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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11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심탁(클레멘스) 신부

11월 7일 연중 제32주일 : 루카 20,27-38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1. 사두가이파를 파악하라.
가. 구약에 나타난 사두가이의 뿌리
사두가이의 어원은 ‘차독’(새번역)이다. ‘의롭다’, ‘공평하다’는 뜻이다. 차독은 아론의 아들 엘르아자르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아히툽의 아들이며, 아히마스의 아버지(2사무 8,17;1역대 6,8;24,3)이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기간에 활동한 두 사람의 대사제들(아비아달과 차독) 중의 한 사람이다.(2사무 19,11)
차독은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레위인과 함께 주님의 궤를 메고 다윗을 뒤따르던 충신이다. 그는 다윗의 명령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윗의 연락책이 되어 내부의 정보를 제공하였다.(2사무 15,24-29) 차독은 다윗이 늙었을 때 제4왕자 아도니아가 왕위 찬탈을 시도하자,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와 예언자 나탄과 함께 솔로몬을 왕으로 등극시키는 공로를 세운다.(1열왕 1,39)
솔로몬의 등극 후, 차독은 가장 유력한 대사제직을 수행한다.(1열왕 2,26-27) 이로써 사무엘의 예언(1사무 2,35)이 성취되어, 차독 가문(엘아자르의 계열)이 아비아달(엘리 계열)의 사제직분을 이어가게 된다. 바빌로니아 유배 중, 차독 가문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성전의 사제직 수행이 예언된다.(에제 40,48; 1역대 16,39; 1열왕 1,8; 스바 7,2; 에제 44,15) 유배 후 성전이 재건(기원전 515년)되고, 예루살렘은 성전을 중심으로 사회 발전을 하면서 차독 가문의 세력은 더욱 커져간다. 차독가문은 마카베오 시대까지 대사제직을 독점한다.
기원전 152년 하스모니아 가문의 요나탄이 왕권과 대사제직을 겸직한다. 이에 예루살렘의 고급 제관들과 평신도 유지들이 ‘사두가이’당을 조직하여 정치적으로 하스모니아 왕가에 동조한다. 그들은 보수적, 현세적 종교색채와 친그리스적 정치성향을 띤다.


나. 신약의 사두가이파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파는 종교 권력인 대사제직을 차지하고, 로마 제국에 동조하며 기득권을 누리는 귀족 계급이다. 주요 활동 기간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멸망까지다. 사두가이파는 성문화된 모세오경에 없는 ‘부활신앙’을 배격한다. 부활신앙은 ‘묵시문학’ 사조(이사 26,19; 에제 37)와 함께 기원전 2세기경 이스라엘에서 생겨난다.(다니 12,1-3; 2마카 7,9-36; 12,41-46; 14,46) 사두가이들은 천사의 존재도 거부하고(사도 23,8), 하느님의 예정도 부정한다. 이런 면에서 바리사이들(=부활신앙과 천사존재와 하느님 예정설을 수용 : 사도 23,6-10과 미슈나 산헤드린
10,2)과 대립된다.(엠마오 편집부, 인명지명사전, 엠마오 ;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124 참조)

 

2. 사제직과 왕직의 기득권화와 권력화를 반성하라.
가. 예언직을 우선적으로 실천하라.
첫째,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는 예언직을 일차적으로 수행하신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일으키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시며, 당신을 따라나서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당신에 관한 말씀을 선포하는 제자로 삼으신다. 사제직에 대해서도 왕직에 대해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예언직)을 통해서 배운다.
둘째, 구약시대의 제도적 사제직은 정치권력과 매우 가까우며, 또 하나의 종교권력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 ‘예언직을 수행하기’ 위해 위의 권력들을 이용하시지 않는다.
셋째, 흔히 정치제도의 왕직은 막강한 권력과 힘을 행사하므로, 국가와 백성을 위해 중요한 반면, 그 유혹과 위험이 매우 크다. 나약한 인간의 권력과 욕심이 합쳐지면 공공의 이익과 공동선을 위한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국가와 백성이 모두 큰 위기에 처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왕직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 - 예언직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왕직도 사제직도 바르게 설 수 없다. 


나. 말씀 안에서 부활을 믿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먼저 말씀을 통하여 부활신앙을 가진다. 그리고 부활신앙을 증거한다. 즉 예언직을 통해서 사제직과 왕직을 발전시켜 나간다.(참조. 루카 20,35-38)
로마 10,8-9 :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 사두가이적인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라! 영원한 생명의 상상력을 발휘하라!
각자 현재의 틀(패러다임)을 과감히 깨야 한다.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비전을 본받아야 한다. 자신이 믿는 대로만 보인다. 현대판 사두가이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갇혀 있다. 첫째,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둘째, 내가 아는 그 이상의 것 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셋째, 초월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직 보이고 들리는 것, 검증되는 것, 감각적인 것 등만 부분적으로 받아들인다.

