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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대림 제2주일 : 마태 3,1-12
김동진(제멜로) 신부, 칠곡성당 보좌
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마태 3,1-12 : 회개하자! 아니 되면 끈이라도 잡고 있자!
본당 승합차에 한 번씩 아이들을 태워 어디론가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장난끼가 발동해 급브레이크를 밟고 좌우로 핸들을 살짝 돌려봅니다. 그럼 뒷자리의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곤 하는데 그럴 때 아이들은 관성의 법칙을 제법 이해하고 있는듯 느껴집니다. 관성의 법칙! 달리는 버스에서 버스가 급정거하면 몸이 앞으로 쏠리는 것 등이 이 법칙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번 주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회개는 몸을 완전히 돌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연약한 우리가 세상의 관성을 거슬러 하느님께로 온전히 방향 전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세상이라는 관성을 거슬러 살아가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이웃사람들, 직장동료, 친구, 친척 모두가 흘러 가는 대로 살아가는데, 다르게 살려하니 이 관성의 법칙 때문에 온몸이 휘청거리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때 관성의 법칙을 실험하기 위해 공에다 줄을 매달고는 빙빙 돌리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은 관성의 법칙 때문에 줄을 잡아당기며 벗어나려고 합니다. 흘러가는 대로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벗어나 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던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손을 이어주는 줄이 있기 때문에 공이 튀어 나가지 않고 궤도를 따라 빙글빙글 돌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줄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몸을 돌려 그분께 즉시 의탁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럴 때마다 신학생 시절 본당 선배님께서 방학 때가 되면 후배 신학생들에게 늘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방학생활 흐트러지기 쉬운데, 우리 하느님이라는 그 끈만 놓지 말고 살아가자!”
세상이라는 관성이 우리를 잡아끌지만, 하느님이라는 끈을 끝까지 놓지만 않으면 그분을 중심으로 궤도를 그리며 돌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말씀처럼 완전히 회개하여 그분께로 방향전환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분께로 방향전환을 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고, 즉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 이어진 신앙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갑시다.
12월 12일 대림 제3주일 : 마태 11,2-11
이동철(대건 안드레아) 신부, 인동성당 보좌
2 그런데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5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7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마태 11,2-11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감옥에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당신이 진짜 메시아이십니까?”하고 묻는 마태 11,2-6 부분이고, 둘째 부분은 11,7-11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군중들에게 설명하시는 부분입니다.
1. 마태 11,7-11 : 먼저 둘째 부분을 살펴본 후 첫째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1.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또는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둘째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설명하시기 전, 군중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또는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물으십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저에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들려 왔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기 위해 신앙을 가졌느냐?” 질문을 던지신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예를 던지십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고운 옷을 입은 사람, 예언자. 이 세 가지의 예를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합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 갈대는 당시 이스라엘의 황량한 광야에서도 물기가 조금만 있으면 자라나 군집을 이루는 흔한 식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갈대는 그저 그런 평범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운 옷을 입은 사람 : 예수님의 말씀대로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습니다. 고운 옷과 왕궁은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군중들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그들로서는 허름한 옷이라도 걸치고 소박한 집에서 살 수만 있어도 형편이 나쁘지 않은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운 옷과 왕궁은 부와 명예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유일신 사상을 바탕으로 역사를 이루어 왔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의 삶의 기반을 이루는 토대였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자는 그 메시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시대 때부터 예언자가 나타나면 그 예언자를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언자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즉 예언자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요 삶의 희망과 근본을 제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찾기 위해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저 평범한 일상 가운데 하나의 취미생활 정도로 생각하고 신앙을 찾아 왔습니까? 아니면 성당에 가면 나의 일도 잘 될 것 같고 돈도 더 잘 벌 수 있을 것 같아서 신앙을 찾아 왔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나의 삶에 희망을 불어넣어 그 희망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어서 신앙을 찾아 왔습니까? 이 질문들을 토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되돌아봅시다.
