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2-25일까지 저희 삼덕성당 복사단에서는 가창성당과 함께 홍콩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복사단이 생긴 이후 처음 해외로 성지순례를 다녀 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배상희(마르첼리노) 주임신부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41명의 학생들과 두 분의 신부님 그리고 수녀님, 선생님까지 46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참여한 홍콩으로의 성지순례는 그동안 다녀온 성지 중 가장 많은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첫째 날 홍콩에 도착한 저희들은 메리놀하우스라는 선교센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곳은 선교사분들이 공부하고, 또 다른 곳으로 선교를 가셨다가 요양하러 오시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계시는 분들을 보면서 한국교회를 위해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6개월 동안 먼 곳까지 걸어서 오신 김대건 신부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건물을 방문하였는데 파리외방전교회가 철수하면서 그곳은 박물관과 문화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다음으로 홍콩한인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한인성당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큰소리로 미사도 드리고, 한인성당에 계시는 어머님들께서 맛있는 얌차식을 사주셨습니다. 현지식이라 몇몇 친구들은 입맛에 맞지 않아 잘 못 먹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저희 일행 모두 아주 맛있게 먹은 뒤, 홍콩에서 유명한 야경을 보기 위해 피크트렘에 가서 사진도 찍고 부모님께 드릴 기념품도 샀습니다.

둘째 날에는 홍콩주교좌성당으로 향했는데 주교좌성당에는 초, 중, 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곳으로, 한창 학교행사를 준비하는 중이었고 미사를 먼저 집전하고 행사를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는 그 곳에서 홍콩 교구장님이신 통 주교님을 만났습니다. 통 주교님께서는 생김새가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특별히 한국에서 복사단 아이들이 온다고 일정을 맞춰주셨으며 홍콩교회에 대한 설명과 새해 덕담 그리고 세뱃돈도 일일이 챙겨 주셨습니다. 끝으로 통 주교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신부님, 수녀님 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손을 들면서 가슴이 찡해왔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을 따르며 사는 수녀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주교님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홍콩에서 페리(배의 일종)를 타고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아서 서양식 성당의 건축형식과 동양식 성당의 건축형식의 특이한 형식으로 지어진 성당이 많아서 9개의 성당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합니다. 마카오에는 크고 웅장한 성당들이 많았는데 그러한 성당들을 보면서 다른 세계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170여 년 전 김대건 신부님께서도 아마 마카오의 성당들을 보시고 참으로 많이 놀라셨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카오에서 한국 신부님, 수녀님들을 뵈면서 저희는 더욱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분의 신부님, 수녀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 마카오로 파견 나가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보다 400년이나 오래된 가톨릭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고, 1836년에는 김대건 신부님께서 마카오로 유학을 오셔서 신학공부를 하셨는데, 현재 마카오는 20년째 사제서품자도 없고, 신부님들의 평균 연령도 70대라고 합니다. 신자 수 역시 너무 적어서 본당 개념마저 무의미해져 마카오에서 파견오신 신부님, 수녀님들께서는 우리나라처럼 본당사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마카오교구를 위해서 봉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더욱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녀님께 마카오는 우리나라처럼 수많은 박해가 있지도 않았고, 더욱이 가톨릭국가였는데, 가톨릭이 더 성장하지 못하고 왜 이렇게 쇠퇴하고 있는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수녀님께서는 마카오가 예전에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었는데 해방을 하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가톨릭이 급격히 쇠퇴되기 시작하였고, 그나마 현재 마카오교구는 그 당시 남겨진 건물들과 성당, 교육관 등에서 들어오는 수입(월세) 등 으로 겨우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수녀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순교자의 피로 이루어진 한국교회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신앙 선조들이 고맙기만 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목숨 걸고 머나먼 땅에 오셔서 한국의 최초 사제가 되셨고, 또 많은 순교자 분들께서 피와 노력으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심어주셨듯, 저희도 그 씨앗을 잘 가꾸어 후대에도 잘 물려주어야 하는 정말 귀중한 신앙의 유산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한 마카오 교구에도 기쁜 소식이 들렸습니다. 20여년 만에 신학생 두 분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 두 분은 우리나라의 한티순교성지에 오셨다가 감동을 받으시고는 신학생이 되셨고 현재 홍콩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신다는 이야기를 수녀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저는 쇠락해가는 마카오에 신학생 두 분이 생기신 것이 마치 우리나라에 신학생이 생긴 것처럼 많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학사님들이 꼭 훌륭한 신부님이 되셔서 다시금 마카오 교회가 활발해질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현지에 계시는 하 데레사 수녀님의 인솔로 우리 일행은 다시 마카오에 하나밖에 없는 요셉신학교로 향하였습니다.