넷째, 보이지 않는 근본을 깨닫지 못하고, 돈이나 권력에 집착한다.
생사가 달린 경쟁과 어려움이 많은 현대사회에서도 창의적이며 도전적인 기업들은 종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속도와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오히려 주도하고 선도하면서 성공하고 성장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통째로 바꾸고 버리며, 새 세상의 도래를 대비하며, 새로운 동력을 선점하기 때문이다.
새 시대에 새롭게 활력을 띠고 떠오르는 ‘이머징 신앙(Emerging Faith)’을 원하는가? 더 이상 과거의 기존 신앙으로는 하느님을 믿고 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근본과 본질에 입각한 ‘신앙’이 아니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차라리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이 그랬던 것처럼!

 

 

 

11월 14일 연중 제33주일 : 루카 21,5-19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1. 위기 상황의 본질을 찾아라.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라.
가. 우선 현재의 위기 상황을 인식하라.
예루살렘 성전은 주님의 현존의 상징이다. 그러나 예루살렘도 성전도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면 존재 의미가 없다. 그래서 멸망을 겪게 된다. 우리가 현대의 성전을 장엄하게 축복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선행을 실천하며 살지만, 주님의 현존과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항상 긴장감 있게 깨어 있어야 한다. 방심하는 사이 쓰러지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말라 3,19-20ㄱ)


나. 신앙의 외적 현상들에 온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성전은 인간의 거룩한 정성과 봉헌으로 건축 기술을 동원하여 하느님 현존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드러낸다. 위대한 건축기술과 건축미가 핵심은 아니다. 성전과 관련된 보다 중요한 의미는 ‘하느님 현존’과 ‘창조사업과 구원 활동’을 기억하고 현재화하며, 지금 여기에 그 구원행위를 거행하는 것이다. 성전의 외적인 활동에 치우치다보면, 자칫 신앙의 본질을 모른 채 세월이 갈 수 있다. 신자생활을 한 지 오래되었으나 영적 성장이 없는, 나이만 먹은 영적 유아들이 있다. 이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위기나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세속의 잣대로 투쟁하거나 남 탓을 하거나 냉담하기 쉽다.(루카 21,5-6)


다. 신앙의 본질인 ‘하느님의 현존과 영과 말씀’의 활동을 회복하라.
하느님은 ‘당신의 현존’으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다. 하느님은 현존으로부터 당신의 영과 말씀으로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구원을 베푸신다.(창세 1,1-3 참조) 하느님의 현존을 펼치시는 말씀과 영의 활동으로 인간은 위기와 고통의 인생에서 생명력을 회복한다. 인간은 그렇게 죽음을 초월하는 부활 신앙으로 나아가며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 성장해 간다.

 

2. 종말론적 심판의 시점과 양상은 주님께 여쭈어라.
가. 그 ‘때(시간)’와 그 ‘표징(양상)’은 하느님께서 정하신다.
알고 싶으면 오직 하느님께만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많은 부분은 이미 성경의 하느님의 말씀 안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 안에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를 알아채고 ‘표징’을 깨닫는 방법들이 소개되어 있다. 즉 개인과 국가뿐 아니라 국제정세 안에서 하느님의 ‘때와 표징’이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예고되고, 실행되어 온 예들이 얼마든지 제시되어 있다. 단적으로 ‘말씀 경청’에 그 비결이 모두 들어있다. 특히 수많은 예언자들과 하느님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때와 표징들을 알려주었다. 다만 백성들이 듣지 않았다.노아의 홍수를 생각해 보라.
종말론적 상황은 항상 현재에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항상 현재에 깨어 있어야 한다. 또 현실을 종말론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의 질을 높이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우선적 가치를 선택할 수 있게 돕는다.


나. 위기에 대하여 일상(日常)의 도(道) 안에서부터 관리를 시작하라.
바오로 사도는 사도적 모범을 제시한다. 바오로 사도는 민폐를 끼치지 않고 자기 밥벌이를 하면서 복음을 선포하였다.(2테살 3,7-12)


3. 주의 사항을 숙지하고, 모든 위기에 대비하라.
남을 속이는 것도 잘못이지만, 게으름으로 인한 무지 때문에 남에게 속는 것도 잘못이다.
가. 아무에게도 속지 말라.
첫째, 자신에게 속지말라. 스스로 피상적 신앙생활과 내면화되지 못한 활동주의에 빠지지 말라. 마리아와 달리, 마르타의 분주함이 낳는 불평과 스트레스를 기억하라.(루카 10,38-42 참조)

둘째, 남에게 속지 마라. 무지해서 속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니며, 착한 것도 아니다. 잘 속는 자는 자신과 공동체에 크게 해를 끼친다. 자기 탓 없는 무지를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지’가 훌륭한 것은 전혀 아니다. 공무수행자나 전문가가 직무상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몰라서 당하는 사기나 손해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무지를 핑계로 삼지 말라. 그것 또한 자신과 공동체의 발전을 저해하는 무책임한 자세이다. 그러므로 항상 배우고 새롭게 자신을 가꾸어라. 자신의 성장을 추구하라. 개인의 경쟁력이 공동체의 경쟁력이며, 공동체 성장의 동력이다.


