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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람 나는 우리공동체 - 대구대교구 사무직원회 성지순례기
그분과 함께 떠나는 순례


이말숙(세실리아)|신룡성당 사무장

봄이란 계절은 생명을 잉태하는 희망의 계절이다. 겨우내내 인내하고 고통 속에서도 부활을 위해 참아온 생명들이 봄이 되면 하나둘 희망을 안고 살아온다. 사순시기를 보내고 기쁨의 부활을 맞고 있는 시기에 오랜 시간을 거쳐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 피 흘린 순교성인들의 정신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곳으로 떠나보기로 한다.

4월 19일(월)-20일(화) 이틀간의 교구사무직원회 성지순례. 지도신부님이신 하성호(사도요한) 사무처장 신부님과 이태기(안드레아) 본회 회장님의 인솔 아래 76명의 사무장, 사무원들이 서울대교구에 자리한 새남터와 절두산, 인천 교구에 자리한 강화도 일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19일(월) 아침 교구청에서 지도신부님의 출발 전 기도와 함께 성지순례의 길을 나섰다.

김천, 구미방면에서 함께 동행 할 일행들을 위해 선산휴게소에서 잠시 머물며 모든 일행들이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바쁜 일상생활을 벗어나 떠나는 여행이라 모두 설레는 마음들인지 얼굴 표정들도 환하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참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오랜 시간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 새남터로 향하는 내내 기도 중에도 펼쳐지는 봄 풍경들이 눈길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저 새싹처럼 우리 선조순교자들의 그 투철한 신앙심이 또한 저 새순처럼 죽지 않고 부활하여 지금도 곳곳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인가. 이런저런 조금은 철학적인 생각들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오랜만에 떠나보는 여행길에 나 자신을 깊이깊이 성찰하게 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해낸 그분의 작품을 보면서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이 마음이 아마도 순례의 또 다른 교훈이 아닐까.

새남터에 도착한 우리는 간단하게 새남터 성전의 구조와 건립의 목적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서울. 용산구 서부 이촌 2동에 자리한 새남터는 한국교회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분 중 11분이 순교하였고 11분 중 8분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도 3분이 성인품에 오른 한국의 대표 순교성지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군사훈련장으로 사용되다 국가에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을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 1801년에서 1866년까지 한국교회 4대 박해 기간 중 천주교 신자, 사제들의 숭고한 피가 이곳에 뿌려져 찬란한 신앙의 꽃을 피우게 된 곳이기도 하다. 우리 선조들은 목자 없이도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이곳 새남터에는 성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앵베르 주교, 성모방 신부, 성샤스탕 신부, 성베르뇌 주교, 성브르트니에르 신부, 성볼리외 신부, 성도리 신부, 성우세영 알렉시오 등 9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새남터에서 봉헌된 미사는 사무처장 하성호 신부님의 집전으로 이루어졌다. 순교성인들이 잠든 곳에서 미사를 봉헌한 까닭인지 가슴이 뭉클해져온다. 12사도들의 몫 중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몫은 어떤 사도의 몫으로 부여 받았는가? 구원은 얼마만큼 회두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짧고 간단한 강론임에도 스스로 생각의 세계에 빠지게 한다. 미사가 끝나고 우리는 준비해온 점심도시락을 먹고 새남터기념관(순교성인들의 삶과 역사적인 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을 둘러본 뒤 절두산으로 향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한강변을 마주보고 우뚝 선 절두산. 공사 중이라 내부를 둘러보지 못한 채 절두산 성지 앞에서 함께 기도를 바치고 절두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래 전 와 보았는데 현재는 새롭게 많이 보수가 되고 변화된 모습의 절두산에는 참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있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밀고나가기 위해 선참후계(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의 무차별 살육 아래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잠두, 용두로 불리던 이곳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평화로운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들이 오면  유람선을 띄웠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병인년(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로 더럽혀진 한강물을 서학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박해의 칼을 휘둘렀다. 절두산에서의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으로, 그 후 박영래(요한)와 숱한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는데 순교자들의 피는 잠두봉 바위를 물들이면서 한강에 흩뿌려졌다고 한다. 순교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절두산기념관 지하묘소에는 한국교회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새남터와 잠두봉과 절두산에 대한 순교성인들의 일화만으로도 우리는 참으로 가슴 아파 눈물을 흘리게 된다. 순교성인들의 피와 한이 담긴 곳을 둘러보며 왠지 모를 슬픔에 잠긴다. 그리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순교성인들이여 용서하소서.’ 절두산을 벗어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들러 강화도로 향하였다.

