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예수 부활 대축일 : 요한 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합니다. 때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주일’아침입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아 무언가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님에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로 향합니다. 비록 돌아가셨지만 그분의 주검이 놓여있는 무덤이라도 찾고자 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애달픈 마음이 느껴집니다.
무덤 앞에 도착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돌이 ‘사라졌다’라는 하나의 충격적 장면이 마리아를 다른 곳에로 급히 뛰어가게 합니다. 시몬 베드로, 그리고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 앞에 달려와 숨도 채 가시기 전에 서둘러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사라졌습니다.’ 돌이 사라진 장면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통해 주님이 사라진 것으로 달리 전해집니다. 지금 마리아 막달레나는 하나의 사실적 장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주님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급박한 두려움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사라진 돌을 바라보는 그녀의 주관적 해석 앞에 우리는 마주 서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마리아 막달레나의 신앙적 증언을 듣고 있는 셈입니다.
이 증언은 다른 이들을 향해져 있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에게 향해진 이 증언은 그들 역시 무덤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무덤으로 달려가 예수님의 사라짐에 대해 확인하게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사라진 그 충격적 사실을 그분의 주검을 감쌌던 수건과 아마포를 통해 확인하고야 맙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일련의 상황들은 예수님께서 더 이상 죽음의 사슬에 얽매여 있지 않고 부활의 영광 속에 이미 와 계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암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이들에 의해 믿음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롭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사라짐에 대한 자신의 증언을 제자들에게 전하였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그녀의 증언과 빈 무덤의 상황들을 보고나서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증언하는 사람과 그 증언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무의식적으로 수용되어지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정보의 전달을 그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질 믿음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도구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부활은 여전히 유효한 사건입니다.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서로 안에서 믿음의 사람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인의 노력 안에서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우리들의 참 행복으로 재탄생할 것입니다.
4월 11일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제자들은 유다인들 때문에 겁을 먹었습니다. 스승은 죽은 이라 말이 없고, 유다인들은 속시끄러운 이를 제거했다고 기세가 등등할 노릇입니다.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문을 걸어 잠그는, 딱 그만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죽음의 흔적을 온전히 지니신 채, 그러나 죽은 이가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이로 오셨습니다. 죽음의 올가미를 생명으로 열어주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문을 걸어 잠궈 둔 채 스스로 수인의 생활을 하던 제자들의 단절된 삶을 깨뜨립니다. 예수께서 세상 한 가운데 파견되어 오셨듯이 이제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얽매여 있지 말고 세상 한 가운데에 당신의 가르침을 자유로이 전할 수 있는 제자 되길 예수께서는 바라십니다.
이 파견은 평화스러워야 합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평화 가득한 모습으로 거듭나는 파견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이 성령은 용서를 잉태합니다. 용서는 서로 간의 장벽을 허무는 자유에로의 몸짓입니다. 우리의 딱딱한 마음으로 알게 모르게 만들어진 교만과 고집이 이웃의 허물을 꼬집고 또 꼬집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힘들고 서로가 아파합니다. 그 모든 교만과 고집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서로가 참 자유를 누릴 때, 용서는 진정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이는 ‘믿음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합니다. 그분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고, 그것으로 기쁨에 겨워합니다. 그러나 이는 한계 지워진 기쁨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아직 얽매여 있는 기쁨입니다. 눈으로 확인된 그 기쁨의 자리는 믿음의 자리가 아닙니다. 토마스를 봅시다. 토마스 역시 보는 것에 얽매여 믿음을 가지기에 주저합니다. 주님의 상처를 직접 보아야만 믿겠다고 합니다. 토마스가 예수님을 다시 뵙고서 외치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외마디는 분명 신앙적 외침이지만, 그 외침은 내가 보고 만져본 것에 따른, 나의 육체적 한계성에 놓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했습니다. 제자들 중 그 누구도 보지 않고 믿는 이는 없었습니다. 자, 우리 신앙인의 자리가 바로 이곳입니다. 예수님의 얼굴, 팔, 다리, 그 어떤 것도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우리, 그러나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고, 그 행복이 우리가 머물 자리입니다. 제자들이 가지지 못한 행복을 우리 신앙인이 가질 수 있다는 다소 엉뚱하지만 일리 있는 설렘이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길 기도합니다.
4월 18일 부활 제3주일 : 요한 21,1-14
1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서기 전 제자들은 어부였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금, 그들은 여전히 어부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3년이라는 길지 않는 시간동안, 예수님과 지내면서 잠시 놓고 있었던 그들의 일을 다시 잡은 셈입니다. 예수께서 나타나신 자리는 세상이 알아주는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닙니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실재적이어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자리입니다. 밤새 고기 잡느라 애를 쓰는 인간의 평범하지만 고된 삶이 고스란히 놓인 자리입니다.
아침까지 계속된 고기잡이에 제자들은 지쳐있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건만, 아무 것도 건지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 먼발치에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빛이 어슴푸레 다가오는 그 아침나절,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저기에 서 계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무엇을 좀 잡았느냐?’(우리말 성경은 너무 의역을 했습니다. 직역하자면 ‘식사를 할 때 무언가 덧붙여 먹을 것을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가?’라는 의미입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은 힘없이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 ‘아니오.’라고 말하는 자리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삶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예수께서 활동하십니다. ‘배 오른쪽으로 그물을 쳐라.’이 한 말씀으로 제자들에겐 엄청난 고기가 주어졌고, 그것으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나눔의 식사를 하십니다.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그 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을 때,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밤새 고기를 못 잡던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게 된 자리는, 그들의 삶이 그들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포기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포기는 삶을 내던져버리는 절대 상실의 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무언가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가득한 포기입니다. 왜냐하면 그 포기 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어렵고 힘든 시간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임을 기억합시다.
4월 25일 부활 제4주일 : 요한 10,27-30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양들이 목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건,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알아듣는다.’라는 동사는 귀를 울리는 소리 정도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배운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 목자의 목소리를 통해 목자를 이해하고, 그 목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오늘 복음에 나타난 양들의 뚜렷한 특징입니다.
목자는 그런 양들을 꼭 품어 안습니다.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밤새워 노력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줍니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이 생명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을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라고 소개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일이 곧 당신의 일이고, 그것으로 당신은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하느님, 예수님, 그리고 그분께 맡겨진 양들이 일치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일치 안에 생명은 샘솟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두가 하느님과 일치의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자신만만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중하고, 너의 것에는 소홀히 하는 이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네 것’을 중히 여길 줄 아는 배려심 때문일 것입니다. 네 것에 귀 기울이고, 네 것을 통해 하느님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마음 없이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읽어봤자, 그것은 모래 위에 자신의 오만함을 쌓는 행위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하느님을 만나고 또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 것일까요?
* 박병규(요한보스코) 신부는 5대리구 청년담당 사목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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