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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연중 제23주일 : 루카 14,25-33 :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14,25-32 : 예수님은 군중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가족이나 자기 목숨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이르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에 가족관계가 장애가 되면 그것을 포기하고 순교도 마다하지 않으며 예수께 무조건 충성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기심뿐만 아니라 자신을 다 버려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는 탑을 세우기 전에 소요경비를 미리 계산하거나 자기보다 더 강한 임금과 전쟁을 할 것인지 평화협정을 맺을 것인지 미리 따져보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요컨대 제자들은 미리 가족을 버리거나 순교까지 각오하지 않고 섣불리 제자직분을 맡았다가는, 계획된 공사를 끝내지 못하는 건축가와 승산이 없는 전쟁을 하는 어리석은 임금이 웃음거리가 되듯, 심판을 받게 된다. 전적으로 투신하고 비장한 결심을 세워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공할 수 있다.
가족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는 경우는, 가족들이 반대해도 가정기도를 함께 바치거나 불우한 이웃을 돕고, 가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고, 가족이기주의를 버리는 것들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제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이는 전교하는 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실망 가운데 희망을 심는 일, 불의 가운데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또한 세계평화,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공동체와 국제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기도하고 제 힘이 닿는 대로 노력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것들인가?
14,33 :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소유물을 다 포기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재물에 집착하면 예수께 대한 믿음과 제자직분을 저버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야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희생한 데 대한 대가로 천상의 보화, 즉 구원과 영생을 누리게 된다.
권력과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고 대의명분이나 진, 선, 미, 사랑을 위해 모든 이해타산을 버려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사랑은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이타적인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1티모 1,5; 1베드 1,22) 권력과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면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뿐만 아니라 하느님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재산은 잃어버려도 다시 모으면 되기 때문에 손실이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인격이나 명성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손실이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훌륭한 인격이 목적이다. 우리는 훌륭한 인격자가 되어 영원히 행복해지려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9월 12일 연중 제24주일 : 루카 15,1-10 : 되찾은 양과 되찾은 은전의 비유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15,1-3 :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티나에서 세리들과 죄인들은 하느님을 무시하고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기피인물이었고 경멸의 대상이었다. 구약성경에도 죄인들과 상종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있다.(신명 21,20-21; 이사 52,11; 잠언 1,15; 2,11-15; 4,14-17; 23,20-21)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결함이 많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사람들을 기피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인간적 감정을 극복하고 그들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한 분이어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규정을 어기고 그들의 친구가 되셨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을 당신 가까이 오게 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다. 예수님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양(루카 15,4-7),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은전의 비유(루카 15,8-10)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응수하셨다.
15,4-7 : 목자들은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을 때까지 광야를 헤맨다. 그 양을 다시 찾아내면 기뻐 어찌 할 줄을 모르고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기뻐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러한 목자의 모습에서 끊임없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에게 자비와 애정을 베푸시는 착한 목자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떠오른다.(에제 18,23; 34,11-12.16; 시편 23,1-3; 요한 10,11-12) 예수님은 하느님처럼 세리들과 죄인들을 ‘잃어버린 양’과 같이 여겨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착한 목자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이 얼마나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는지 강조하셨다. 하느님은 죄인들을 회개하기 이전부터 사랑하여 그들에게 회개할 힘을 주고 회개하면 기쁨에 겨워하신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애써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15,8-10 : 예수님은 당신이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식사하시는지 다시 설명하셨다. 어떤 부인이 은전 한 닢을 잃어버리자 등불을 켜서 온 집안을 쓸고 샅샅이 뒤져 그것을 찾으면 너무나 기쁜 나머지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기뻐해 달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는 하느님이 얼마나 죄인들의 회개를 기꺼워하시는지 강조한다.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이 지상에서뿐 아니라 천상에서도 하느님과 천사들이 기뻐하실 근거가 된다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지상과 천상에서 거행되는 기쁨의 잔치를 위해 죄인들을 하느님께인도해야 한다.
