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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8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심탁(클레멘스) 신부

8월 1일 연중 제18주일 : 루카 12,13-21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1. 인생무상을 기억하라.
인생 그 자체는 무상하다. 어렵고 힘들게 배운 것이 죽음 앞에서 무슨 소용이며 가진 지식과 재주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모든 노력과 노고와 노심초사했던 모든 것들, 애간장을 태우며 잠 못 들고 근심하며 걱정했던 그 모든 것들이 무슨 보람이 있는가? 코헬렛의 저자로 알려진 솔로몬은 우리가 겨우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의 것들을 그 이상으로 다 해본 무소불위의 인물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현대의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인생무상이다.(코헬 1,2;2,21-23 참조) 그러므로 인생에서 오래 의미 있게 남는 것과 시간 안에서 지나가는 것을 구별하여 선택하며 효율적으로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2. 인생에서 본질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구별하라.
가. 재물은 인생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재물이 의미가 있으려면, 오직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복음에서 한 사내가 형제간에 재물을 나누도록 예수님을 중재자로 요청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비하면) 인생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이 요청은 자신의 현세적 만족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도구적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돈이 사람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도움이 될 뿐이다.’ 그러나 돈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많다. 

 

나. 존재와 소유 중에 무엇을 먼저 선택할 것인가?
당연히 존재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중의 많은 사람은 소유에 목숨을 걸지만, 그러다가 건강을 잃어 모든 것을 상실하거나 소유에 대한 노력이 본인의 과실이나 실패로 끝나거나 만들어진 주변상황 때문에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더 심하면 빚더미에 올라앉거나, 범죄자가 된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은 자살충동을 받는다. 정말 죽을 지경이다. 목숨을 걸 만한 소유란 어떤 것이며,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일의 성취나 명예를 위해서 목숨을 건 선택과 집중의 총력전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본은 놓치지 말자.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소유는 망가져도 존재는 결코 망가지지 않는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제법 많은 현대인들은 소유의 상실과 함께 존재 포기의 유혹을 받는다.

 

3. 평소에 근본가치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라. 가치 순서를 매겨 관리하라.
현세적인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더욱 영원한 것과 근원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선택하다보면, 저절로 하위 가치를 선택할 겨를이 없어지는 것이다. 부부사랑 안에서 다툼이 있거나 직장과 교회 안에 갈등이 있어도,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 사이의 구별을 하고, 영원한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4. 가치의 우선 순위(서열)를 찾는 방법을 배우자.(콜로 3,1-5)
첫째, ‘대전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라. 둘째, <실천과업>으로 천상적 가치를 추구하고 항상 생각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적 비전을 추구하라. 셋째, 이미 세상에서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라.(콜로 3,3 참조) 그리고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다고 확신하라. 넷째, 참 생명은 그리스도의 현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임을 믿어라. 다섯째, 현세적인 것들(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과 탐욕)을 죽일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갖고 살아가라. 이렇게 우리 안의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부유한 자가 되어라. 재산이 많은 부자도 그의 생명을 영원히 지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루카 12,15 참조)

 

 

 

8월 8일 연중 제19주일 : 루카 12,32-48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1. 스스로의 작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아버지께서 준비하고 약속하신 그 나라를 차지하라.
루카 12,32 너희 작은 양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가. 하느님의 현현-계시-위대하신 업적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사람들, 즈카르야(루카 1,13), 마리아(1,30;2,10), 시몬(5,10) 등에게 두려움의 관계를 원하시지 않는다. 당신의 자녀가 공포에 가까운 의미의 두려움을 갖는 것을 하느님께서 바라시지 않는다.(루카 8,50;12,5.7 참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무서워하거나 좋은 의미로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을 더 가까이 하고 싶어해야 하고, 사랑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되, 자신의 작음에 움츠리지 말아야 한다.오히려 그 작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영광을 드러내라.(2코린 12,9-10참조)


나. 주님의 작은 양떼라는 정체성을 기억하라.
첫째, 자기 정체성을 기억하라.
-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 요한복음에 따르면, 젖먹이 어린양(요한 21,15)과 성숙한 양(요한 21,16.17) 둘 다 베드로는 사랑으로 돌보아야 할 사명을 받았다.
- 작은 양떼는 사랑받는 존재를 일컫는다. 주님의 사랑이 먼저 제자들에게 주어진다.
둘째, 자신의 사명을 기억하라.
- 제자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양떼로서 받은 ‘사랑의 체험’과 ‘성령의 은혜’를 입으로 증언하고 행동으로 증거 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


