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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7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박병규(요한보스코) 신부

7월 4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 마태10,17-22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나에게 해코지를 하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가꾸어온 내 삶의 울타리가 그들로 인해 망가질 것 같아서….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고 박해한다는 데 있다. 나는 그들 때문에 아파하고, 멍들고 그래서 힘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무엇 때문에 힘들고,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괴롭힐까? 아무 죄도 없는데 억울하게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아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
답은 간단하다. 복음 때문이다. 하늘나라에 대한 선포 때문에(10,6-7), 예수님에 대한 내 신앙의 증거(10,32)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힘겹게 한다. 내 것을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내 삶에 대한 집착이 나를 힘겹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 하고 싶은 것, 내 갖고 싶은 것,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세상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 전한다고, 예수님 믿는다고 대놓고 떠들어야 하는 내 신앙고백 때문에 세상에서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을 말하려면 내가 하느님과 일치되어야 하는데(10,20), 그리 쉬운 일만이 아니다. 내 삶의 굴레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한 채, 그저 내 가족, 내 건강, 내 성공에만 집착하며 하루하루 살아내기에 급급하다. 성당 다니는 이유만으로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 터. 내 말을 접고, 내 뜻을 굽혀서 하느님이 나를 통해 말씀하시고, 하느님이 나의 모습에서 밝히 드러나실 때 세상은 이런 나를 보고 놀라고 불편해 할 것이다.
사람들이 엉켜서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일 속에서 신앙인은 생각하면 할수록 더 기가 막힌 일을 해내고 있으니, 그것이 하느님을 세상에 내어놓는 것이다. 어떻게? 해답은 우리 각자에게 있을 것이다. 내가 조금 참는 희생에서, 내가 조금 겪는 미움에서(10,22) 하느님은 구원이라는 선물을 마련하실 게 틀림없다. 비록 그것이 가족을 거스를지라도, 비록 그것이 내 삶의 아까운 부분을 깨뜨릴지라도 하느님이 나를 귀하게 여겨 그분의 구원을 주신다는 데 무서울 게 어디 있겠는가?(10,30-31) 힘내서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살아내자. 달리 하느님의 영이 위로자로 불리겠는가!

 

 

 

7월 11일 연중 제15주일 : 루카 10,25-37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율법이라는 것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은 ‘하나됨’이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구약의 신명기계 신학은 이 율법이 가리키는 ‘하나’라는 말마디로 요약된다. 하느님도 하나요, 그 하느님을 모시는 백성도 하나여야 하며, 하느님과 백성이 하나 될 수 있는 거룩한 성전, 그것도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나타나 짐짓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는 율법교사, 그는 제대로 말했다. 율법은 원래 한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백성들 안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제대로 간파했다. 문제는 그런 율법을 살아내는 데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사제와 레위인의 명성을 무참하게 짓밟는 이야기다. 오히려 어떤 사마리아인, 곧 하느님 백성의 ‘하나’안에 들지 못했던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인, 그 사람의 사랑 안에 율법의 실천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것으로 예수님은 율법이 사랑의 실천이어야 함을 보여주셨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 공부해서 얻어질 턱이 없는 게다. 이 몸이 움직여야 이해할 수 있는 꽤나 수고스런 일이다.
원래 율법은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고 해서 정리되고 엮여졌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 후 경험한 그들의 초라함을 하느님에 대한 배신의 결과로 받아들이면서 이제 제발 제대로 하느님 가르침에 따라 살아보자며 다짐한 내용이 율법이었다.(느헤 8참조) 산다는 것 안에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책상머리에서 율법이 이러니저러니 떠드는 약삭빠른 지식인의 머리에서 율법은 죽어있는 것이다.
시장 골목에서, 공장 일터에서, 건설 현장에서 서로 어깨 토닥이고, 땀 닦아주며 서로의 삶을 보듬어줌으로 율법은 오늘도 내일도 늘 살아있는 생명이 된다. 그 생명은 두말 할 나위 없이 하느님 안에 숨 쉬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10,25)

 

 

 

