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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10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박병규(요한 보스코) 신부

10월 3일 연중 제27주일 : 루카 17,5-10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믿음을 더해 달라. 우리가 흔히 내뱉는 말이다. 우리가 나약해서 무너지고 아파하고 그래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데 있다고 우린 자주 되뇐다. 그래서 수없이 성체 앞에 앉아도 보고, 묵주를 쥐어도 보고, 이런 저런 신심활동에 기대어 보기도 한다.

루카복음 저자의 믿음에 대한 고민은 우리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사도들의 입을 빌려 믿음의 부족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 루카복음의 저자는 믿음의 많고 적음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믿음이 부족한 이유를 어디에서 찾고 있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린 오늘 복음 이전에 루카복음 저자가 하는 말들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17장 1절에서 3절까지 보면, 남에게 죄를 짓게 하는 일에 조심하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처신을 잘하라는 말이다. 죄는 루카복음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자신의 죄도 모자라서 이웃의 죄를 부추기는 일은 하느님 나라에로 세상 모든 이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삶과는 아주 정반대의 짓거리임에 틀림없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면서 이웃과의 어울림 안에 살아가야 할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죄에 대한 강한 질타이다. 이웃이 죄를 지으면 꾸짖어야 한다. 죄의 길에는 결코 타협과 인내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17,4)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하며, 잘못된 것은 그르다고 용기 있게 말해야 한다. 나쁜 것을 보고 꾸짖지 못한다면 우린 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벙어리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죄로 떨어질 나약성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회개의 길은 늘 필요한 길이고, 회개의 길에는 서로 서로가 보듬어주고 격려하는 용서의 행위가 요구된다. 내가 잘나서 용서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족하니 서로가 도와서 하느님 나라로 함께 걸어가기 위해 용서하는 것이다. 

믿음의 이야기를 다루는 오늘 복음 앞에 펼쳐진 루카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실천의 문제를 언급한다. 믿음이라는 것이 실제 삶 안에서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이웃 안에서 서로가 죄짓지 않도록 늘 깨어있는 실제 삶의 긴장감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믿음의 양은 겨자씨 하나로 족하다. 믿음이 부족하다 하여 기도에 매진하는 일과 신심활동에 전념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을 온전히 우리네 삶 안에 살아내는 일이다.
믿음은 마음의 평화나 정신의 고요함을 위해 갖춰야 할 도덕적인 덕목이 아니다. 하루하루 힘겨운 일을 도맡아 하는 종의 일상과 그리 다를 바 없는 것이 믿음이다. 종은 주인을 시중드는 일을 마다하고 주인과 똑같이 먹고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도 주인을 섬기기 위해 또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종의 본분이다. 믿음은 그래서 힘겹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어 도무지 쉴 틈이 없이 움직이는 것이 믿음의 길이다. 그 길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로 들어가는 길이고, 그 길이 진정한 신앙인의 길이다. 믿음이 적다고 성당에 앉아있기 보다 우리 이웃의, 우리 사회의 잘못과 어두움을 걷어낼 수 있는 작은 실천 하나가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우리이길 기도한다.

 

 

 

10월 10일 연중 제28주일 : 루카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나병환자들이 막아선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건강이었다. 사실, 유다사회는 병든 이들을 죄인취급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울타리에서 그들을 저만치 밀쳐놓고 있었다. 병이라는 게 깨끗하지 못하고 정결치 못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그리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와 함께 말이다.
나병환자들의 건강에 대한 간절한 요구 앞에 예수께서는 별다른 치유의 행위를 보여주지 않으신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자신들의 몸을 보여주라 이르신다. 명확하고 가시적인 치유의 행위 없이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사제에게 발길을 돌리는 나병환자들에게서 믿음을 발견하는 것은 어쩌면 합당할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어떤 권능을 행사하고 계시는지 나병환자들은 똑똑히 보았고 들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간절함이 배어져 있었다.

사제에게 가는 중에 나병은 나았다. 나병환자들은 이제 더 이상 환자가 아니었고, 더 이상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건강을 원했고, 그 건강을 얻어 누리게 된 나병환자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사’에 대한 이야기다. 건강해진 나병 환자 중에 단 한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
이 감사는 무엇보다 하느님께 향해 있다. 병이 나은 후 예수께 돌아온 그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느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이러한 감사의 행위를 구원이라는 말마디로 바꾸어 놓으신 것뿐이다. 나병환자가 건강해진 것은 하느님께서 이 인간 세상에 보여주신 구원의 징표이고, 자비의 또 다른 이름임을 예수께서는 돌아온 나병환자를 통해 확인해 주신 것이다.

구원은 단순히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일방적 선물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 안에 형성되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구원의 길을 위한 첫걸음이 된다. 예수님 앞에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세상살이 중에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살펴보는 것이다. 감사하는 때에 구원의 시간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법이다.

