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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2월,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는 양 수산나(영국 이름은 수지 영거, Susie Younger) 여사의 한국오심 50주년을 기념하는 감사미사와 축하식을 대구대교구 차원에서 거행하면서 그동안의 공로에 감사를 드렸다. 이번 달 <만나고 싶었습니다>에서는 파라다이스재단에서 시상하는 ‘2010 파라다이스상 시상식’에서 사회복지부문 파라다이스상을 수상하고 대구, 경북지역과 대구대교구 사회복지사업의 초석을 다지는데 크게 공헌한 이들 가운데 한 분이신 양 수산나 여사를 자택에서 만나뵈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정치, 경제학을 전공한 양 수산나 여사가 한국땅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59년의 일. 5주간의 항해 끝에 한국에 도착한 날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라고 기억하는 양 수산나 여사는 오스트리아인 하 마리아 씨와 함께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서정길(요한, 7대 교구장) 대주교의 초청으로 입국하였다. 입국 당시 그녀의 나이는 만 스물셋이었다.
세상 끝변까지 선교하고픈 열망을 품고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가난한 나라 한국땅을 찾아온 양 수산나 여사. 그녀의 한국행은 스코틀랜드의 전통있는 귀족출신으로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예를 뒤로 한 채 오직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었다. 대구에 도착하여 효성여자대학교에서 영어와 불어를 가르치면서 경북대학교에도 출강하여 영어를 가르치던 양 수산나 여사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하 마리아 여사와 함께 서정길 대주교를 찾아뵙고 “대학에 강의를 나가면서 작은 집을 하나 얻어 고아원에서 뛰쳐나와 거리를 헤매는 불쌍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어린 남자아이들을 데리고와서 그 아이들을 보살피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며 살고 싶다.”고 간청을 드렸다.
교구장으로부터 흔쾌히 승낙을 얻은 양 수산나 여사는 16 명의 남자 아이들과 함께 삼덕동에 방 세 칸짜리 한옥을 얻어 살았던 그 때 일을 즐겁게 기억했다. “방 한 칸에 8명씩 두 방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붙어 잠을 자고 하 마리아와 나 그리고 한국인 이 모니카 씨가 또 한 방에 같이 살았다.”면서 “아이들의 빨래는 강가로 들고 나가서 빨래방망이를 두드려가며 빨고 헹궈내곤 했다.”고 옛일을 떠올렸다. 그렇게 아이들과 살고 있을 무렵 “군인도지사가 우리 한옥집을 두어 차례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기억하는 양 수산나 여사는 “그 도지사가 서 대주교님을 찾아가서 ‘두 서양 여자가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사람취급하며 정성껏 보살피는 것을 보니 나라의 복지사업을 가톨릭에 맡겼으면 한다.’고 제안한 말을 들었다.”고 했다. 당시 교구장 역시 그 제안을 받아들여 남자아이들을 위한 쉼터는 하 마리아 여사가 맡도록 명했고 여자아이들을 위한 쉼터는 양 수산나 여사가 맡도록 명을 내렸다. 그렇게 시작된 가톨릭여자기술학원(1962)이 현재 가톨릭푸름터의 전신으로, 양 수산나 여사는 그 곳의 초대 원장을 지냈다.
한국으로 오기 전 한국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는 양 수산나 여사는 6.25전쟁에 스코틀랜드의 젊은 군인들도 많이 참전하였었는데 그 대열에 사촌오빠 두 명과 외삼촌도 함께 하였다면서, 전쟁에서 돌아온 외삼촌으로부터 “수지야,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지만 너무 추워.”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이들 가운데 아버지, 어머니의 역할도 컸다는 양 수산나 여사는 “아버지는 신자는 아니셨지만 늘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하게 여기셨고 지위에 상관없이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강조하시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애쓰셨던 분”이라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영국 노동당 국회의원과 외무부차관을 지냈다. 비신자 가정에서 자란 그녀가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무렵으로, 도서관에서 우연히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책을 읽은 뒤 처음으로 성경을 펼쳐 읽으면서부터였다. 아직도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는 양 수산나 여사는 “오전 10시 30분 마태복음을 읽기 시작하여 마르코, 루카, 요한복음까지 온종일 쉬지 않고, 천천히 읽어내려갔는데 그 순간의 강렬한 인상을 결코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 비로소 가톨릭에 입교하였다.
