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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6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박영식(야고보) 신부

6월 6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루카 9,11ㄴ-17

11 그러나 군중은 그것을 알고 예수님을 따라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갈릴래아의 실력자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물었다.(루카 9,9)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루카 9,10-17)은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열두 제자는 하느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왔다. 예수님은 고생한 그들을 군중을 피해 벳사이다 근처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서 쉬게 하려 하신 것 같다. 그러나 군중은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예수님은 그들을 맞아들여 하느님이 당신의 병자치유와 빵 기적을 통해 눈으로 볼 수 있게 왕권을 행사하신다고 가르치셨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열두 제자는 인적이 없는 곳에서 오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고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고 자게 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예수께 군중을 해산시켜 각자가 잠자리와 음식을 찾게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예수님은 제자들 자신이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하늘을 쳐다보고 하느님의 권능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빵을 많게 하셨다. 제자들을 시켜 배고픈 군중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예수님은 이 빵 기적으로 하느님이 세상종말에 당신 백성을 배불리 먹이실 것이라는 예언(시편 37,19)을 실현한 메시아로 임하셨다. 열두 제자는 예수께 빵을 받아 나누어주어 장정 오천 명이 배불리 먹게 하고 남은 조각을 모았는데 각자 한 광주리씩 열두 광주리를 거두었다. 열두 광주리라는 말은 이 기적이 풍성했다는 뜻인 것 같다.
예수님은 빵 기적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힘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음을 가르치셨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구원활동을 돕기 위해 뽑힌 사람들이다. 우리의 인간적 힘에 매달리지 않고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사람들에게 영생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다.”(마더 데레사) 이 도구구실을 충실히 잘 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에 빛을 던지는 성공한 사람이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고독과 절망과 좌절의 유일한 치료제는 약이 아니라 사랑이다. 세상에는 빵 한 조각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더 많다.(마더 데레사) 같이 웃고 울고, 서로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기울이는 것, 남에게 내 삶을 조금 나누어주는 데서 생명의 꽃이 핀다. 그러나 갈 길이 바쁘다고 이웃에게 무관심하면 결국은 혼자 고독하게 살게 된다. 천천히 가더라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목적지로 나아가는 것이 남도 살리고 자기도 사는 비결이요 인생에 성공하는 길이다.(박영식, 말씀의 등불 III, 주일복음묵상·해설 〈다해〉 - 가톨릭신문사, 2010년, 248-250쪽)

 

 

 

6월 13일 연중 제11주일 루카 7,36-50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유다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사귀시는 것을 비판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바리사이 집에서 당신을 향한 사랑을 드러낸 죄 많은 어느 여자를 용서하여 당신이 죄인들의 친구임을 보여주셨다.(루카 7,36-50)
시몬은 예수님을 예언자와 선생님으로 받들어 모시고 식사를 대접해 드렸다. 그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사람들은 집 문을 열어두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회식이나 잔치를 했다. 그래서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벽 쪽에 앉아 대화를 엿듣거나 구걸하곤 했다. 어느 죄 많은 여자도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이 앉아 계시는 방 안으로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누구이고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이어서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표시로 그분의 발에 아주 비싼 향유를 발라 드렸다.(루카 7,47) 발에 향유를 바르는 것은 시체에 염을 하는 행위와 같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이 예언자라면 그 여자가 죄 많은 여자임을 알 수 있는데도 당신 몸에 손을 대는 것을 내버려 두어 부정하게 되시는 것을 마음속으로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은 시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왜 당신이 그 죄 많은 여자가 당신께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것을 허용하셨는지 비유로 설명하셨다. 당대 노동자의 오백 일 노임인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 다 빚을 면제받았는데, 어느 쪽이 빚을 준 사람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는지 물으셨다. 대답은 자명하다. 빚을 준 이는 하느님, 빚은 죄, 오백 데나리온을 빚 진 사람은 죄 많은 여자,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바리사이 시몬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그 죄 많은 여자를 받아들여 하느님의 크나큰 은혜를 베푸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시몬이 당대의 관례와는 달리, 당신이 그의 집 안으로 들어오셨을 때 당신의 발을 씻어드리거나 당신의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지 않았다고 이르셨다. 시몬과는 반대로, 그 여자는 당신의 발을 씻겨주고 그 발에 입을 맞추어 극진한 사랑을 보였다고 이르셨다. 또 그는 시몬과는 달리, 예수님의 발에 가장 비싼 향유를 발라드렸다. 이처럼 그 여자는 시몬보다 예수님을 훨씬 더 사랑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자가 바리사이 시몬보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 있다고 이르셨다.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은 죄를 용서받는 반면, 예수님을 적게 사랑하는 사람은 적게 용서를 받는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습니다.”(1베드 4,8)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야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의 잘못도 용서해줄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만큼 용서하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받기 위한 조건인 회개는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더욱더 많은 사랑을 마음속에 품으려면 예수님의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아가페)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지 체험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성경, 속담, 격언, 명언과 성인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산 성인들의 생애는 각자의 장점과 단점을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이러한 거울을 자주 봐야 자기가 얼마나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사랑에 인색한 사람인지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을 항상 타인과 비교해보아야 자신을 알고 죄의식을 느낄 수 있다. 고해소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마음이 관용과 사랑으로 가득 차는지 살펴보자.(박영식, 말씀의 등불 III, 주일복음 묵상·해설 〈다해〉 - 가톨릭신문사, 2010년, 256-257쪽)