지금은 신학생이 없는 관계로 요셉신학교는 박물관으로, 그리고 선교사제들께서 주거하시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요셉신학교는 좋은 시설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아우구스티노성당에 갈 수 있어서 좀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카오주교좌성당을 방문하고, 성바오로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수차례 큰불이 나서 앞면만 남은 성당으로 김대건 신부님께서 마카오에 오시기 1년 전에도 큰불이 났었다고 합니다. 다시 저희 일행은 순례일정의 하이라이트인 안토니오성당으로 갔습니다.
안토니오성당은 김대건 신부님께서 공부하셨던 건물이 현재는 남아있지 않아 근처에 지어진 성당으로 김대건 신부님을 생각하며 봉헌된 성당입니다. 대성당 제대 밑에는 성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소성당에는 석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먼 이국땅에서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김대건 신부님을 기억하고, 기도하시는 것을 보며 김대건 신부님께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라는 것이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또 안토니오성당 근처 공원에는 성당에 있는 석상보다 더 큰 성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우리 복사단은 김대건 신부님 성상 앞에서 다 같이 손을 잡고 큰소리로 ‘장하다 순교자’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뜨거운 가슴을 간직하며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셋째 날 아침 마카오에서 심천으로 이동해서 민속촌에 갔습니다. 이 날은 중국 한인성당에 계시는 부모님들께서 저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점심은 순례 중 처음으로 한식을 먹었는데 일인당 밥 두세 그릇에 온갖 반찬과 찌개까지 뚝딱했습니다. 어찌나 맛있게 먹었는지 먹으면서 우리 음식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머님들께서 간식으로 직접 만드신 샌드위치를 주셔서 아주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저희는 어머님들의 안내에 따라 민속촌으로 가서 관람열차도 타고 조별로 이동하면서 말은 통하지 않지만 필살 애교로 수상보트도 깎아서 타고, 기마전 공연과 세계 3대 쇼 공연도 보았습니다. 비록 짧고, 빡빡하고, 힘든 3박 4일의 일정이었지만 모두 함께여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다른 성지순례와는 또 다른 색다른 체험이었고 정말 하느님을 느끼며 체험하기 좋은 시간이었음에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끝으로 모든 일정을 계획하시고 준비해주신 가창성당 이기수 신부님, 루실라 수녀님, 세라피나 수녀님, 그리고 46명이라는 많은 인원들을 인솔한다고 수고해주신 우리 허진혁 보좌신부님과 홍규태 대건안드레아 선생님, 성지순례 가기 바로 전 인사발령으로 인해 비록 함께 하지 못했지만 함께 준비해주시고 기도해주신 희정데레사 수녀님, 홍콩이라는 낯선 나라에서도 어머니의 마음으로 따뜻하게 맞이해주시고, 맛있는 간식과 식사도 준비해주시며 일정마다 가이드와 통역도 해주신 홍콩한인성당, 심천한인성당 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들, 또 마카오에서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신 신부님, 수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언제 어디에서나 당신을 느끼고 체험하며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해주신 사랑하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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