다. 아버지께서 주기로 예정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라.
첫째, 주님의 약속을 믿어라.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세상의 걱정과 근심에서 해방되고, 확신에 찬 안정감 속에 인생을 살 줄 알아야 한다.
둘째, 완전한 비전인 ‘주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라. 주님의 나라를 믿거나 아는 단계에 머무르지 말고, 찾아가고 차지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 노력은 신앙의 믿음과 앎을 실천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
셋째,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그러기 위해 ‘가진 것을 다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2,33) 아브라함은 오직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늘 본향을 추구하였고, 가진 것 중에 가장 중요한 외아들을 바치려 했으나 무사히 돌려받았다.(히브 11,8-11 참조) 그 나머지도 축복으로 주어졌다.

 

2. 진정 행복한 인생을 원하는가? 깨어 있어라.
가. 주인 맞을 준비를 하며, 깨어 있어라.
루카 12,35-40 깨어 있어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 행복하여라. 사실 깨어있지 않으면, 인생의 즐거운 취미생활조차도 잘 할 수 없다.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일에 깨어, 온갖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고 있어야 최고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예) 카메라와 사진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기 최고의 작품을 위해 깨어있다. 골프를 치는 사람도 항상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TV도 그 채널을 주로 본다. 농부는 일조량과 강우량과 병충해와 잡초와 각종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깨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생업에 충실할 수 없다. 일용직 노동자는 몸 관리를 잘하고 이른 시간부터 깨어나서, 고용시장에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고 기다린다. 하물며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깨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깨어 있는 종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 주인을 만나기 때문이다.


나.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며, 기다려라.
막연한 기다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지치고 잠들게 한다. 주님의 주신 사명의 각 단계를 충실히 밟으며,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유리하다.(이사 8,17-18 ; 미카 7,7 ;시편 130;25,5;5,4;69,4 참조)

 

다. 주님의 오심에 집중하라.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며, 혹시라도 주님이 네 문밖에서 기다리시게 하지 마
라. ㄱ)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탈출의 그 밤을 잊을 수 없다.(제1독서 지혜 18,6-9 참조) 하느님께서 한 밤중에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며 ‘강한 손과 펼치신 팔’로 백성을 구하셨기 때문이다.(탈출 15장 참조) ㄴ) 반드시 깨어있어야 한다.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올 것이기 때문이다.(1베드 3,1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8월 15일 연중 제20주일, 성모 승천 대축일 : 루카 1,39-56
39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1. 마리아의 믿음의 차원을 배워라.
가. 마리아의 믿음은 삼위일체적이다.(루카 1,26-38) :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마리아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선택된 자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성부> :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1,28-29)
<성자> :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1,31-33)
<성령> :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1,35-36)


나. 마리아는 냉철한 이성, 전폭적인 믿음,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을 지닌 ‘종의 정체성’을 가졌다.
<이성> 루카 1,28 :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1,34 :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 루카 1,38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다. 마리아의 믿음은 죽음을 감수한다.
‘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신했다.’는 것은 상식의 틀을 벗어나며, 종교 사회적 법과 관습에 따르면, 죽음에 내몰리는 상황이다. 성령으로 인한 잉태를 받아들임은 곧 죽음을 각오한 믿음의 결단이다.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내어맡긴 비움이며 지극한 겸손이다.


라. 마리아는 겸손의 영성과 먼저 찾아감의 영성을 가졌다.
마리아는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먼저 찾아간다. 그리고 먼저 인사한다. 여기서 방문의 영성과 겸손의 영성을 기초로 한 적극적인 인간관계의 노력을 엿본다. 또한 유유상종이라. 태교의 기간 일부를 비슷한 영적 실존적 체험을 가진 사촌 자매와 공유한다.


마. 마리아는 방문과 인사말(존재와 언어)로 산모와 태아가 기뻐 뛰놀게 한다.
엘리사벳의 반응은 마리아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자, 엘리사벳 태 안의 아기가 뛰놀고,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깊은 내면에서부터 감탄과 찬양의 반응이 터져나온다. (무슨 인사를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 연구해보자.)


바. 마리아는 자신의 방문과 인사말로 천상적 행복을 드러내 보인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태중의 아기의 ‘축복’과 주님 말씀을 믿은 마리아의 ‘행복’을 확신하고 찬양을 한다. 마리아의 방문과 인사말이 축복과 행복에 대한 메아리로 되돌아온다. 필시 마리아도 축복과 행복을 비는 인사말을 하였을 것이다. 긍정의 힘이다. 사랑의 힘이다. 겸손의 힘이다. 존재와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영광스럽고 기쁘게 하니, 그 기쁨은 상대방의 내면과 주변을 기쁨으로 충만케 하고, 그것은 다시 더욱 충만해져서 나에게 되돌아온다. 