 

 

 

6월 20일 연중 제12주일 : 루카 9,18-24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은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신 뒤 군중을 떠나 홀로 기도에 몰두하셨다. 당신이 인류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기도 중에 깨달으신 것 같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예수님의 빵 기적으로 배불리 먹은 군중들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또 제자들도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하면서 예수께 대한 군중들의 견해를 들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는지를 물으셨다. 제자들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옛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시라고 여긴다는 것을 예수께 전해드렸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이 ‘하느님의 메시아’,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라고 대답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과 군중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이전에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부흥시켜 줄 정치적인 인물로 오해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을 고난을 받지 않고 영광만 누리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당신의 신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먼저 고난을 받고 나서 부활의 영광을 입으시는 메시아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도 부활하여 영원히 행복의 극치 속에서 살게 된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고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충실히 따라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을 채워야 한다고 이르셨다. 첫째, 자기를 부정하고, 둘째,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며, 셋째,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다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누구나 목숨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9,24) 현세생활에 탐닉하고 물질적 안정에 의지하여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자기의 신체적 생명을 구할 수는 있을지라도 영적 생명, 영생을 잃어버린다. 현세의 안락한 삶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영생을 누릴 수 있다.
날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을 대신 살아주시도록 예수님을 사랑하고 닮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고난 받으시는 메시아라고 고백할 수 있다. 내 마음속에 사랑의 불꽃이 끊임없이 타올라야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믿음이나 사랑은 계속 새로워지고 커지지 않으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끊임없이 이기심을 죽이고 사랑의 불꽃을 밝힌다.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보다 자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사랑할 기본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자기중심주의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죄와 불행의 뿌리이며, 영원한 파멸의 원인이다. 이는 인류가 하느님께 받은 가장 참담한 심판이고 암, 에이즈 같은 불치병이나 육체적인 죽음보다 더 가혹한 벌이다.”(박영식, 말씀의 등불. 주일복음 묵상·해설 〈가해〉 - 가톨릭신문사, 2007년, 329-330쪽)
이기심은 진짜 무신론이요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와 반대로, 이타심은 진짜 신앙이요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당신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는가?

 

 

 

6월 27일 연중 제13주일 : 루카 9,51-62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57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가르침을 베풀다가 사마리아인들에게 배척받으셨다.(루카 9,51-56) 이어서 당신을 따르겠다는 세 사람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엄격한 조건을 제시하셨다.(루카 9,57-62)

 

1) 예수님을 배척한 사마리아인들을 닮지 말자.
하느님이 예수님을 하늘로 들어 높이기로 계획하신 때가 차자, 예수님은 당신의 운명이 결정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작정하고 길을 떠나셨다. 무엇보다 먼저 사마리아로 들어가셨다. 사마리아는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인들이 이스라엘왕국을 정복한 뒤 그곳의 유다인들을 아시리아로, 아시리아인들이나 외국인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킨 곳이다.(2열왕 17,24-41)
사마리아인들은 이러한 정치적이고 사회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이교도들과 피를 섞고 그들의 우상숭배에 빠져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저버렸다. 그래서 유다에 사는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변절자로 멸시했다.(2열왕 17,30-31; 루카 17,18) 예수님 시대에도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에 사는 동포들에게 무시당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과 예루살렘에 대해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과 순례자들을 배척한 것 같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인들에게 내릴 불 심판을 하느님께 주문하자고 예수께 건의했다. 그러나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이 당신을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구원하러 오신 분임을 잊어버렸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배척에도 계속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제자들의 복음을 믿고 따랐다.(사도 8,4-25)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체조배나 피정이나 영적독서를 하거나 신심단체에 가입하거나 이웃을 사랑하여 전교를 하라고 하셨을 때 사마리아인들처럼 예수님을 배척하지는 않았는가? 그런데도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예수님의 제의를 받아들인 이유나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2)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9,57-62)
예수님은 당신이 굴을 가진 여우와 보금자리를 가진 새들과도 비교되지 않는 비참한 생활조건에 따라 사신다고 이르시며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열악한 생활조건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셨다. 또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보다 당신의 제자가 되어 하느님을 각자의 마음과 가정과 사회에 임금님으로 모시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이르셨다.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족관계보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작별인사를 할 여유를 달라는 사람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의 왕국에 적합하지 않다.”(루카 9,62) 이는 현재의 삶과 가정생활에 집착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류하는 태도를 상징한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모든 인간적 안정과 효도 의무와 가족관계보다 예수님의 생활양식과 운명에 참여하는 것을 더 중요한 일로 여기는 사람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예수님의 구원활동을 계속하는 것이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희망을 걸 수 있다.
부부관계, 가족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 동료관계, 이웃관계가 좋아야 구원을 간청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예수님과 관계를 끊으면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는 이기심 때문에 치명적인 결함을 입고 단절되어버리고 만다. 날마다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만이 관용과 사랑과 의리가 넘쳐흐르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처럼 인생의 성패여부는 예수님을 본받는 데 최선을 다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달려 있다.(박영식, 말씀의 등불 III, 주일복음 묵상·해설 〈다해〉 - 가톨릭신문사, 2010년, 273쪽)

 


* 박영식(야고보) 신부는 1976년 사제서품 후, 1978년 로마 유학, 1982년 로마 교황청직속 성서대학(Pontifical Biblical Institute)에서 석사학위(S.S.L.)를 취득, 1990년 같은 대학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받았습니다. 현재 복현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