1.2.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들을 던지시고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즉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닦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희망이신 메시아이시고, 세례자 요한은 바로 그 희망의 길을 닦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여지껏 태어난 모든 사람 가운데 세례자 요한이 제일 크지만 하늘나라에는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이들이 살고 있다는 예수님의 이 대답은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께서 펼치시는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와 행적들을 다 보지 못한 채 헤로데 왕에 의해 생을 마감했습니다.(마태 14,3-12) 즉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의 길을 닦았지만 정작 그 희망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한 채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미리 아시고 이 말씀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와 행적들을 보지 못했지만, 그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펼치시는 희망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미 하늘나라가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기에 하늘나라의 영광 또한 직접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하늘나라가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그대로 담겨 있는 성경을 접하고 있고 칠성사를 통해 하늘나라의 은총을 직접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가 그 은총과 영광에 대한 많은 가르침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많은 여건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기회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를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2. 마태 11,2-6
이제 앞부분인 11,2-6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있던 요한의 질문에 답하십니다.
요한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 :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마태 4,17부터 오늘 해당 복음의 바로 앞부분인 마태 10,42까지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일대에서 하셨던 말씀과 행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4,17-25까지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며 병자들을 고치시는 등 예수님의 지상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5장에서 7장에 이르는 이른바 ‘산상설교’ 부분에서는 하늘나라의 핵심 내용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뒤 이은 8장과 9장에서는 여러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며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질문을 전하고 예수님께 대답을 들으러 왔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과 행적들을 듣고 보았습니다. 즉 하늘나라의 핵심을 들었고 하늘나라의 희망이 담긴 행적을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그들은 하늘나라를 이미 보았고 이미 하늘나라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더 볼 것이고 더 들을 것입니다. 바로 그들의 삶에서 보고 들은 것이 하늘나라이고 희망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것을 세례자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잘 살펴봅시다. 그냥 평범하게 지나가는 삶인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이미 하늘나라의 희망이 담겨 있고 펼쳐져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뿐입니다. 물론 그 핵심은 성경과 성사와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핵심을 토대로 우리의 삶을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의 눈으로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에 하늘나라가 펼쳐져 있고 희망이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마태 11,11과도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늘나라의 희망이 그대로 담겨 있기에 우리는 하늘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은 대림시기 동안 내 삶을 신앙의 눈으로 들여다보아 하늘나라의 희망을 찾아내고, 찾아낸 그 희망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는 기쁜 성탄을 맞이합시다.
12월 19일 대림 제4주일 : 마태 1,18-24
오영재(요셉) 신부, 효목성당 보좌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제1독서에서 유다의 임금 아하즈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침입을 받습니다. 당시의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아하즈는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할지 말지 갈등하게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러한 아하즈에게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아하즈는 믿음이 부족했지요. 이에 주님께서 몸소 표징을 보이시어 아하즈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게 하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아하즈는 이미 주님께 의지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는 거짓겸손으로 주님께 대한 불신을 포장합니다. 이에 이사야 예언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예언합니다.
지금 전쟁으로 나라가 위협을 받고 있는데 뜬금없이 처녀가 잉태한 아들이라니요? 하지만 이 아이가 어디 보통 아이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소개된 것처럼 세상을 구원할 아이입니다. 세상의 구원 앞에서 국가의 존망은 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어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겠다는 표징입니다. 지금 우리 삶은 어떤가요? 혹시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별 변화가 없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직접 개입하신다면 우리 삶에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보낸 서한입니다. 당시의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유럽에서 가장 강성한 도시였죠. 로마는 황제를 신격화하고 백성들에게 숭배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 사람들에게 진정한 신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가 예수님을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된 분’(로마 1,2)이라 소개하는 것과 ‘다윗의 후손’(로마 1,3)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로마에도 이스라엘로부터 건너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인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사도들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부르심을 받은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약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불러 주셔서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으로서 지금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천사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이 등장합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요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담담한 문체로 한편의 드라마를 적어 나갑니다. 요셉은 다윗의 후손으로 그가 지닌 가문에 대한 자존심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다른 누구 못지 않게 율법을 열심히 지켰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당시의 의로움의 기준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요셉은 성모님을 고발해야 하였고, 성모님은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여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다른 남자였다면 율법을 지킨다는 명분과 배신감으로 성모님을 고발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한 여인의 생명과 그가 잉태한 생명을 살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면 성모님은 살아날 것이고, 출산 후에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요셉의 ‘의로움’은 율법에 의한 ‘의로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의로움’은 사랑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마음을 정한 날 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천사의 방문을 받은 요셉은 모든 의혹에서 풀려나서 천사가 알려준 대로 실행합니다. 하느님의 아이를 맡아 키우겠다는 요셉의 결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율법에는 혼인 전에 아이를 갖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요셉 또한 목숨을 걸고 성모님과 예수님을 지킨 것입니다.