7월 18일 연중 제16주일 : 루카 10,38-42
38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상이나 의식을 공유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우리 편, 네 편 하면서 각자가 주장하는 것들에 대한 당위성을 역설하기에 바쁘다. 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다양한 믿음의 길이 있음이 자명할 터인데, 이런 신심만이, 저런 신심만이 최고인 양 떠들어 대는 몰지각한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교회는 수많은 시간동안 다양한 시스템에서 다양한 신앙감을 가지고 살아왔고, 그 다양성이 곧 창조의 섭리(창세1-2 참조)임을 굳게 고백해 왔다. 다양성이 사라지면 파시즘이요, 그 파시즘이 인류 역사를 힘겹게 한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에서 이분법적인 구분은 불가하다. 마리아가 더 ‘좋은 몫’을 택했다 하여 마르타를 업수이 여긴다든지, 마르타의 분주함에 아랑곳 하지 않는 마리아를 얄밉게 여기는 단순한 흑백논리는 집어치우자. 다만, 다른 이의 태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탓을 돌리는 마르타의 옹졸함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도록 하자. 마리아와 마르타를 놓고 예수님은 저울질 하지 않으셨다. 누가 옳으니, 그르니 따지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타는 예수님더러 마리아와 비교해 달라며 재촉한다. 내 일이 더 급하니, 마리아가 함께 해야 한다며 자신만의 당위성에 예수님이 한 말씀 해달라며 떼를 쓴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자신이 맡은 일 안에서 예수님만 생각하면 그만이다. 이 일, 저 일, 그 많은 일들 중에 어떤 것이 더 가치 있고 더 훌륭하겠는가. 내가 좋아하고 내가 열심히 하는 그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몫이 아니겠는가! 비교해서 한줄 세우는 옹졸한 생각이 요즘 세상에 판을 치고 있으니,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가 이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우리의 목소리를 가다듬어 봄도 좋으리라.

 

 

 

7월 25일 연중 제17주일 : 루카 11,1-13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기도라는 것은 ‘청하는 일’이다. 문제는 무엇을 청하는가에 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그 청하는 일에 있어 무엇보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중요시 여긴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필요한 양식이며, 우리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들에 대한 용서가 언급된다.
주님의 기도를 굳이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관계’에 대한 소중함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소중함, 우리 서로 간에 형성되는 관계의 소중함 말이다. 이 관계는 나만을 생각하고 청하는 모든 기도를 볼썽사납게 만들어 버린다. 내 자식, 내 건강, 내 성공, 내 출세만을 위한 기도를 부끄럽게 만들어 버린다. 기도만 하면 나만을 위한 모든 것이 이루어질 듯 매달리는 철없는 기도들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
끊임없이 간청해야 하는 우리의 궁극적 이유는 성령을 받기 위해서이다.(11,13) 성령은 위로자라 했다. 우리의 아픔을 달래주고, 우리의 슬픔을 하느님 안에서 기쁨으로 바꾸어주실 분이 성령이시다. 그 성령은 타인지향적이다. 당신 안에만 머물러 계시는 분이 성령이 아니라, 너와 우리 안에 함께 머물고자 모든 이 위에 내리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찾아 나서고, 문을 두드리고, 애써 청하는 모든 이유는 이러한 성령을 내 안에 모시기 위해서다.
성령을 모시는 사람이 옹졸하게 자신 안에 갇혀있어서는 안될 말이다. 내 이웃을 보고, 내 사회를 보고, 내 세상을 한껏 품어낼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성령을 받은 이의 올바른 자세인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밤늦게 친구를 찾아가 떼를 쓰며 빵을 달라는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길을 나선 또 다른 친구를 위한 것임을 우리는 자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즘 우리가 읽는 신앙서적들 가운데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기도하게 만드는 편협한 사상을 담고 있는 책들이 많다. 무엇이든 빌면 이루어질 것이라며 우리 신앙인들을 현혹시킨다. 이런 책들은 라면냄비 받침하면 제격이다. 생선이든 달걀이든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11,13), 우리가 받을 것을 미리 챙겨서 달라 떼를 쓴다면, 어련히 알아서 좋은 것을 주실 하느님의 권한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겠는가? 믿고 내어 놓자. 있는 모습 그대로 하느님께 내어 맡기자. 하느님은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것이지, 내가 꿈꾸는 내일의 나를 사랑하시는 게 아니지 않는가!


* 박병규(요한보스코) 신부는 5대리구 청년담당 사목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