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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부의 먼 곳에서 만나는 예수님
느림


마석진(프란치스코)|대구대교구 신부, 볼리비아 선교 사목

작년 7월 1일 한국을 떠나 2일에 이곳 산타크루스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오기 위해 미국 LA 그리고 브라질 상파울로를 지나와야 했습니다. 상파울로에서 이곳으로 오기 위해 이 나라 항공인 에어로수르(Aerosur) 항공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상파울로 공항에 있는 이 항공사 프런트에서 표를 받는데 (오후)5시 30분이라는 시간을 프런트 직원이 써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에게(임재우 신부님도 함께 이곳에 왔습니다.) 그때쯤 비행기가 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가 오후 3시쯤이어서 공항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고, 탑승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5시 30분이 다 되어 가는데도 탑승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점점 흘러 그 시간이 넘어갔고, 7시쯤 되자 저와 임재우 신부님은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스페인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다행히 임재우 신부님이 영어와 스페인어를 말할 수 있었기에 직원들에게 따지러 갔습니다. 임재우 신부님이 돌아온 후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행기 자리가 너무 많이 남아서, 더 채워지면 출발한단다.” 참 어이 없었지만 저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기다리는 터라 그냥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참 이상했던 것은 저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대부분의 승객은 볼리비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기다림 덕분에 비행기에서 못 잤던 잠을 잤습니다. 일어나 보니 시간은 벌써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무척 화가 났지만 제가 이곳에 오기 전 산타크루즈에 사는 다른 신부님들이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여유롭고 느긋하다. 그리고 화내는 거 정말 싫어한다.”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자정이 다 되어서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는데,  결국 비행기는 무려 7시간이나 연착되었고, 그 이유는 단지 비행기에 더 많은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는 좌석을 다 채운 뒤에야 떠났습니다.

이곳에 도착해서도 비자 연장이나 신분증, 면허증 등을 만들면서 그와 같은 비슷한 일들을 계속해서 많이 겪게 되었습니다. 한국이었다면 화도 내고, 따지기도 했겠지만 이곳에서는 우선 말이 잘 안되니 따질 수 없었고, 화를 내어 본들 결국 저 자신만 손해이기 때문에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기서는 참 듣기 힘든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에서는 너무나도 많이 들었던, 그리고 저 자신조차도 너무나도 많이 사용했던 “빨리 빨리”입니다.

이곳 말로 빨리 빨리는 “rapido, rapido” 인데 제 기억으로는 아직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입니다. 간혹 제가 이 말을 쓰면 우리 교사들이나 다른 친구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padre, tranquillo.” 이 말은 “신부님, 진정 하이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볼리비아가 중남미에서 가장 못살고 열악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이 나라 사람들의 그 여유로운 성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곳 사람들에게는 여유가 있습니다. ‘느림’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들을 마음껏 볼 수 있습니다. 밤마다 볼 수 있는 눈부신 별과 그 자태가 너무나 뛰어난 달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자연은 빠르지 않고 느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느님 또한 참 느린 분 같습니다. 이 세상의 모습을 볼 때 벌써 멸망해도 수없이 멸망했을 텐데 저희들이 변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또 기다려 주십니다. 물론 그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저는 요즘 언어를 통해 또 한 번의 느림을 배우고 있습니다. 워낙 언어 감각이 없기도 하지만 선배 신부님들의 말씀처럼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될 수밖에 없기에 단어를 찾고, 문장을 만듭니다. 강론을 쓸 때에도 제 스스로 쓴 다음 저희 집의 주임이신 석상희 신부님께 검사를 받고 틀린 부분은 다시 수정하여 강론합니다. 마치 글을 처음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나 답답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느림,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도 이런 저를 이해하고 기다려줍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poco a poco” 바로 “조금씩 조금씩”입니다. 아직 유창하게 말하지 못해 답답해 하는 저를 보며, ‘조금씩 조금씩 늘어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빨리 빨리”,”많이 많이”가 아닌 “조금씩, 느리게.”

우리가 너무 바쁘게 살고 있다면 잠시 느림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