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어느 나이든 부부의 대화 내용이다. 모처럼 아내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갔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몇 십 년 만에 친구들을 만난 듯 했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재미있게 무르익으려고 하면 집에 혼자 남아있던 남편이 언제 집에 오느냐고 자꾸만 전화를 건다. 퇴직한 남편한테 그렇게 붙잡히면 죽을 때까지 그 팔자로 살아야 하니까, 이참에 남편에게 혼자 있는 버릇을 들여 놓아야 한다고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충고를 한다.
짜증이 난 아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남편은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하면서 이것저것을 물어댄다. 아내는 왕짜증이 났다. 시간 있으면 산에나 가고, 그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나라고 쏘아붙인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진 남편이 대답한다. 직장생활 한다고 아내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퇴직하면 아내와 늘 같이 지내고 싶었다고…. 현직에 있을 때 별 볼일 없는 친구가 연락을 하면 갖은 핑계대면서 친구를 멀리했는데, 퇴직한 별 볼일 없는 자신을 누가 만나주겠느냐고….
이 대화의 내용은 그저 지어낸 것에 불과한 허구일까? 우리 모두의 마음속 이야기가 아닐까? 그 대화 내용을 따라가면서 ‘바로 우리의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았고, 남편은 남편대로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았듯이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이 노부부의 대화가 왜 이다지도 서글프게 엇갈려만 가고, 그 이야기가 우리네 이야기로 가슴을 파고들까? 해마다 12만 쌍이 이혼을 하고, 3,500명의 노인이 자살을 한다는 통계청 발표는 우리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마음을 서로 깊게 나누는 진정한 ‘만남’의 삶을 살아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가 않았을까? ‘만남’은 “자신에게 다가온 새로운 실존을 자신의 실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첫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라는 대목을 어느 복음해설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말은 쉬울지 모르나, 그렇게 살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모든 것을 버린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불가능할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만 가진다면 가능할 것이다. ‘졸부는 자기 말만 하고, 인격자는 남의 말을 경청한다.’ 하지만 복잡하고 복잡한 사회생활을 한다고 우리는 참 많이 지쳐 있다. 그래서 남의 말을 느긋하게 경청할 마음의 여유가 없음도 사실이다. 우리의 모습은 가시 돋친 고슴도치 같다. ‘대화’는 ‘대놓고 화내는 것이다.’라는 웃기는 말이 우리 삶의 현실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는 말이 되어 버렸다.
사실 이번 호에는 ‘사제의 해’를 마감하면서 그와 관련된 내용의 글을 써주면 좋겠다는 청탁을 받았다. 작년 ‘사제의 해’를 시작하며 우리 교구의 사제들은 “거룩한 사제, 사랑 충만한 사제, 행복한 사제”라는 모토를 정하고 그렇게 살 것을 다짐하였지만, 그 어떤 사제도 자기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고 자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신부님들이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나 하는 줄 압니까?” 교우들과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사목생활을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노부부가 나누는 서글픈 대화는 우리 모두의 현실 삶의 이야기임을 생각하면 좋겠다.
“마음은 마음에다 말한다!(Cor loquitur ad cor!)”라는 프란치스 샬레스 성인의 말씀을 사목 모토로 정하신 존 헨리 뉴먼 추기경님이 새삼 멋있게 기억된다. 참으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마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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