대학졸업후 런던으로 온 양 수 산나 여사는 1년 동안 사회사업관련 공부를 하여 자격증을 취득한 뒤 1년동안 직장생활을 하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선교에 관심있는 젊은이 10여 명과 매주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갖던 그녀에게 프랑스에서 열리는 여름캠프에 참석할 기회가 주어졌다. 캠프에서 한국 유학생으로부터‘한국천주교회사’에 관한 내용의 특강을 들은 양 수산나 여사는 “숱한 박해를 거치면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또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린 한국 순교성인들의 모습이 감동적이었고, 사제 없이도 신자들 스스로 모여서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키워가는 모습, 신학공부를 하여 첫 사제가 배출되기까지의 과정 등 한국천주교회사 특강을 듣는 내내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국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말했다. 이 일은 양 수산나 여사의 한국행을 결정짓는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에 살면서 기쁨도 보람도 참 많았다는 양 수산나 여사는 “예전에는 영국에 가기만 하면 한국을 도와달라고 후원금을 받아오곤 했었는데, 이제는 한국인들에게 아프리카와 남미, 그외 다른 가난한 나라를 도와달라고 청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며 활짝 웃었다. 아프리카 요아킴 주교와의 만남은 양 수산나 여사가 프랑스 루르드 국제협조자양성센터에서 일할 때 요아킴 주교로부터 가톨릭사회학 강의를 들은 것이 인연이 되어 돕게 되었던 것. 그런 인연으로 양 수산나 여사는 같은 뜻을 지닌 신녕성당 이정우(알베르토) 신부를 도와 여러 후원인들과 함께 아프리카의 부룬디 무잉가 교구를 돕는데 가교역할을 해 오고 있다. 또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영어회화를 지도하며 그 자녀들과는 성극을 준비하여 자신의 집에서 공연을 하는 등 은퇴 후 일상의 즐거움을 이웃과 나누며 살고 있다.
이제는 앞에 나서서 활동하기 보다는 다른 이들의 일을 격려해주며 살아야 할 때라고 말하는 양 수산나 여사는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도, 하느님 때문에 홀로 사는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 앞에서는 똑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며 “사람을 위한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자신이 받은 그 사랑을 남을 위해 실천할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한국으로 건너와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의 편에서 봉사하며 순명의 삶을 살고 있는 양 수산나 여사는 “개인적으로 지난해는 제가 한국에 들어온 지 50주년을 맞이한 해였고 또 2011년은 대구대교구가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인데, 50주년이든 100주년이든 이는 참으로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라며 “이 시간들은 감사의 기회이고 회개의 기회이며 계획을 세우는 기회이자 하느님 은총의 시기”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100주년을 맞이하는 대구대교구가 교구의 여러 장점들을 잘 펼쳐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양 수산나 여사는 대구대교구의 사회복지사업을 교구의 자랑으로 손꼽았다. “어느 교구보다 앞서가고 있는 대구대교구의 사회복 지사업이 앞으로도 계속 잘 유지되고 발전되길 바란다.”는 양 수산나 여사는 “참으로 하느님께 감사하고 한국에 감사하고 대구대교구에 감사하다.”고 전했다. 사회복지사업에 헌신한 공로로 양 수산나 여사는 지난 10월 19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있었던 ‘2010 파라다이스상 시상식’에서 사회복지부문 파라다이스상을 수상하였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 사회복지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기에 양 수산나 여사는 한국땅을 선택하여 가장 불쌍하고 가진 것 없는 어린 아이들을 위해 살아왔다. 그리고 온전히 평등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살리는 일에 투신하며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일이 하느님 사랑안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끝내 겸손해 했다. 한국 음식으로 된장찌개와 비지찌개를 좋아한다는 양 수산나 여사의 앞날이 더욱 행복하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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