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신부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우리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실까? 얼마 전 《침묵》을 읽어 보라고 권해 받았을 때, 잠시 당황스럽고 망설였다. 배교한 신부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 또한 신앙이 깊지 않고 그저 미사만 보러 다니는 신자에 가까웠기에 더욱 그랬다. 신부님이 어떤 분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며, 오직 인간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고스란히 자신의 희생을 봉헌하고자 다시 태어난 분들이 아니던가. 순교하신 성인 신부님 이야기도 아니고, 배교하였다니…. 처음에 배교라는 단어조차 어색하게 들렸지만, 호기심에 책을 펼쳤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주교 금교령에 의해 천주교를 박해한 17세기, 일본에 처음으로 가톨릭이 전파된 지역인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학적 재능과 용기를 가진 존경 받는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 선교 활동 중 배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 신부인 가르페, 호르페, 로드리고는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 선교를 계획한다.
험난한 항해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 젊은 세 신부는 그 곳에서 때론 비굴해 보이는 교활한 눈빛의 기치지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고, 열병을 앓는 호르페 신부를 남겨 둔 채, 미덥지 않은 기치지로에게 일본에서의 안내를 타협하고 일본에 도착하게 된다. 도모기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한 가르페, 로드리고 신부는 산 속 오두막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페레이라 신부의 소식을 알아내고자 한다. 하지만 일본 관리들의 탄압으로 그들을 지켜 준 가난한 농민 모키치와 이치조의 죽음을 보게 된다. 자신들 때문에 신자들을 다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르페와 로드리고 신부는 헤어지게 되고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기치지로의 밀고로 일본 관리들에게 잡히게 되면서 배교를 강요하는 이노우에의 영악한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자신들 때문에 차가운 바다 속으로 던져진 아무런 죄 없는 이들의 구원을 간절히 외쳐 보지만 하느님께 아무런 응답을 듣지 못했고, 동료 가르페 신부의 죽음이 자기가 알고 있던 성스러운 순교의 모습이 아님에 더욱 가슴 아파 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지킬 것인가? 아님 배교를 하고도 자신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을 구원할 것인가? 이 둘을 다 지켜야 하는 것이 성직자로서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나 역시 하느님만이 답을 해 주시고 고통 받는 신자들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하지만 침묵으로 일관하는 하느님이 얼마나 로드리고 신부는 원망스러웠을까?
일본 관리의 탄압 때문에 성화를 밟아야 할지 묻는 신자들에게 로드리고 신부는 “밟아라.”라고 하였다. 하느님을 원망해서가 아니라 고통 받고 가난한 신자들을 구원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과 신자들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며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를 드린다. 난 로드리고 신부가 배교하지 않기를 바랐다. 페레이라 신부처럼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일본인도 될 수 없고 배교한 이방인 신부로 불리며 애써 슬픔과 고독을 가린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로드리고 신부는 확신하였을 것이다. 모든 것은 안전하며 하느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을. 하지만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은 침묵하셨다.
‘주님 당신은 왜 잠자코 계십니까? 당신은 왜 언제나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까?’ 로드리고 신부는 자기 때문에 고통 받는 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사랑했고 아름답고 성스럽다고 여겼던 그분의 얼굴에 발을 올려놓게 된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로드리고 신부에게 배교했다는 말을 쓰고 싶지 않다. 나약하지만 비굴하고 배교를 서슴지 않으며, 유다와 같은 인물인 기치지로를 향해 로드리고 신부는 말했다. ‘이제 괜찮다, 괜찮아. 나는 이제 노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도 노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자신이 지켜 온 것을 포기하고 죽어가는 신자들을 구원한 모습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인간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로드리고 신부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다른 이가 말한다 하더라도 극한 상황에서 신부는 자신의 희생을 봉헌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아름다운 순교가 아니라 할지라도 로드리고 신부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지킬 줄 아는 분이라 여겨진다.
내게 《침묵》은 소설 이상이었다. 나에게 신앙에 대한 반성과 주님에 대한 믿음을 새로이 확인시켜주는 빛이었다. 로드리고 신부의 고뇌를 보고 함께 가슴 아파하며, 함께 하느님께 구원의 기도를 간절히 드리고 있는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로드리고 신부의 내 이웃에 대한 사랑실천에 안타깝고도 기뻐하였다면, 나에게 가장 큰 전율과 함께 감동을 준 것은 로드리고 신부가 마지막에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주님,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랬다. 지금까지 주님은 불쌍한 농민들, 가난한 순교자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로드리고 신부의 기도에 눈물을 흘리고 계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모른 체 하시지 않으신다. 언제나.
언젠가 주님의 모습을 담은 짧은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길을 가던 한 사람이 돌에 맞아 소리치며 하늘을 향해 원망하고 뒤돌아보았을 때 그의 뒤에는 주님께서 팔을 벌리시고 그에게 날아오는 커다란 돌덩이들을 고스란히 맞고 계셨다. “미안하구나, 작은 돌멩이 하나가 튀었구나.”
하느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항상 우리의 곁에서 말없이 침묵하고 계시며, 함께 기뻐하시고, 함께 아파하시고, 위로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어루만져 주시며 한 없이 한 없이 자비로운 사랑을 주신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속삭이신다. “너희들을 사랑한다!”
* 이은주 유스티나 님은 큰딸(초등 2학년), 작은딸(5세)이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조금 더 열심히 성당에 다니게 된 주부라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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