나. 사이비의 ‘카리스마적 매력’에 빠지지 마라.
사이비 카리스마로부터 진짜 그리스도를 식별하라. 정치나 경제, 종교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카리스마 있는 리더들이 활동한다. 획기적인 메시아적 구원자의 흉내를 내고,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한다. 그들을 우리는 현실 정치에서 자주 만난다. 훌륭한 리더가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지향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도 있다. 현실의 정치 행태에서 우리는 많은 실망을 경험했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무지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유명세나 사이비 카리스마에 현혹당한다. 결국 자신과 세상을 더 큰 위기로 몰아간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에 대한 무지는 사이비를 자초하며, 결국 그것을 뒤따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 소문과 위협을 무서워하지 마라.
사이비 종교 집단들은 주로 나약한 사람들에게 삶의 위협적 내용을 들이대며, 공포심을 조장하고 냉정한 판단을 흐리게 하여 자신의 종교에 입문시킨다.(그렇게 보험가입을 유도하는 보험사들도 있다.) 공포심으로는 참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없다. 중요한 복음적 기준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요한 8,32 참조)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11월 21일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 루카 23,35-43

35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1. 죄인의 작은 호소도 ‘크게’ 들으시고 ‘즉각’ 응답하시는 예수님께 간청하라.
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신다.
백성들은 서서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이때 지도자들은 빈정거리고 조롱한다. <첫째 빈정거림> -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 <둘째 빈정거림> -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23,36 명령문) 예수님 옆의 죄수 하나도 모독한다. <셋째 빈정거림> -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23,39 명령문)
위의 세 가지 빈정거림으로 조롱과 모독의 말을 들으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 억울함에 대한 호소도 변명이나 꾸짖음도 없다. 전혀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지도 않는다. 그러나 단 한 번,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도 오직 진정성을 가지고 구원을 요청하는 자에게는 즉각 응답을 하신다. 그의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신 채…. <넷째, 진정한 구원기도> -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0-41)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 <다섯째, 예수님의 반응> - 다른 죄수의 태도와 기도는 예수님의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낸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3) 위의 사실로 볼 때, ‘예수님의 왕직’은 하느님과 백성을 위한 참된 봉사직임이 드러난다.
구약의 다윗이 남북 유다-이스라엘의 통일 왕이 될 때, 그의 사명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당신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다. ‘남과 북의 백성 전체를 안전하고 공평하게 잘 다스리는 봉사직’이었다.
 
2. 예수님의 반응을 얻어낸 죄수의 성공적인 기도를 분석하고 적용하라.
첫째,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라. :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23,40),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23,41) - 자신의 죄를 인식한다. 기본적인 삶의 인과관계(상선벌악)를 받아들인다. 정직하고 겸손한 처신을 한다.


둘째,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23,40) - 죄인이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죄 / 죄인들의 불의한 연대성을 과감히 깨고 나선다. 이는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용기(경외)로 나서는 것이다.


셋째, 예수님의 존재와 행적을 파악하라. :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23,41) - 그는 죄인이면서도 다행히 예수님의 존재와 행적을 알고 있다. 죽어야 할 죄인이라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깨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죄인들을 대할수록, 예수님의 존재와 행적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길을 잃은 채 죽어가는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신 주님께 적극 협조하는 것이다. 그 구원의 힘이 바로 나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 


넷째, 예수님의 나라(=하느님의 나라)의 비전을 가져라. :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23,41) -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순간에, 이 죄인은 앞으로 무엇이 펼쳐질지 안다. 비록 죄인으로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라를 (초보적으로라도) 알고 받아들인다.


다섯째, 예수님의 기억(=구원)을 요청하라. :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23,42) - 죄인일수록 하느님 나라의 주인께 자신을 의탁하라. 그리고 주님이 나를 기억하시도록 강력하게 매달려라.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만물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평화를 이룩하신 분이시다. 그분 안에 모든 충만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죄인)과 환경의 조건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님 앞에 나설 수 있고, 감히 도움과 구원을 청할 수 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라. 예수님의 존재와 사명을 알고 그분께 구원의 요청을 하라. 나 자신과 우리가 위기에 처할수록,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을 받는 기도법을 익혀두라.
 
