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28일(일) 고산성당 ‘증거자의 모후 쁘레시디움(단장 : 이병오 요셉)’에서는 한티성지-신나무골성지까지 약 25.2Km 거리를 8시간 20분 동안 도보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단원 10명과 가족 7명이 참석한 순례의 여정을 <빛> 잡지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07:40 본당 집결
시작은 언제나 풍성한 결실, 아름다운 마무리를 꿈꾸기에 늘 상쾌하다. 이 축복받은 날에 초대받은 자들을 기다리고 계실 주님을 만나러 나선다. 힘찬 출발, 함께하는 천상 군단, 떠나는 오늘이 있기에 마냥 행복하네. 누가 말했던가, 행복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오늘 그 인생의 참 행복을 찾아보자고 순례의 길을 떠난다. 성지로 향하는 모든 이는 한바탕의 즐거움을 뒤로 하고 준비된 일정을 간추리며 짧은 묵상으로 하루를 설계한다.
08:50 한티성지 출발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가 하나 된다. 고통 속에 혹시라도 있을 일탈을 예방하고자 순례 기도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고 긴 여정의 출정 보고를 올린다. ‘주님! 저희 순례길에 부디 영광주소서.’
09:00 순례시작
드디어 대장정에 돌입한다. 예정시간보다 30분 늦은 관계로 일정의 차질을 우려, 시작부터 다져온 무쇠 체력을 바탕으로 놓쳐버린 시간 만회에 올인한다. 나는 가고 싶다. 님이 박해를 피해 떠나던 고통의 길, 생(生)과 사(死)의 길을 넘나들던 외롭고 희미했던 그 길. 옮기는 걸음마다 고개 숙인 나뭇가지가 미소로 인사한다. 다가올 푸르름을 생각하며 추운 겨울 모진 눈보라와 친구 했으리라. 무분별한 난개발로 한티골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인간의 자연파괴현장이 파노라마처럼 덧없이 전개된다.
10:10 가산산성 주차장
거침없는 쾌속 행군으로 산성 정문주차장에 다다른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은 우리의 순례길에 또 하나의 벗으로 다가오고, 쉬어가는 이의 편안함을 덤으로 준다. 잠시의 휴식에 활짝 핀 그대 모습 비쳐지니 그대는 나의 보석, 나의 천사, 나의 하느님, 함께하는 믿음이 있어 좋다, 따스함이 좋다, 사랑해야 할 님들이 있어 더욱 좋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남풍이 거리의 황량함마저 쓸어간다.
남원리 ㄱ식당 앞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돌리니 끝없이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 짚신 신고 오솔길을 걸어갔을 신앙의 선조들이 부럽다. 고요함을 벗삼아 걷는 길은 낭만도 있으련만 발아래 찾아오는 고통은 나의 이상을 현실로 돌려놓는다. 쪽빛 송림지는 세상 고뇌 다 안고 잠든 듯 정적만이 감돌고 산과 마주하는 수면은 우리를 위해 그려놓은 한 폭의 수묵 풍경화다. 한 떨기의 매화가 잔뜩 웅크리고 포효할 날만 기다리고 길가에서 웃고 있다. 계단을 내려서니 주님이 한없이 반겨 주신다.
11:30 동명성당
배낭을 내린다. 그 누구의 따뜻한 배려가 피로를 컨설팅하고 같이 나누는 간식이 하모니를 이루니 컨디션은 베스트로 업그레이드 된다. 받기만 했던 믿음에서 나누는 믿음으로 내 생활의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오염된 사고와 만 가지의 잡념을 한방에 날리고 성모님께로 깊이 있게 다가선다. 질주하는 차와 마주하며 구안국도 횡단보도를 지나 동명면 소재지를 통과하니 여기서부터는 도시 탈출, 하늘나라이다. 나태했던 나의 일상들은 오늘 이 길에서 도태시키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안락함마저 거부한다. 인도로 접어들어 송산지를 왼쪽으로 두고 오르니 탄탄대로의 연속이다.
12:14 느티나무 보호수
세상의 온갖 시름 다 안고 파란만장한 질곡의 삶을 펼쳐온 듯 주름진 고목은 말없이 서 있다. 수령 180년, 그 옛날 박해를 피해 떠나는 성인들의 피난길을 지키며 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아파했을 그대가 지금 우리의 순례길에도 그때 그 자리, 그 나무로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이정표 아래서 앞서 간 이들의 고단했던 신앙을 되새기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강한 뿌리에서 나오는 줄기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듯, 성인들의 강한 신앙 뿌리처럼 내 믿음도 깨달음의 연속으로 더욱 공고히 할 것을 다짐해 본다. 여부재를 향하여 고도를 높인다. 차오르는 거친 숨도 돌아가는 묵주 앞에서는 하나의 통과 의례이다.