 

 

 

10월 17일 연중 제29주일 : 루카 18,1-8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각자의 십자가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십자가를 내려놓으며 그분의 도움을 절실히 애원하기도 한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과부의 모습은 이런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무언가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재판관을 찾아가 줄곧 애원한다. 과부의 애원은 ‘올바른 판결’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끈질긴 애원이 불의한 재판관을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정의로운 재판관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은 ‘정의로운 판결’에 있다. 과부는 자신에게 이로운, 혹은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원한 게 아니었다. 자신과 적대자 사이에 객관적이고 합당한 올바른 판결을 원했다.
예수님 앞에서 기도하는 이는 어떤 경우에든 정의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져야 한다. 정의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정의로우신 분 앞에서 나만의 이익이나 바람만을 애원하면서 너와 우리의 이로움과 올바름을 잊어버린다면 우린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넋두리를 고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우리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는 것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선택된 이’들의 목소리 때문이다. 선택된 이들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들이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제 삶 안에 구현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모습에서 불의는 찾아볼 수는 없을 테고, 오히려 불의에 맞서는 처절한 아픔과 희생이 가득할 것이다.

하느님은 늘 준비하고 계신다. 정의를 외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자 늘 준비하고 계신다. 다만 불의를 보고서도 눈감아 버리는 우리의 게으름 탓에 하느님의 판결은 늘 더디게만 느껴질 뿐이다.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 루카 18,9-14

9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는 바리사이의 모습을 보자. 그에겐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는 나름의 자신감이 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홀로’ 표현된다. 그 표현이라는 게 대부분 남과의 ‘비교’로 이루어진다. 강도짓 하는 사람들,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 그리고 간음하는 이와 세리 같은 이들. 이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죄인들이다. 굳이 비교를 해도 자신보다 못하다 여기는 죄인들을 골라놓았다. 바리사이는 어떻게든 꼿꼿이 서 있으려 한다. 남들보다 나은 곳에, 남들보다 의롭다며 혼자서 판단하는 그 곳에 말이다.

세리를 보자. 그는 일단 멀찍이 서 있다. 누군가와 비교할 자세는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로부터 떨어질 태세다. 부끄러워서 그렇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눈도 못 들고 자신의 지난 일들에 후회스러워서인지 가슴을 치는 것으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한다. 세리는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부르고 하느님의 자비만을 간구한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죄인의 자리에 세리는 굳이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낸다. 바리사이가 짓밟고 올라서려 했던 그 죄인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세리, 그에겐 하느님께 온전히 향해있는 절대적 의존이 느껴진다.  

의로움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게 아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스스로를 의롭지 않다 여기는 자기겸손의 모습 안에 의로움은 주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선물을 받으려면 나를 비워내는 작업이 무엇보다 필요하리라. 비워낸 자리에 하느님이 거하시며 나를 의롭게 하도록 나를 맡겨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세상이 의롭지 못하다 한탄하며 세상을 나의 기준대로 판단하고 심판하는 요즘, 나는 얼마만큼 나의 고집과 아집을 비워내고 있는지, 나는 얼마만큼 하느님의 자리를 내 안에 만들어가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10월 31일 연중 제31주일 : 루카 19,1-10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어떻게든 보려 위로 ‘올라간다.’ 그런 자캐오를 보고 예수님은 얼른 ‘내려오라.’ 하신다. 오르려 드는 자캐오와 내려오라 재촉하시는 예수님, 상반된 두 움직임이 서로가 서로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살짝 불안해지기도 한다.

자캐오는 예수께서 당신의 집에 드시어 계실 때 거침없이 이런 말을 내뱉는다. 자신이 가진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단다. 사람들이 다 보게끔 ‘일어서서’ 자신의 결단을 과감히 드러낸다. 그런 자캐오에게 예수님은 커다란 선물을 주시는데, 바로 구원이다. 그런데 구원이 ‘내렸다’라고 예수님께서는 표현하신다. 자캐오는 일어서서, 곧 위를 향하여 자신의 결단을 드러냈고, 그 위로 향하는 자캐오의 몸짓에 예수님은 구원을 내려주심으로 응답하신다. 오르고 내리고, 상반된 두 움직임이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강한 애정의 표현 같아 마음 한곳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예수께 대한 오름의 표현은 자캐오만의 것이었다. 군중에 가려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자 어떻게든 그분을 보려하는 자캐오만의 몸부림이 오름의 움직임이었다. 그런 자캐오에게 다가서는 예수님은 내림의 행보를 보여주신다. 이 내림은 자캐오를 만나려는 예수님의 부르심이었고 그에게 구원을 주려는 예수님의 배려였다. 이 둘의 만남이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으로 부각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만남 안에 또 다른 이들이 존재한다. 바로 가난한 이들이다. 예수님을 만나려 했던 자캐오와 그에게 구원을 주셨던 예수님 사이에는 가난한 이들이 존재했고, 그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체적 실천이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을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나게 했다.
예수님을 만나려 오늘도 분주한 우리. 우린 누구를 만나고 있고, 누구를 그리워하고 있는가. 나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버려두는 사람,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가난하다 일컫고 있는 사람, 그들을 우리는 만나고 있는가? 그들 덕택에 우리도 구원을 얻어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자.


* 그동안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에서 좋은 묵상 글을 써주신 박병규(요한보스코, 구암성당 보좌) 신부님은 이번 호로 집필을 끝맺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