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한 번 해보자니까요? 언제까지 이대로 놔둘 거예요? 분명한 기한을 정하고 그때까지만 받도록 해요.”
“신부님, 하지만 오는 청년들을 어떻게 막습니까? 기한은 정하되 오는 청년들은 계속 받도록 하지요.”
성령 강림 대축일 전야제 준비 위원회에서 일어난 논쟁입니다. 나는 올해부터는 등록 기한을 정하고 그 기한을 지켜 그 날짜까지만 등록을 받자는 것이 주된 요지였고, 이네들은 그 기한을 넘어 당일까지 등록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나로서는 당일까지 준비를 받아서 어떻게 참여인원 숫자를 파악할 것이며, 그에 소요되는 그 날 밤의 적지 않은 숫자의 간식과 물품들을 어떻게 준비할 것이냐 하는 것이 걱정이었고 무엇보다도 이 동네의 이런 ‘준비성 없는 행사 준비’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문화’에 무척이나 지쳐 있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날 회의 역시도 4시에 모이기로 약속을 하고선 5시가 넘어서야 사람들이 모두 참석을 했거든요. 축제 당일 간식을 준비해야 했던 아녜스 수녀님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네들 역시 단호했습니다. 이 동네의 문화와 현실로서는 청년들이 부모님들의 허락을 받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당일 밤 10시에 시작하는 행사에 미처 등록하진 못했지만 늦게라도 오는 청년들을 어떻게 내칠 수 있겠냐는 것이 그네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논쟁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나는 이어지는 다른 약속으로 인해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결국엔 이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습니다.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세요.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조금은 화가 나 있었습니다. 말이 늘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겪지 않던, 아니 겪을 이유가 없었던 일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에는 크게 복잡한 일도 없었고 상대도 그런 나에게 맞춰 쉽게 말하려 노력했기에 일처리는 참으로 단순했습니다. 하느냐 마느냐의 선택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휘가 늘고 말마디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 안에 가려진 미묘한 감정의 선들까지 일 안에 개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집에 와 있는데 이메일이 한 통 도착했습니다. 에스테파니라는 한 청년의 편지였습니다.
‘신부님, 약속을 잘 지키지도 않고 쉽게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 저희들이라 죄송해요. 하지만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 주세요.’
이 친구의 편지는 나를 미소 짓게 했고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두 번째 준비 회의, 모임장소에 나간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먼저 와 있었고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모임에 참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회의가 더 있었고 매번의 회의 때마다 나는 에스테파니가 청한 ‘인내심’을 갖고 웃으며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성령 강림 전야제는 큰 사고 없이 치뤄졌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날 그 자리에 함께하셨습니다.
 
서로의 의견 차이 속에 서로 논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마치 로봇처럼 버튼 하나로, 말마디 하나로 움직여지는 우리들이라면 싸울 일도 없고 감정의 미묘한 흐름을 느낄 필요도 없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렇게는 ‘사랑’할 수도 없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의 소중함을 느끼고 논쟁이 있기에 진정한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도 생겨나지 않을까요? 지독히 뜨거운 열과 압력 속에서 시커먼 석탄이 다이아몬드라는 보석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네 ‘사랑’도 수많은 논쟁과 다툼 속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7월, 방학이 되어도 아이들은 학원에 어른들은 직장에 매여 논쟁할 시간조차 없는 안타까운 우리네 가정, 조금이라도 짬을 내어 함께 휴가라도 떠나 많이들 다투어 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야 그만큼 사랑도 더 커질 테니까요.
“올해는 휴가를 어디로 갈까?”,“산이요!”, “바다요!”, “강이요!”
“그래…그럼 올해는 집에서 머물도록 하자꾸나.”
저희 집에서 있었던 작은 의견충돌이 떠올라 저를 미소 짓게 하는군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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