요셉은 이때부터 복음서 전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철저히 뒤에 숨어 있으면서 성가정을 묵묵히 지켰던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이 전통입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씀대로 아이의 이름을 ‘예수’로 지었을 때부터 자신의 역할을 인정한 것입니다. 헤로데가 갓난아이들을 학살할 때에 요셉은 성모님과 예수님을 모시고 이집트로 피난을 갑니다. 그리고 헤로데가 죽자, 요셉은 다시 가족들을 데리고 나자렛으로 돌아옵니다. 요셉은 예수님께서 열 두 살 되시던 해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토론을 벌이시는 사건이 있은 뒤에 요셉은 복음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요셉은 오로지 예수님을 양육하고 지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학자들과 토론할 만큼 성장하시자 조용히 물러납니다.
요셉의 마음이 어땠을지 헤아리며 오늘 복음을 묵상해 보십시오. 인간적인 기준으로 따진다면 요셉은 피해자입니다. 한순간에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또 하느님의 아들을 지키고 길러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온 삶을 바쳐 예수님을 길렀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자라나시자 조용히 물러납니다. 요셉은 성실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고 마침내 마태오 복음에서는 유일하게 ‘의로운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날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요? 성모님의 임신을 알게 된 요셉처럼 마음에 갈등이 가득하고 복잡하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셉의 삶을 조용히 묵상해 봅시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은 그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우리 삶 한가운데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첫째로 모신다면 다가오는 성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가정에 함께 계실 것입니다.
12월 26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 마태 2,13-15. 19-23
김기환(미카엘) 신부, 동천성당 보좌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9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21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23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 2,13-15.19-23 : 아버지, 저희가 순종으로 당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첫 번째 교회이자, 가장 작은 교회이며, 가장 거룩한 교회를 기념하며 경축합니다. 이 위대한 교회, 성가정의 시작은 너무나 황홀했습니다. 별빛이 이 성가정을 비추며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의 찬미가 울려 퍼졌습니다. 목동들과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했습니다. 아기 예수께서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난 뒤,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아버지께서 이들을 보호하시는 섭리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요셉의 꿈에 천사를 보내시어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빠른 방법이었습니다. 요셉은 또 얼마나 재빨랐는지요. 그 밤에 당장 일어나 아버지 말씀을 따릅니다. 그는 진정 아버지의 뜻을 늘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셉 성인의 순종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당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께서는 저희의 구원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자마자 다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 성인 역시 곧바로 응답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의 재빠른 순종은 참으로 경탄할 만합니다.
아버지, 요셉이 헤로데의 아들 때문에 유다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하였다는 것을 들었을 때, 저는 당신 뜻의 신비에 너무나 놀랐습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에 두려움을 만들어 놓으신 하느님 아버지는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의 뜻을 향한 두려움은 진정 성령의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요셉의 두려워하는 마음이 다시금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이루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세상의 눈에는 도망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에서는 신중하고 가난한 이의 모습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를 이끌어주십니다. 요셉은 다시 순종합니다. 이렇게 겸손한 이의 순종으로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부르는 이름이 드러났습니다.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날 저희도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라 우리를 몰아칩니다. 저희를 보호하소서. 아버지께서 교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심을 언제나 기억하고 감사하게 하소서. 저희를 당신의 뜻에 언제나 순종하게 하소서. 저희의 순종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이 땅에 이루어지게 이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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