3. 항상 ‘오늘’이 구원의 찰나임을 잊지 말라!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가. 예수님은 죄인의 과거 행적과 죄질 등에는 관심이 없다. 주님은 당신을 찾아오는 죄인의 자격지심과 염치 등의 문제를 제기하신 적이 없다. 


나. 오직 예수님의 관심사와 코드에 맞추어 기도할 때, 구원의 약속을 얻는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 안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부터!

 

 

 

11월 28일 대림 제1주일 : 마태 24,37-44

37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대림절을 맞는 가장 이상적인 자세는 ‘현재(제2독서)’를 출발점으로 해서 ‘미래지향적(제1독서)’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복음)’을 지향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재림을 궁극적으로 지향하라.(복음)
가. 종말론적 긴장감을 가져라.(마태 24,37-39)
<사람의 아들의 재림>에 대비하라. 세상의 일상에 빠져 무지한 상태로 머물지 마라. 종말론적 긴장감을 가지고 살라. 일상의 무지는 일상의 도와 매우 다르다. ‘일상의 도’란 ‘종말론적 깨어있음’을 평상시에 실천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나. 주님의 선택을 받도록 힘써라.(마태 24,40-41)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을 동반한다. 그때 옥석이 가려진다. 양과 염소로, 밀과 가라지로, 의인과 악인으로 나뉘어 주님의 선택을 받는다. 특히 주의할 점은 선택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다. 내가 이 세상에 올 때, 내 마음대로 오지 않았다. 저 세상으로 갈 때도 내 마음대로 갈 수 없다. 특히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선택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내 생명에 목숨이 붙어있을 동안, 얼마나 주님의 뜻이 일치하고 순종하는지 여부에 따라 주님과의 코드가 맞을 것이다. 그러면 언제라도 주님의 선택을 받으리라.
 

다. 훌륭한 ‘종의 정신’으로 주인을 기다리며 깨어 있어라.(마태 24,42)
주인이 오시는 때를 모른다. 그러므로 무조건 총력을 다해 대비하라. 때를 결정하시는 분은 주인이시다. 예를 들어, 사장을 모시는 운전기사를 보자. 그는 사장을 조종하지 않는다.  기사는 사장이 가자는 어느 때라도, 사장이 가자는 어느 곳으로도 가야 한다. 더구나 사장이 원하는 속도로 무조건 안전하게 모셔야 한다.

 

라. 집을 지키는 ‘주인의 정신’으로 도둑을 막으며 깨어 있어라.(마태 24,43)
도둑의 침투 시간을 알면, 깨어 있을 수 있다. 방어를 할 수 있다. 주인은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도 건다. 경우에 따라서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의 재산을 내어주고 목숨을 구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가능하다면 도둑과 강도를 이기고자 한다. ‘주인 정신’은 적어도 불충한 종이 주인집을 지켜주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람의 아들의 재림을 준비하라.(마태 24,44)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 못한 시간에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어라. 그러므로 일상생활이 비상 재림을 대비하는 태도여야 가능하다. 필요한 긴장감을 가지고 대비해야 한다. 건강을 예로 들면, 평소에 운동과 섭생으로 몸 관리를 하지 않고 갑자기 몸짱이 된다거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이 되지 않는다.

 

 

2. 현재를 출발점으로하여 희망을 간직하고 미래를 지향하라.
가. 현재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아라.(제2독서) : 하느님은 항상 현재이시다. 피조물에게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시간과 공간이 현재이며 지금의 여기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현재의 지금 여기’의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신앙은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참신앙의 출발점이며, 치유의 핵심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로마 13,11)


나. 하느님께서 다스림 안에 머무르며, 고통의 밤에 낮을 희망하라. : 천지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시고 밤과 낮을 조화롭게 하신다. 창조된 피조물의 세계에서 만나는 모든 밤은 반드시 낮을 맞이한다. 힘써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새로운 낮을 맞이하라.(로마 13,12-14)


다. 미래지향적인 삶을 설계하고 지향하라. : 이사야의 예언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준다. 그 미래는 낙관적이며 긍정적이다. 이사야 2장(제1이사야 1-39장, 대체로 기원전 8세기 북 이스라엘 멸망 전)의 유다와 이스라엘은 경제적인 부를 누리는 반면에 정치와 사회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위기의 시대를 맞이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초기에는 주로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차차 주님의 현존과 심판에 대하여 선포한다. 제1독서(이사 2,1-5)는 하느님의 현존을 강조하면서 미래 지향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새 세상을 선포한다. 언제나처럼 불의와 위협이 상존함에도 불구하고….


심탁(클레멘스) 신부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사제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 그동안 주일복음묵상을 집필해 주신 심탁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