도 받고 내가 드리는 미사에 꼭 참석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습니다. 게다가 장성한 두 딸도 견진성사를 받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다음날 새벽미사를 핑계로 자리를 빠져 나오려는데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축복을 달라고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수리에 두 손을 얹어 정성껏 축복을 하고 다시 두 부부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먼저 예시까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예시까, 내가 가서 함께 해보니까 저분들이 지금 술이 잔뜩 취해서 자기들이 무슨 말을 꺼내는지도 잘 모르고 계셔. 그러니까 그분들이 너에게 한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이어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호세 루이스, 가족들과 친교의 시간을 나누는 중에 예시까가 끼어들어 자꾸 귀찮게 하니까 화가 나는 건 이해하겠는데, 예시까에게 지금 가족이라고는 여기 너밖에 없잖아. 네가 남편으로서 챙겨주지 않으면 지독한 외로움에 고통 받지 않겠니? 부탁인데 예시까 좀 잘 돌봐줘.”
이런 요지의 말을 부족한 스페인어로 한참 설명하고 나서는 내가 보는 앞에서 서로 안아주고 키스하라고 했습니다. 마음들은 참 순진해서인지 내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하였고 그때서야 비로소 예시까의 얼굴에서 미소가 엿보였습니다. 한층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을 나오려는데 남편인 호세 루이스가 와서 부탁을 했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부탁인데 저희 가족 잊지 말아 주세요.”
“이봐, 내가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니? 이 오밤중에 날 불러낸 가족은 너희가 처음인 걸… 하하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누구나 저마다의 소중한 사연(事緣)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자칫 이 사연들을 소홀히 하고 지나쳐 버린다면 우리 목자들은 양들을 그저 사목 대상으로, 나무나 돌처럼 객관적인 사물로만 대해 버리고 마는 딱딱하고 고지식한 사람들로 변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주일학교를 시작하기 위해 교사들과 면담을 하면서 그들의 사연을 듣게 되면, 우리가 그저 객관적인 기준의 잣대로 흑백을 가릴 수만은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사연을, 성숙한 자녀들 역시 부모들의 사연을 들어야 합니다. 부부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루 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서 지내온 각자의 사연들을 풀어놓고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 속에 삶의 기쁨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기쁨’의 삶을 향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달 친한 친구라도 찾아가 찻잔을 기울이며 그동안의 서로의 사연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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