사. 상대방의 칭송에 대하여 마리아는 찬양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마리아는 주님의 업적에 대하여 기쁨으로 찬양하고 약자의 승리와 행복을 선언하며, 자비로우신 하느님 말씀의 효과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임을 선언한다. 그러나 자기자신은 비천한 종(루카 1,48)이라고 고백한다.


자.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석 달간의 공동생활로 서로 격려하고 태교를 돕는다.
하느님의 놀라운 이끄심에 대하여 서로 공감하며 연대성을 가지고 공동생활을 한다. 믿음과 기도 안에서 은혜를 서로 나누며 격려하고 힘을 북돋운다. 이 모든 것이 두 사람의 태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각자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주님의 날을 기다린다.

 

2. 마리아는 예수님의 출생(마태 1,18-25 ; 묵시 12,1-6 참조) 후, 십자가 죽음에까지 아드님을 동반하신다.
가. 예수님의 유아기 이집트 피난과 귀환(마태 2,1-23), 성전에 봉헌(루카 2,22-24)
나. 예수님의 유년기를 부모로서 돌보심(루카 2,40-52)
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키심, 주님의 사랑받던 제자의 집에 머무심(요한 19,25-27)

3. 사도들의 전통과 믿음에 따라 가톨릭교회는 마리아께서 지상에 육신을 묻지 않고 승천하셨다고 믿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구별하며,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불러올리셨다는 뜻을 담아 ‘몽소 승천’이라 부른다.(묵주의 기도, 영광의 신비 4-5단 참조)

 

 

 

8월 22일 연중 제21주일 : 루카 13,22-30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
그러면 지금은 비록 꼴찌일지라도 장차 첫째가 되리라. 유다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며(로마 9,4-5 참조), 선택된 민족으로서 조상대대로 하느님 계시의 전수자들이다.(신명 12,15 참조) 그러나 하느님(주인)의 초대에 제때에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이방인들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메시아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유다인들을 가장 먼저 하느님 나라에 초대하신다. 그러나 불응하거나 지체하다가 시간이 차서 (하느님 나라) 잔칫집 문이 닫히면, 더 이상 집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신다. 선민으로서의 특권은 언제까지나 유효하지 않다. 선민은 그리스도의 초대에 첫 번째로 응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더욱 낮아져야 하고, 더욱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자신을 작게 만들어야 한다. 더욱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며 갈수록 겸손해져야 한다.

 

2. 고난을 용감히 견뎌라.
하느님의 자녀는 시련을 이겨낼 줄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는 말한다.(12,7) :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뎌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 모든 훈육은 슬프도록 고통스럽다. 그러나 훈련을 마친 훈련된 이들에게는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가 맺어진다.(히브 12,11)
그러므로 맥 풀린 손,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 나가야 한다.(히브 12,12-13 ; 이사 35,3 ; 잠언 4,26) 그러면 오히려 주어진 약점이 보완되어,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되리라. 목표와 비전이 분명하고, 대화와 소통으로 동기를 부여하고, 열정과 추진력으로 내달리다 보면, 주어진 크고 작은 장애들은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도로 훈련된 군인이나 장인들의 멋진 모습을 상상해 보라.
   
3.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를 면하도록 힘써라.
하느님의 궁극적인 사랑은 세상 뭇 백성을 당신 영광 아래 모이게 하신다. 그러므로 선민 유다-이스라엘 백성도 당연히 포함된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된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사랑받는 이들이기 때문이며,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로마 11,28-29 참조) 게다가 십자가상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덕분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루카 23,34)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모으러 오시리라. 그들이 와서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표징을 세우리라. 살아남은 자들을 뭇 민족들과 먼 나라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 그러면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이사 66,18-21) 선민 유다인들의 잘못으로 구원의 문은 만민에게로 열렸다.(로마 11,11 참조) 이제는 선민과 이방인 모두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은 상태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은 은혜로이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사람이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세상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에 초대하는 복음화-선교 사명의 책임을 지고 있다.  마태 28,19-20 :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8월 29일 연중 제22주일 : 루카 14,1.7-14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1. 겸양지심으로 참 행복을 추구하라.
가. 초대받을 경우, 창피당하지 않게 처신하라. : 윗자리에 앉지 마라.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러면 창피 당하지 않으리라. [소극적 의미의 행복추구]


나. 초대할 경우, 최고의 행복을 선택하라. :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자를 부르지 마라.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러면 행복하리라.(그들이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적극적 의미의 행복추구]
히브 12,22-24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 예루살렘, 천사들의 축제집회와 하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심판자 하느님,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심, 그분께서 뿌리신 피가 있는 곳입니다.

