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군인주일 아침, 고령성당(주임 : 김용민 안드레아 신부) 소속 박곡공소를 찾았다. 오전 9시 10분, 김호우(안드레아) 회장과 부인 이은희(카타리나) 자매는 각각 제대 차리기와 제대 앞 꽃단장에 여념이 없고, 고해성사를 위해 줄을 선 신자들, 묵주기도를 바치는 신자들로 공소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고해성사 후 류영환(사도요한) 신학생의 5분 교리가 이어지고 오전 10시 박병기(베네딕토) 신부의 주례로 미사가 봉헌되었다. 진심이 담긴 신자들의 성가는 우렁차고, 신학생의 강론과 함께 하는 박곡공소의 미사는 경건하고 찬란해보였다.
김호우 회장은 “매월 셋째주 토요일 김용민 주임 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해 주시고 나머지 주일에는 작년 11월부터 박병기 신부님께서 미사를 드려주신다.”며 “1999년 6월부터 미사를 드려주셨던 이창호(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선종하신 뒤로 공소예절로 다시 드리게 되었는데 그때 미사에 참례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은총인지,우리 공소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소박하지만 끈끈한 정이 흐르는 공동체 박곡공소는 대부분 70대 이상의 어르신과 60대 부부, 50대 부부 3팀이 속해있다. 한때 공소피정, 성지순례, 세계성체대회 참가, 공소 교리반 개설, 레지오 마리애 회합, 청년회, 공소 아동교리를 실시하는 등 150명이 넘는 신자가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현재는 25-30명의 신자들이 공소를 지키고 있다. 아버지 전병조(바오로) 회장에 이어 30년 동안 공소의 일을 돌본 전성배(바르나바) 전임 회장은 “취업과 교육을 위해 하나 둘 떠나고 지금은 젊은이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신자 수가 많았던 때는 준본당의 승격을 꿈꾸기도 했었다.”며 “참으로 안타깝지만 선조가 물려준 신앙만큼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고, 또 지금 회장을 맡고 있는 김 회장 같이 젊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여 언젠가는 예전의 영화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김호우 회장은 “이 주변 일대의 주민들이 모두 신자인데 쉬는 교우들”이라며 “그분들만 다시 돌아오면 우리 공소도 지금의 정체기를 벗어나 예전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되든 안 되든 이제부터는 쉬는 교우를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 힘쓸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쇠퇴한 공소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것도 많다는 이은희 자매는 “젊은 사람들은 어르신들을 어머니, 아버지로, 어르신들은 우리를 딸과 아들로 생각하며 가족과 같은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다.”고 전했다.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주님만 믿고 살았다.”는 박곡공소의 최고령, 86세의 말다 할머니는 “처음엔 공소가 없어 성주본당, 화원본당으로 나가야 했지만 힘든 줄 모르고 다녔다.”면서 “지금은 몸도 불편하고 많이 걸을 수 없어 아들이 데려다주지 못하면 미사에 올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럴 때면 저금통에 주일 봉헌금을 넣었고, 그렇게 모은 봉헌금은 성당에 가져갔다.”고 덧붙였다. 아들 김점환(프란치스코)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신앙을 지켜봐 왔고, 그 덕분에 저 또한 신앙을 갖게 되었을 정도로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신앙생활의 본보기를 보여주셨다.”면서 “어머니가 성당에, 공소에 가실 수 있도록 모셔다 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호우 공소 회장은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직장생활하는 사람이 20년 동안 빠지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며 “자녀 교육 잘 시킨 말다 할머니도 대단하시고, 효자인 아들도 대견하다.”고 말했다.
소박하지만 가족과 같은 끈끈한 정을 나누며 신앙 안에서 은혜로운 시간을 보내는 박곡공소 신자들은 ‘서로 사랑하여라.’는 성경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향기가 머무르도록 애쓰고 있다.

박곡공소는...1951년 고령군 성산면 박곡리에 거주하던 이평석 부부가 누이의 권유로 성주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이웃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권유하며 공소예절을 시작하게 된 것이 박곡공소의 유래이다.
1953년 12월 8일 성주성당의 왕 에그너(레기날도) 신부의 집전으로 미사와 판공성사를 거행하였고, 이평석(베드로) 형제가 초대 공소 회장을 맡았다. 1955년 봄, 성산면 박곡리 소재의 장터고개 부근에 위치한 정미소 옆집을 임대하여 공소로 개조하고‘박곡공소’라고 명했다. 그해 4월 9일 성주성당의 왕 에그너 신부를 모셔와 8명이 세례를 받았고 12월 4일에는 5명이 더 세례를 받을 정도로 1년에 5-10명 정도 세례성사를 받았다.
1957년 화재로 공소가 소실되자 김옥이(베로니카) 집에서 임시집회를 하고 공소신축을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공소민들의 기도로 1959년 6월 3일 이태화(시몬) 소유의 밭을 무상으로 임대받아 회당 1칸과 방 1칸이 있는 건평 약 15평의 공소를 신축했다. 공사비는 정묵덕(엘벨도) 신부 50만 원, 대구신자 김요셉 30만 원, 전병조(바오로) 2대 회장이 전답 200평을 봉헌하여 마련했다. 새공소의 축성식은 정묵덕 신부의 집전으로 거행되었고, 많은 신자들이 참석했다.
1985년 2월 15일 현재의 400평 공소가 많은 은인들과 공소 신자들의 열정으로 건립되어 그해 9월 22일 새공소 및 부속건물 축성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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