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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 해’를 마치며


최현철(파비아노)|신부, 두산성당 주임

사제들의 모범이신 아르스의 성자 요한 마리아 비안네 (1786-1859) 성인신부 선종 150주기를 맞아 선포 되었던 ‘사제의 해(2009. 6. 19-2010. 6. 11)’를 마치면서 대구대교구에서 사목 중인 두 분 사제의 글을 소개해 드립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사제의 길을 걸어가는 두 분의 글을 통해 진솔한 사제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최현철(파비아노)|신부, 두산성당 주임

 

종종 “신부님, 신부님은 어떤 동기로 신학교에 가시게 되셨어요?”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좀 당황스러워진다. 왜냐하면 나의 경우는 신학교에 가게 된 동기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어릴 때는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막연하게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만 했고, 일 년에 한 번씩 공소에 오시는 신부님들이 ‘문답’식의 교리를 물으시고 대답을 못하면 심하게 꾸지람을 하고 때로는 고해성사도 받지 못하게 해서 어린 마음에 그저 신부님이 무서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자주 “너는 커서 신부가 되어라!”고 말씀하셨고 집안의 여러 어른들도 나를 만나기만 하면 “너는 신부가 되면 좋겠구나.”라고 말씀을 하시곤 했다. 특히 무섭기로 소문이 난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매일 저녁마다 만과(저녁기도)만은 우리 가족 전체가 다 모여서 드려야 했다. 그런데 이 만과와 연옥 영혼을 위한 연도, 그리고 묵주기도를 바치면 기본 한 시간 이상은 걸렸기에 어떤 때는 기도를 바치다 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께서는 긴 담뱃대로 나의 머리를 사정없이 때리셨다. 그 뒤로는 겁이 나서도 그럴 수가 없었는데, 어쨌든 저녁기도는 일 년 내내 예외가 없었다. 명절이든, 손님이 오셨을 때든 항상 저녁기도는 바쳤고 또 바쳐야 했다.

매일 저녁기도를 크게 바치는 소리를 외교인들이 듣고서는 “홀롤로, 홀롤로!”하고 기도를 한다고들 놀리기도 했다. 어릴 때는 지겹기까지 했던 기도 시간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때가 많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으레 커서 신부가 되어야 하는 줄로만 생각했다. 집안 전체가 나에게까지 5대째로 내려오는 교우 집안에다가 종조부님(초대 부산교구장)이 신부님으로 계셨기에 모두들 그렇게 나에게 “너도 신부가 되어라.”고 한 것으로 생각한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생전 처음 서울로 혼자 입학시험을 치러 갔다. 처음 서울역에 도착하니 역사 건물이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특히 지금은 없어졌지만 시청 청사와 국회의사당, 중앙청 건물은 얼마나 크게 보였는지 몰랐다. 물어물어 혜화동까지 새나라 택시를 타고 성신중·고등학교를 찾아가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시골 학교에서는 공부 잘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워낙 입시 준비도 하지 않았고 공부도 하지 않았기에 합격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합격이라는 말을 듣고 소신학교인 성신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시험공부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다가 중학교에 입학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나의 성소생활은 시작이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6. 25 사변 직후인지라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대였으나 신학교에서 생활하면서 큰 어려움은 못 느끼고 살았다. 물론 추운 겨울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밖에서 찬물에 세수를 해야 했고 공동 침실은 기온이 영하라 손발이 동상에 걸리기도 했지만,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 없이 6년을 지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대신학교인 가톨릭대학에 바로 올라가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졸업식이 끝나고 나서 대구관구와 광주관구에 소속된 학생들은 광주로 내려가라고 했다.