 

2. 시대의 정신과 시대의 언어를 배우라.
제2독서 히브리서 12,18-24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1계약 시대를 넘어 그리스도의 새로운 제2계약 시대를 선포한다. 그리스도의 지상생애와 수난과 죽음과 부활언어는 새 시대를 여는 열쇠이다. 그러나 신구 계약 양자 간의 연속성이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내용은 그리스도의 새 계약의 정신을 담고 있다. 즉 시나이, 불, 어둠, 폭풍, 나팔, 시온, 예루살렘, 하늘에 기록된 모임, 심판, 정의, 계약 등의 이 모든 단어들이 계약의 백성의 영적 경험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언어를 구사한다.(탈출 19,16-10 ; 20,18.21 ; 신명 4,11)

 

3. 눈높이에 맞추어 선포하라.
우리 사제의 설교와 대화, 신자들의 복음화 선교 활동 등도 이런 문화적 공감대 형성과 눈높이 맞추기, 소통이 용이한 적절한 언어 구사 등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구약의 하느님은 백성과 거리감이 있었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인간과 매우 친밀하다. 친밀한 언어와 감각으로 접근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도구적 존재로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시나이 시대에 하느님은 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백성은 두려워 그 소리를 듣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자녀의 효심(충성심)을 발견하고(로마 8,15-16 참조),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탈출 19,4 참조) 

 

4. 매순간을 복음 선포의 기회로 삼아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어느 바리사이 집에 식사하러 가신다. 예수님은 이런 모든 기회를, 축제일이나 평일이나 할 것 없이 복음의 본질을 가르치는 기회로 삼으신다. 루카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식사하시는 대목이 많이 등장하는데, 바리사이 시몬의 집(7,36),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10,38), 어떤 바리사이 집(11,37), 자캐오의 집(19장), 파스카 식사장소(22장)에서 나타난다. 예수님 별명이 먹보 혹은 술꾼(루카 7,34)이 될 정도다. 오늘 복음도 어느 바리사이 집에서 식사 때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예수님 시대의 축제는 항상 장엄한 식사와 연관되어있고, 천지창조와 이집트 탈출 기억이 주된 내용이다. 축제는 항상 지금 여기의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탈출의 의미를 기대한다.)
<의문점> 유다인들의 규칙에 따르면 안식일에 식사초대와 응대가 가능한가? 안식일에 바리사이 집에 초대받으셔서(루카 14,1) 예수님은 수종병자를 치유하신다. 이것은 안식일의 휴식규정을 어긴 것이다.(14,2-6 참조)


5. 바리사이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구별하라.
바리사이 운동은 기원전 135년 그리스 통치 시대에 ‘분리된 자’ 혹은 ‘선택된 자(거룩한 자)’라는 뜻을 가진 자들의 종교적 회개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첫째 일체의 정치적 타협을 거부하고, 둘째 종교적 규칙을 끝까지 지킨다는 신념이 이 운동의 주된 내용이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들의 열정과 용기는 식지 않았다. 헤로데 대왕(기원전 39-4년) 시절에 그들 중 6천명이 로마와 헤로데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종교적 전통(지극히 긍정적 의미에서)을 지켰다. 전통은 조상들로부터 받은 유산이었다. 전통은 조상들이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지 세밀한 일상생활까지 연구하여 세운 규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스스로 비판할 여지가 없었다. 기원 후 70년(로마군의 예루살렘 초토화) 후에 바리사이들의 동의가 이루어져 자기 비판적인 기록이 나타나는데, 예수님의 비판과 맥락이 같다.
예수님이 바리사이 운동 자체를 비난하신 적은 없다. 그 운동 자체로 매우 훌륭한 것이다. 단지 최고의 종교적 이상(ideal)이 갖는 이른바 ‘차별주의’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 태도에서는 분별의식(conscience)만 고도로 발달하고, 행동은 미처 뒤따르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그 최고의 이상에 뒤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위험이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체도 위험하지만, 그 식별 기준이 애매할 뿐 아니라, 그 속에는 하느님의 계획의 본질인 사랑이 빠져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이다.

 


* 심탁(클레멘스) 신부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사제로 사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