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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몬시뇰의 세상이야기
물따라 세월따라(17)


김영환(베네딕도) 몬시뇰

1950년대는 대학 입학이 5월 초하루였다. 3월도 아니고 9월도 아닌 5월 초하루였던 것은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모든 것을 미국식으로 바꾼다면서 학제도 4월 신학기에서 9월 신학기로 옮겼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보니, 우리 나라 기후 풍습 농사짓는 계절 등을 감안했을 때 신학기는 역시 봄으로 옮기는 것이 옳다고 판단되었다. 따라서 9월이던 신학기를 다시 4월로 옮긴다는 것은 반년이나 학제가 옮겨지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해서 정부에서 반씩 나누어서 옮기기로 했다.

 

그 해에는 5월 초하루에 신학기가 시작되고, 그 다음해부터 3월로 신학기가 옮겨지게 되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가 바로 1950년 5월 1일이었다. 당시는 대구에 신학교가 없었기 때문에(원래 대구에는 성유스티노 신학교가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 사람들이 신학교를 폐쇄했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서 성신대학(현 서울 가톨릭대학)에 입학했다.

 

신학교 정문에 들어서서 초인종을 눌렀더니 그때 총급장인 김수환(현 추기경) 학생이 나왔다. 김수환 학사님 역시 대구 사람이었기 때문에 집안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나를 보고 “신학교에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는데 반갑습니다.” 하면서 학장실로 인도했다. 그때 학장이 정규만 신부였다. 그는 로마에서 오랫동안 수학하고 신학박사로 귀국하게 된 석학 신부였다. 인사를 드리고 방 배정을 받고 그 날부터 신학생으로 살았다. 서울 혜화동에 있는 신학교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러나 그 곳이 내 생애의 전부가 바뀐 곳이다.

 

원래 동성중학교는 상업학교였다. 갑, 을조 두 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갑’조는 일반학생, ‘을’조는 신학생만(소신학교) 받았다. 그러던 것이 해방 전 1944년 신학생만 받던 ‘을’조도 ‘갑’조와 같이 일반 학생을 받았다. 그리고 해방 후 1945년부터 동성 중학교로 교명을 고쳤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 소신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워야 했었는데, 일반 중학교였기 때문에 라틴어를 전혀 배우지 못하고 대신학교에 그냥 들어오게 된 것이다. 라틴어는 신부가 되기 위한 필수 과목이었기 때문에 1년간 라틴어만 배우는 ‘별과’에 소속되었다.

 

지금은 헐리어졌지만 당시 신학교는 붉은 벽돌의 3층 건물이었다. 3층은 전부 침실이었고, 2층에는 성당, 교수 신부님들의 숙소, 기타 사무실이 있었고, 1층에는 현관, 다른 교실들과 식당, 응접실, 연학실 등이 있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생활해보니 새벽 다섯 시 반에 기상, 여섯 시에 묵상, 여섯 시 반부터 미사, 7시 반부터는 아침식사 그리고 잠깐 쉬고 8시 30분부터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업이라야 개인 레슨이니까 최 S신부님 방에 가서 그 전날 외운 것을 반복해서 복습하고 새로운 것을 또 배우는 것이 공부일과의 전부였다. 목요일에는 점심 후 모든 신학생들이 가까운 산에 의무적으로 산책을 갔었다. 돌아오는 길에 외식은 금했지만, 냉면 한 그릇 먹는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교수 신부들이었을 것이다.

 

밖에서 생활할 때는 밤 11시, 12시까지 놀든지, 모여서 지껄이든지, 공부를 하든지 했었다. 그러나 신학교에 와서는 강당같은 큰 침실에서 70, 80명이 같이 자니까 코 고는 사람, 이 가는 사람, 잠꼬대하는 사람, 이런 잠투세 하는 사람들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리고 신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살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잠을 잘 이루지 못하여 새벽 두세 시 쯤에나 잠이 들 때가 많았다. 그리고 아침 다섯 시 반에는 어김없이 일어나야 하니, 아침 먹고 수업을 한두 시간 하고 있으면 그야말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규칙도 모르고 졸리면 침실에 들어가서 실컷 잤다. 자다가 보면 점심시간이 되어 점심을 같이 먹기는 했지만 둘이서만 생활을 하니까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를 때가 많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침실을 나오면 취침시간 이외에는 침실에 들어갈 수 없는 규칙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졸리면 아침에도 자고, 점심 먹고 침실에서 또 자고, 그야말로 내 마음대로 했던 것이다. 규칙을 알고 난 후로는 잠을 못 잤다.

 

신학교에 들어와보니 세면실에 수도꼭지는 있는데 물이 나온 흔적이 없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난 후 운동장 저쪽 끝에 있는 샘에 가서 펌프질을 해서 물을 떠다가 세면실에 갖다 놓고 아침에 세수를 해야만 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모두 다 샘에 물 뜨러 갔다. 신학교 입학 때 지참물 중에 세숫대야를 가져오라는 말이 없어서 나는 그 준비를 못 했다. 그래서 학교세면실의 것을 아무거나 쓰라고 해서 보니 다 찌그러진 알루미늄 세숫대야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 덜 찌그러진 것을 골라서 물을 떠가지고 세면대에 갖다 놓았는데, 아침에 가보니 물이 한 방울도 없이 다 새버렸다. 그때 김희선이 좋은 세숫대야를 가지고 물을 길어다 놓고 썼었다. 나는 물을 떠놓아도 다 새버리니까 하는 수 없이 김 군의 물을 먼저 실례를 했다. 어느 날 아침, 김 군이 말했다.

 

“이상하다. 한 대야 가득 떠다 놓았는데 물이 반밖에 없거든.” 그래서 내가 “야, 내가 먼저 좀 썼다!” 했더니 “야, 교대로 물 떠오자. 너도 쓰니까!”라고 해서 “내가 그 생각을 못했구나!” 하고 둘이서 웃었다.

 

우리 침실은 3층인데 화장실은 집 밖에 있었다. 밤중에 화장실에 가는 것은 큰 고욕이었다. 3층에서 삐걱삐걱 계단을 내려가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가곤 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갔으니까 다 커서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그 당시 소신학생 한 반이 같이 살았는데 밤에 무서워서 화장실도 못 가고 참고 있다가 다른 애가 일어나면 살았다 싶어 동행을 하곤 했다. 그리고 아침마다 화장실은 늘 만원이었다. 안에 사람이 있는 데도 급했던지 확인도 않고 들어가다가 박치기를 하기도 했다.

 

겨울 난방은 방 안에 스토브 하나뿐이어서 동상에 걸리는 학생들도 숱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만주 추위에 이미 단련이 되어 있었고, 성가기숙사에 있을 때에도 워낙 춥게 지냈기 때문에 그런 대로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자위하면서도 엄한 신학교 규칙이 무섭기도 하고 행여 병이 나서 쫓겨나가면 어쩔까 하고 겁도 났다. 신학교 들어와서는 좋기도 하고 겁도 나고 기분이 ‘흐렸다, 갰다.’의 연속이다. 그러나 나는 행복했다. ‘신부가 되는데….’ 하고.

 

큰 방에서 많은 학생들과 함께 지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가 줄어든다. 그도 그럴 것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만 두는 학생도 있었고, 그만 두어야 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니 수가 줄어들밖에. 작은 방에는 부제들이 5, 6명 있었다.

 

그렇게 5월 1일 신학교에 입학하여 6월 중순도 지나서 어느 정도 신학교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여 친구도 생기고 서로 고향 얘기도 나누며, ‘신학교에 잘 들어왔다.’고 생각하며 행복해 할 즈음,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생겼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