국가고시에 합격만 하면 서울 가톨릭대학(대신학교)에 입학된다고 했는데, 너무 뜻밖의 일이었다. 그래서 교장 신부님을 찾아가서 “우리가 광주로 가서 시험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하고 여쭈었더니 그러면 서울에서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짧은 생각에 동료들과 백지 동맹을 하기로 합의했고, 백지 동맹을 한 학생들은 시험에 불합격하였다. 그래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저희는 광주에서 입학시험에 불합격했으니 받아주십시오.”하고 말씀드렸더니, 이것이 전례가 되면 곤란하다고 했다. 결국 나와 몇몇 동료들은 입학을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최병선(요한, 1987년 선종) 신부님께서 많은 노력을 해주신 덕분에 광주에서 불합격했던 학생들은 서울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광주로 내려가라는 명을 받고 다시 광주로 가서 예수회 신부님들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가기 싫었던 광주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신부님들로부터 외국어로 강의를 듣다 보니 힘든 수업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매일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짧은 시험을 쳐야만 했다. 그래서 일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해서 좀 쉬다 오자고 하면서 군에 가게 되었다. 나와 한 동료는 복무 기간이 몇 달 짧은 해병대로 자원입대했다. 힘든 생활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실제 군 생활은 너무나 힘들었다. 매일 언제, 어떤 기합과 매를 맞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생활했고 더욱이 매일 배가 고파서 항상 밥 생각밖에 없었다. 이것은 훈련소에서만이 아니라 실무에 배치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 가장 힘든 생활이 바로 이때였다.

소총 소대에서 1년의 생활은 나의 삶에 많은 이야기꺼리와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소총 소대에서 생활하던 그때보다 더 힘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제대를 일 년 남겨두고 월남 파병이 시작되어 청룡 일진으로 월남에서 생활을 하였다. 몇 차례 야간 전투에도 참가하고 베트콩 소탕전에도 참가하였으나 다행히 좋은 상사를 만나 월남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이렇게 군에서 사병으로 근무한 3년의 생활은 이후에 신학교생활과 그 후 군종 생활, 그리고 지금까지 사제생활 중에 당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지금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어떤 어려움에도 내가 겪었던 군 생활에 비하면 힘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어렵게 생활했던 군에서의 생활 덕분으로 생각한다.

그동안 본당사목을 해오면서 나는 사제성소를 지망하는 여러 명의 학생들을 신학교에 보냈고, 그들 중에는 사제수품 후에 현재 교구 사제로 사목하고 있는 신부가 여섯 명 있고 신학생은 네 명이 있다. 그들 모두 사제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고 있고, 나는 그들이 착한 목자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사제는 주님께서 왜 자신을 사제로 불러주셨는지를 깊이 깨달아야 하며 자신의 성소를 깊이 깨닫는 사제일수록 주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신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이렇듯 주님 제단에서 함께 미사를 드리는 같은 사제이자 후배인 그들이 교우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존경 받는 사제로 오래 기억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그들처럼 사제성소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여러 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고픈 고통, 항상 불안을 느끼는 고통, 매 맞는 고통, 생명의 위협 등등을 당했다. 사제로 살며 돌이켜볼 때 그 많은 어려움들은 사제 삶의 밑천이 되어준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밑천이 되었듯이….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살아 갈 수 있는 길이 바로 사제의 길이라 생각한다.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하며 마지막 순간에 아무런 후회 없이 나는 이 길을 잘 선택했다고 말 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사제직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부족한 것이 많고 잘 못할 때도 많이 있지만 ‘내가 왜 사제가 되었나?’ 하고 후회를 한 적은 없다. 다만 부족하고 더 잘하지 못한 것이 많은 나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또 다시 힘을 얻어 기쁘게 살 뿐이다.”

 

 


내가 사제로 걸어가야 할 길은…
한영수(프란치스코하비에르)|신부, 소화성당 주임

 

I. 부르심
난 어릴 때부터 특별한 꿈이 없었다. 남들은 장군이 되고 싶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할 때, 나는 왠지 무엇이 되고 싶은 꿈이 없었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마다 난 아무 것이나 기분 내키는 대로 대꾸해버리곤 하였다. 하지만 돌아서면 어떤 답도 늘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고등학생 때였다. 우연히 한 신학생을 만났다. 그의 삶은 남들과는 무엇인가 달라보였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아주 각별하게 대해주었고, 나는 그와 아주 쉽게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말했었다. “너 신학교에 오면 좋겠다.” 나는 웃었다. 너무 급작스런 말에 달리 어떤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세 번이나 정색을 해서 나에게 같은 말을 했다. 그날 밤 난 난생처음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 그 생각이 내 머리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집안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떠한 말도 날 그리 힘들게 하지 못하였다. 그 반대들 중에는 진심어린 걱정에서 나온 말도 있었고, 핀잔도 있었고, 도전적인 말도 있었다. 여러 가지의 반대들이 겹쳐질수록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더욱 굳어져갔고, 어떤 반대도 아주 합당하게 들리지 않았다. 신심이 깊으셨던 부모님은 결국 신학교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어주셨다.