구제역으로 한창 문제가 되고 있어 강화도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올 때까지 여기저기 방역소독이 한창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일행은 숙소에 들러 짐을 풀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간단히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친교의 시간 중 하성호 신부님께서 교구설정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현황에 대한 브리핑을 해주셨다. 세속화된 우리의 삶을 돌아 볼 것과 보다 나은 생각들로 우리가 변화되는 꿈을 꾸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마인드를 변화시켜가길 바라셨다. 생명사랑나눔을 실천하며 세속적인 삶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며 100주년 기념사업에 동참해 줄 것도 당부하셨다.

짧지만 길었던 순례, 강화도에서의 밤을 보내고 20일(화) 새로운 하루를 미사봉헌으로 시작하였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신앙의 삶 안에서 나를 봉헌하고 살아간 이들에 대한 비유를 들어 우리 자신도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강론말씀과 더불어 100주년을 위해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이때, 우리 대구대교구 사무직원들의 의식 또한 변화되어야 함을 절실히 일깨워주는 신부님의 말씀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았다.




미사가 끝나고 일행은 강화도 마니산 산행 팀과 강화도 일대 성지순례 팀으로 나누어 길을 떠났다. 해발고도 469.4m의 마니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과 영종도 주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주변의 절경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며 봄빛 가득한 마니산의 색다른 풍경은 한 편의 시가 되어 다가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강화도 일대에는 갑곶 순교성지, 진무영 순교성지, 관청리 형방(병인박해 때 고문을 자행했던 곳), 고려궁지, 덕진진이 있어 꼭 들러보아야 할 성지로 주목받고 있다.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초기부터 천주교와 연관을 맺고 있다. 조선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철종의 할머니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에게 각각 마리아로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왕족이었던 이들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된다. 자식 상계군의 역모죄로 강화도에 귀향해 살고 있던 은언군(철종의 조부)도 강화부에서 처형되게 된다. 또한 1839년 김대건 신부가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해 강화 갑곶 앞바다까지 왔으며 이것이 계기로 갑곶해안은 선교사들이 해로로 입경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는 통로가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강화도가 혼란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최인서, 장치선 등이 순교하였고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 사건으로 책임을 물어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의 거절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난 신미양요 사건으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고 이어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도 효수되어 순교하게 된다. 고려 고종 19년(1232)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도로 옮긴 후, 39년 동안 건재했던 왕궁터인 고려 궁지 내에 병인 박해 때 고문을 자행하고 혹독한 박해의 현장인 관청리 형방이 있다. 강화도 역시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곳이 아닐 수 없다. 신앙을 지키고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순교성인들의 숨결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 숙연하게 하는 곳곳의 순례지들. 수많은 홍보물과 영상물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순례지일지라도 직접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너무도 큰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짧은 시간동안 다소 힘겨운 일정이었지만, 우리 사무직원회원들에게 1박 2일의 순례는 서로의 마음속에 또 다른 신앙의 버팀목을 만들어 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분과 함께 떠나는 성지순례에 더 많은 회원들이 함께 할 수 없었음에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순교성인들의 삶의 자취를 체험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라 깨달았다. 또한 살아갈수록 세속에 깊이 물들어가는 우리가 순교성인들의 정신이 묻어있는 성지를 돌아보며 스스로 반성하고 신앙의 주춧돌을 다시금 가슴에 세움으로써 장차 우리의 신앙을 지켜가는 데 큰 힘이 되어준 성지순례. 무엇보다 그분과 함께 한 순례였기에 나와 우리 사무직원들의 신앙심을 한층 더 고찰시켜준 복된 시간들이었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신 그분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