12:40 건령산 여부재
쉼 없는 전진으로 가볍게 여부재에 올라섰다. 눈앞에 터지는 장쾌한 조망은 푸른꿈, 무지개꿈을 잉태하건만 검게 변해버린 수난의 현장은 또 다른 서글픔을 준다. 있음에 겸손하고 나눔에 즐거워하며 모두가 하나 되는 시간, 꺼질 줄 모르는 신심을 확인시킨다. 우리는 폐허가 된 건령산 산허리를 몇 구비 감아 돈다. 태양은 보기 위해 있고 달은 감추기 위해 있다지만, 여기 이곳에는 보고 감출 것이 하나도 없다. 숲이 아닌 숯으로 꾸민 산에도 조그마한 생명의 움직임은 겨우 감지된다.
13:20 금락정 쉼터(중식)
정월 대보름날의 별미가 산상(山上)으로 다 올라왔다. 고갈되어 가던 체력은 자동 비축되고 건네는 먹거리에는 사랑마저 듬뿍 담겼으니 거부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오름에 만족하고 쉼에 추억 만드니 여기가 지상낙원, 무릉도원이다. 힘겨운 삶, 피곤한 일상들을 산위에 퍼지르고 우린 또다시 주님을 만나러 일어선다.
13:55 십자가의 길 제1처
산중 외딴 곳에 홀로 서 계시는 예수님, 모든 것이 재로 변하고 없어도 예수님만은 십자가 위에 약간의 그을린 모습으로 그 자리에 계신다. 이 또한 성령의 힘이런가? 승부와 경쟁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던 인생, 오늘 이 자리에서 희생과 나눔으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모두가 머리 조아린다. 사순시기 산위에서 바치는 십자가의 길이 나를 울린다, 나만의 천국을 위해 달려온 지난날을 반성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구원을 청해 본다.
14:10 십자가의 길 제14처(제3피난고개)
그들은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당당히 신앙을 증거하며 하느님 뵈러 가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순교를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으로 여기며 초연히 생명을 던졌으니 누가 그들을 천사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최후에도 마지막이라 생각지도 않는 이 피의 여정을 실크로드라 말했으리라!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선두에 선 나는 조심, 또 조심을 외치며 콘크리트 포장길을 횡단하여 계속 계곡으로 진행한다. 오늘 이 순례길에 기꺼이 동행해 주시며 축적된 노하우로 지극정성, 깨끗한 마음까지도 봉사해 주시는 프란치스코 평화산악회 회장님이 너무나 고맙다. 작은 우연이 큰 인연을 만들듯 님의 감사한 마음에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발아래 부스럭거리는 이름 모를 잡풀들의 겨울나기가 무명 순교자들의 외침으로 들려온다. 창평지와 맞닿으며 우린 다시 개발된 문명과 마주한다. 기나긴 아스팔트길을 걸어 창평 2리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자매님들이 전해오는 지나온 길, 가야할 길은 순례의 피로도를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자고 독려하고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라는 어느 성가의 한 구절을 불러본다. 마을을 통과하면서 끝을 향하여 마지막 힘을 북돋우며 많은 성찰과 철저한 자기 관리로 이후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자고 다짐도 해본다.
16:12 신동성당 공원묘지(제2피난고개)
널브러진 쓰레기가 신동성당 주임 신부님의 투기 금지 표지판을 무색하게 한다. 준비해간 쓰레기 봉투로 담아 보지만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깨끗한 마무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달서천을 건넌다. 산에는 벌써 봄의 도착을 알리는데 들에는 아직도 삭막한 겨울이 접수하고 있다. 세상의 온갖 고난 두 어깨에 다 짊어진 듯 고통스러운 김 요셉, 한 마리아 부부님의 포즈가 우리의 여정이 힘들었음을 온 몸으로 말해준다. 푸근한 낙엽 방석, 소나무 병풍이 드리워진 들판의 끝자락에 앉아 걸어온 하루를 논한다. 입안의 감말랭이가 몸과 마음까지도 편안하게 해주고 시원한 물은 찌든 피로를 단숨에 날려 버린다.
제1피난 고개를 거침없이 돌파하니 성지가 가까워짐을 피부로 느낀다. 걸으면서 함께 바치는 묵주기도로 지친 심신을 가다듬고 뚜벅뚜벅 걸으니 개의 울부짖음도 프로정신으로 무장된 순례객에게는 한낱 콧노래일 뿐이다. 작은 언덕을 넘어서며 신나무골 성지가 가까워졌음을 무전으로 타전하니 한 무리의 평화 인사 나누기가 시작된다.
18:20 신나무골 성지 도착
1000차 주회를 맞이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사순시기 주님 수난의 길에 동참해 보고자 기획했던 도보 성지 순례, 그 일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당신의 해맑은 웃음은 나의 행복. 느낌에 감동했고 성취감에 기뻤다. 높이에 굴하지 않고 도전에 주저함이 없었던 그대는 최고요, 일등 당신. 평화와 기쁨으로 돌려진 하루, 정답고 행복했던 오늘.
실루엣 같은 하느님! 무사 완주에 감사드리고 새 생활의 동력이 될 큰 힘을 주셨기에 찬미드립니다. 험난했던 일정, 밤의 침묵 속에 던지고 함께 했던 긴 여정도 마침기도로 정리합니다. 아쉬운 이별, 반가운 다음을 고대하며 오늘을 비켜섭니다. 감사합니다. ‘증거자들의 모후 쁘레시디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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