II. 무르익음
신학교를 가게 되었다. 신학교에 추천해주신 분은 최현철(파비아노) 신부님이시다. 신부님은 입학준비 때부터 나에게 아주 각별한 애정을 쏟아주셨다. 신부님 덕분에 난 출신본당에서 아주 각별한 관심을 받으며 자랐다. 신부님은 사제성소에 아주 관심이 깊으셨다. 그래서 어린 신학생이었던 나도 우리 본당의 성소계발에 자연히 관심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방학을 맞아 본당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방학 때의 나의 모든 기도와 봉사를 언제나 본당의 성소발전을 위해서 송두리째 바쳤다. 그 덕분인지, 내가 입학한 다음 해에 두 명의 신학생이 새로 입학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세 명이 더 늘었다. 그러자 최현철 신부님께서는 “내년에는 이제 네 명이 입학해야 할 차례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는 세 명의 신입생뿐이었다.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때 내가 속했던 본당은 대구대교구에서 신학생이 제일 많은 본당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내가 사제성소의 꿈을 본격적으로 싹틔우면서 동료들과 함께 사제로서의 미래를 설계해 나가기 시작할 때에 최현철 신부님이 나의 본당신부님이셨다. 아마도 그분의 모습을 늘 세심히 지켜보면서 또 그분께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으면서 나는 나의 미래의 사제상을 구체화시켜 나갔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도 내가 이상적인 사제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최 신부님의 모습을 곁눈질로 눈여겨보면서 생각해둔 것과 사실 별반 다름이 없다.

 

III. 이상적인 사제상
내가 앞으로 사제로 살아갈 날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잘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한 사람의 사제로서 나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살고 싶다. 우선 나는 겸손한 모습으로 신자들을 대하고 싶다. 신자들을 억누르거나 부담을 지우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사제로 살아가고 싶다.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서로 눈높이를 맞추는 사제로 살고 싶다.

또 나는 주어진 것을 소박하게 받아들이는 사제로 살고 싶다. 권력을 가지려고 애쓰지 않으며, 주어진 삶에 만족해하면서 언제 누구를 만나더라도 같은 모습으로 대하는 사제가 되고 싶다. 명예나 자리에 집착하여 허영과 허례허식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들까지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일과 사람들을 언제나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사제가 되고 싶다.

그리고 나는 검소한 삶을 살아가는 사제가 되고 싶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찾거나 거기에 삶의 무게를 두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찾아가고 그들과 더 삶을 부대끼며 그들과 같은 삶의 방식을 가지려고 애쓰는 사제가 되고 싶다. 비록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은 운명을 나누며 살아가진 못한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누리는 복음적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공유하는 사제가 되고 싶다.

 

IV. 꿈을 향하여
이렇듯 나는 겸손하고 소박하고 가난한 사제로 살고 싶다는 꿈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상향일 뿐이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이 꿈을 아직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가까이 모셨던 아버지 신부님이신 최현철 신부님의 모습 안에서 그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음을 엿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학생으로 가장 예민하고 여린 시기에 그렇게 노력하시며 사시는 한 분의 사제를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오늘날 나의 꿈으로라도 그릴 수 있게 된 비결일 것이다.

비단 최현철 신부님뿐만이 아니라 그 후임 본당신부님들이셨던 이재명 신부님과 이대길 신부님의 삶 안에서도 나는 똑같이 노력하시는 모습들을 거듭거듭 다시 볼 수 있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사제로서 늘 부족함 안에서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하느님께서 베푸신 큰 은총이며 부르심으로 지금 나에게 새겨져 있다. 나의 일그러진 삶이 그래도 방향을 완전히 잃지 않도록 주님께서 이끄시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덕분에 오늘도 나는 이 목표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몸을 뻗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 신부님들이 신부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주님의 은총이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