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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서상돈(아우구스티노) 회장의 증손자 서공석(세례자 요한) 신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다


취재|김선자(수산나) 기자

순교 신심으로 이어받은 확고한 신앙으로 대구대교구의 설립에 이바지했고, 자주 독립 의지로 실시한 국채보상운동의 주도자로 민족의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는 서상돈 회장의 정신과 삶을 2011년 교구설정 100주년을 앞두고 들여다보았다.

 

신앙인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서상돈이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 들인 것은 4대조 서광수 때였다. 서명응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천주교를 믿게 된 서광수는 1785년 을사 추조 적발사건에 연루되어 달성 서씨 문중에서 파적을 당하고, 박해가 시작되자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로 피신하여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경상도 상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서광수의 차남인 유오의 아들 치보, 즉 서상돈의 조부 때 문경 여우목에 정착했다. 서상돈은 1850년 서치보의 삼남인 서철순과 김후상의 장녀 김 아가다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1857년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주하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세 명의 삼촌 인순, 익순, 태순이 순교하였다. 이렇듯 믿음과 순교의 집안에서 신앙의 삶을 보고 자란 서상돈은 순교한 삼촌들의 이야기를 자주 하며 일생을 검소하게 살았으며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했다.

 

서상돈과 대구대교구
1868년 18세 때 당시 대구천주교회 원로회장인 서용서와 보부상인의 두령인 최철학, 외가 사촌형인 김종학 등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하여 낙동강 배편으로 쌀, 소금, 창호지, 기름 등을 장사하여 거상이 되었지만 순교 전 피고름 묻은 멍석을 뜯어 먹으며 옥고를 치르던 삼촌을 보고 쌀밥을 절대 먹지 않는 검소한 삶을 살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는 곡식 창고 문을 여는 등 자선, 구휼사업에 힘썼다.

1885년 김보록(로베르) 신부가 경상도 칠곡 신나무골의 교우촌으로 옮겨 오자 그를 도와 천주교회의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그는 이후 대구읍내 대야볼(현 대구. 중구 인교동)에 임시성당을 지을 때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집을 매입하고 수리하기 위한 거액을 헌납하였다. 또 1897년에는 현 대구시 계산동 성당터에 기와집으로 된 십자형 성당 건축에도 거액을 기부했다. 1901년 계산동 기와집 성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전 재산을 담보로 대부를 받아 2개의 종탑을 가진 고딕식 벽돌성당인 새 성전을 건축하는데 기여했고, 900냥을 헌금하여 성전 건축으로 진 모든 빚을 청산했다. 1908년 대구의 기와집 성당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한문서당인 해성재가 피해를 입자 김보록 신부, 신자들과 함께 학교설립발기회를 갖고 성립학교를 설립하고 발전에 기여했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 설정되는데 기여했으며,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드망즈(안세화) 주교가 대구에 부임해 오자 남산동 일대에서 경영하던 남산화원 종묘원 부지 1만여 평을 교회에 헌납했다. 현재의 대구대교구청과 남산동 대구 가톨릭 대신학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이 이에 속한다. 또한 사촌 여동생 서 마리아에게 빌려준 기와집을 드망즈 주교의 임시 주교관으로 사용하도록 제공하였다. 이처럼 대구 제일의 갑부였던 서상돈은 대구 중구 계산동에 집을 지어 많은 식객들에게 편의와 안식처를 제공하여 복음을 전하는 등 전교활동에도 힘썼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서상돈과 국채보상운동
일찍이 깊은 신심과 함께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남달랐던 서상돈은 1896년 서재필의 주도로 설립된 독립협회에 가입한다. 이후 1898년 9월부터 12월 25일까지 독립협회의 재정부장으로 만민공동회를 비롯해 민권운동을 전개했고, 1901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정부에서 혜민원을 통해 빈민구제를 시작하자 자신의 집 창고를 열어 수천석의 곡식을 대구, 경북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05년 이일우를 도와 대구 달서여학교를 설립하는데 지원하여 여성들의 야학을 돕고 근대지식을 깨우치는데 기여했다. 또한 1906년에는 대구의 신문보급과 계몽지, 각종 신학문의 교양서적 등을 발간하기 위한 애국계몽단체인 광문사를 설립하여 광문사 안에 경북지역 유지 400-500명의 회원으로 문회를 만들고 이를 통해 경상도 지역에 초등, 중등과정의 보통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하여 협성학교, 수창학교, 사범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그해 5월에는 일제 통감부가 설치한 이사청에 맞서 대구민의소라는 자치단체를 조직했다. 1907년 1월 29일, 엄청난 국채로 나라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깨닫고 광문사 간부들을 불러 모은 뒤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한다. 2천만 국민이 담배를 끊어 매월 20전씩 3개월 동안 헌납한다면 국채를 전액 상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국채 보상 취지문을 작성했다. 이렇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3년 동안 전국의 사회 각계각층이 모두 호응하는 가운데 우리 나라 역사상 여성들의 참여가 돋보였던 전 국민운동이 됐다.

서상돈 회장의 직계 후손으로는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대구대교구 고(故) 서인석 신부,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서준석 수녀가 있다. 어렵게 만난 서공석 신부에게 서상돈 회장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묻자, 서 신부는 “증조 할아버지께서 나라와 대구대교구를 위해 하신 일은 후손이 기억하고 기념할 일은 아니다.”면서 “대구대교구를 위해 하신 일은 대구대교구가, 국가를 위해 하신 일은 국가가 기억할 일”이라고 담백하게 밝혔다. 이어 “후손들은 다른 신앙인들과 마찬가지로 살고 있으며 후손 중에는 신앙인으로 잘 사는 사람도 있고, 잘 못 사는 사람도 있다.”며 “그분께서 하신 일에 후손이 언론매체를 통해 거론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2011년 4월 8일 교구설정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대구대교구와 함께 살아 숨쉬는 ‘서상돈’의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가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정신과 미덕임에 틀림없다.
교구설정 100주년을 준비하는 우리는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다가올 100주년과 그리고 후손들에게 물려 줄 100년을 위해 맡은 바 책임을 다 하는 동시에 신앙 선조들이 지켜온 신앙을 미래의 후손들에게 잘 보존하여 물려주어야 하는 사명감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