행복해지고 기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회개하여 좋은 습관과 훌륭한 성격과 덕을 닦는 것이다. 좋은 습관들이 모여 훌륭한 성격이 형성되고 덕이 쌓인다. 회개는 악습을 버리고 좋은 습관과 훌륭한 인격을 갖추는 것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말씀, 속담, 격언, 명언을 들으면 회개할 마음이 생기고 악습을 버리고 좋은 성격을 연마하고 덕을 닦을 수 있다. 집착과 강박과 급한 성질을 빨리 버리고 성실, 온화, 헌신,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을 가져야 행복해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처럼 성품에 결함이 없고 덕이 있어야 행복해지고 기뻐할 수 있다. 행복이나 기쁨은 열정의 극치에 있지 않고 균형과 조화와 질서에 있기 때문이다.(토마스 머튼)
좋은 성격에다 덕을 닦아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 혼자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지 않고 하느님도 기쁘게 해드리고 만나는 사람들까지 모두 행복하게 한다. 남을 기쁘게 하는 것만큼 자기도 기뻐하게 된다. 나를 통해서 기뻐하게 된 사람들이 나를 기쁘게 해주는 법이다. 그런데도 남을 행복하게 하려 애쓰지 않고 자기의 이기적인 기쁨에 혈안이 되는 사람은 불행을 자초한다.
9월 19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루카 9,23-26 : 십자가의 길과 영광의 길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기심이나 자기중심주의는 사랑할 기본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진짜 무신론이요 지옥이다. 자기사랑은 죽음의 시초이며, 하느님과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은 생명의 시작이다.(톨스토이)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사람이 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요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여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라고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 그러기 위해 자기를 부정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며, 당신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이르셨다. 자기부정은 이기심에 빠진 자아를 포기하여 예수님을 닮고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 필요하다. 또한 이기심뿐만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인품을 본받고,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에 반대나 박해의 표적이 되어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는 순교자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여 예수님을 닮는 사람은 자기의 존재이유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보내 세상종말의 구원과 행복을 미리 누리게 하신다. 구원은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여 하느님의 현존 속에 사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육체적 생명을 아끼는 사람은 부귀영화를 인생의 목표로 추구하고 예수님을 닮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자아를 상실하고 만다. 실존적인 상실감에 빠지면 정신병을 앓고 사람구실을 하지 못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자기를 부정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믿고 따른 이들이다. 그분들이 순교하게 된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그들의 순교배경은 사상적인 것,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사상적인 배경으로는 조선은 오로지 유교의 주자학만을 정통 학문으로 인정하고 불교, 양명학(陽明學), 서학(西學), 동학(東學)들을 사악한 가치 체계로 여겨 서학인 천주교를 박해했다. 사회적 배경으로는 조선은 유교의 사회 체제, 즉 장유유서, 남녀유별, 상하 위계질서로 지탱되었다. 가장인 아버지가 가족을 대표하고 가부장적 권위로 가정의 질서를 통제했다.
가문의 영속성을 중요하게 여겨 죽은 조상을 신처럼 섬기고 제사를 바치는 것을 당연한 효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만민평등과 남녀동등권을 가르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한 천주교는 당대 사회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정치적 배경으로는 조선 정치인들이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으로 이루어진 당파싸움에 몰두했고 서구의 열강들이 천주교를 통해 조선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 정권을 잡은 노론들은 반대파벌인 남인에 속한 사람들이 천주교와 관련되는 것을 단죄하고 천주교를 박해했다.
성 김대건과 성 정하상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대 시대적인 여건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다. 성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조부 택현 안드레아와 아버지 제준 이냐시오는 순교한 분들이다. 하느님 때문에 패가망신한 집안이다. 또한 성 김대건 순교자를 사제로 만들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 보낸 성 정하상의 아버지 정약종(첫 조선 천주교 회장)과 형 철상은 정조대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듬해(1801년) 집권 노론이 정조대왕 때 성장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신유박해 때 함께 사형당했다. 이때 성 정하상의 나이 만 여섯 살이었다.
그의 백부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 가고 사촌 매형 황사영은 충북 제천 배론으로 피신했다가 능지처참되어 온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간 성 정하상의 고모부 이승훈이 전해준 천주교 믿음 때문이었다. 성 정하상이 어른이 되자 앵베르 주교는 그를 조선의 첫 사제로 만들기 위해 신학을 가르쳤으나 기해박해가 발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성 정하상과 어머니와 여동생은 함께 순교했다.
우리는 순교하거나 가정파탄을 겪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복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천주교 믿음을 파괴하는 원수는 황금만능주의라 하겠다.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 가운데서 하느님을 택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재물을 선용해야 한다. 이기심과 물욕과 가족이기주의를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위해 순교정신을 실천해야 하겠다.
9월 26일 연중 제26주일 :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16,19-21 :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느 부자와 라자로이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판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 반대로, 라자로는 종기투성이 몸으로 대문 밖에 내팽개쳐져 부잣집에서 내버리는 음식 찌꺼기로라도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버둥대며 들개들이 자기 종기를 핥는 것을 뿌리치지도 못한 비참한 거지이다.
16,22-23 : 라자로는 죽자마자 즉시 성조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의인들이 받는 천상의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승에서 불쌍한 거지였던 라자로의 운명은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근본적으로 뒤바뀌어 성조 아브라함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승에서 불쌍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즐기기만 했던 부자는 화염이 이글거리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지옥 문 앞에는 “여기서부터 희망이 없음”이라는 팻말이 적혀 있단다. 그 이유는 부자가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부정직하게 번 돈으로도 친구들을 만들어 도움을 받도록 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루카 16,9)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16,24-26 : 부자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염치도 없이 성조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시켜 지옥의 화염 때문에 타들어가는 자기 혀 위에 물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리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저승의 상황은 이승의 삶으로 결정되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돌이킬 수 없다. 부자는 이승에서 가난한 라자로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에 지옥에서 영원히 하느님의 보호와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16,27-31 : 부자는 라자로를 소생시켜 자기의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재물을 선용하여 죽은 뒤에 자기처럼 되지 않고 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졸랐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의 회개를 보장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럴 필요 없이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명한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면 충분하다.(신명 14,28-29; 이사 3, 14-15; 예레 5,26-28; 에제 18,12-18; 아모 2,6-8) 위 성경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이의 기적적인 소생을 목격한다 하더라도 회개하지 않는다. 부자의 형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라자로가 죽은 이들의 세계에서 환생하는 표징을 본다 하더라도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그분을 떠났기 때문에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아도 그 뜻을 깨달을 수 없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이유는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재물의 노예가 되어 그분의 말씀에 무디어졌기 때문이다. 내세가 있음을 믿어야 라자로가 소생하여 전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믿음이 있으면 소생기적을 보지 못해도 말씀만 들어도 회개할 수 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은 기적을 보아도 풀리지 않고 죽은 이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들여야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일상사에서 그분의 뜻을 찾아낼 수 있다.
내세가 있음을 머리로는 인정해도 마음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현세의 삶을 탐닉하는 데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도 현세생활과 재물에 집착한 나머지 하느님의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 부자처럼 내세신앙도 무시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가난한 이를 돕는 사람만이 영생을 얻는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쓰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가족들과 자신을 위해서는 재물을 아낌없이 쓰지만 불우한 이웃에게는 인색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치셨다. 자기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 사람은 고인 물처럼 썩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 박영식(야고보) 신부는 1976년 사제서품 후, 1978년 로마 유학, 1982년 로마 교황청직속 성서대학(Pontifical Biblical Institute)에서 석사학위(S.S.L.)를 취득, 1990년 같은 대학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받았습니다. 현재 복현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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