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2,1-12
김동진(제멜로) 신부, 칠곡성당 보좌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다른 길로 걸어가자.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도 다 지났는데 뜬금없이 웬 성탄 인사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한 까닭은, 주님 공현 대축일이 성탄 대축일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이 날을 성탄절로 기념하고 있을 정도이니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다른 크리스마스마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현 대축일에 듣게 되는 동방박사에 대한 복음 말씀을 읽다보니, 제 입학동기 신부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이 들어 신학교를 들어오셔서 저보다 먼저 서품을 받으셨는데, 학교 수업 중에 예비신자 교리교육 현장을 직접 방문해보라는 과제가 있어 그 신부님께서 사목하시는 본당으로 찾아갔었습니다.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열성적으로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면서 교리는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며 열심히 분석하다보니,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교리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 대목 하시고 나면 어김없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거 다 몰라도 되고, 다 잊어버려도 됩니다.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합니다. 삶이!”
교리 1시간 동안 저 이야기를 10여 차례 반복을 하셨습니다. 교리가 끝나고 나서 너무 삶을 강조하는 거 아니냐고 웃으며 그 신부님을 놀렸지만, 그 정신에 대해서는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왕으로 오신 분을 찾아 나섰던 동방박사는 이스라엘을 돌고 돌아 결국 작은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대목은 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2)
저는 다른 길로 돌아갔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단순히 다른 길로 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고도 지금까지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헤로데에게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다른 길로 가라는 것이 공현 대축일 복음이 의미하는 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 입학 동기 신부님께서 예비신자교리에서 수십 차례 강조하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글을 읽고 그냥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로 걸어가는 것, 즉 삶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온 길과는 다른 길로 걸어갑시다.
1월 9일 주님 세례 축일 : 마태 3,13-17
이동철(대건 안드레아) 신부, 인동성당 보좌
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15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16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을 처음으로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그 앞에 나오는 복음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과 함께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오늘 복음의 장면으로 넘어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때에”에서 우리는 요한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당신에 대해서 소개한 직후에 예수님께서 요한을 찾아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방문목적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세례를 받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기에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세례는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말립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의로움이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인간의 구원에 대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인간의 구원을 의로움이라 표현하셨습니다. 당신은 그 구원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한 길의 시작에서 당신의 세례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순간, 하늘이 열렸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느님의 아름다운 피조물로 하느님과 함께 대화를 하며 함께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 그 관계가 단절되었던 것입니다. 이 관계의 단절이 바로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회복됩니다. 그것이 “하늘이 열림”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아직 성령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으셨기에 “하느님의 영”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의 세례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가 이 땅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한분 하느님이시나 세 위격으로 계시는 분! 이 신비가 이 땅에 드러나게 된 순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신비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늘에서는 신비로운 목소리가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리는 거룩하신 분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례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세례의 의미를 밝혀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드러난 것은 교만의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었다는 것, 그로 인해 아름다운 사랑의 신비인 삼위일체의 신비가 사람들에게 드러났다는 것, 그리고 세례를 받는 모든 이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던 때를 기억해 봅시다.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기억할 수 있는 신앙생활의 첫 순간을 떠올려 봅시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맺고 우리 삶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는 인간에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보여 줍니다. 그냥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세상의 여러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세례를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이 영원한 희망을 깨달을 수 있었기에 비록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를 맡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세례 축일에 우리가 받은 세례를 다시 떠올리며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혹시 세례를 아직 받지 않으신 분이라면 그 희망의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준비합시다. 세례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희망은 세상의 삶처럼 언젠가 없어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영원히 남아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희망입니다.
1월 16일 가해 연중 제2주일 : 요한 1,29-34
오영재(요셉) 신부, 효목성당 보좌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오늘의 복음 묵상은 사회자와 세례자 요한의 대담을 상상해서 꾸며보았습니다.
사회자 : 오늘은 아주 귀한 분을 모셔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그 태어나신 날과 돌아가신 날을 둘 다 기념하는 분이 없지요. 하지만 단 한 사람, 이 분만은 예외입니다. 누구실까요?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박수로써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사회자 : 어서 오세요, 요한 세례자님. 반갑습니다.
요한 : 예, 반갑습니다.
사회자 : 요한 님은 출생부터 범상치 않았다고 하시던데요. 그리고 예수님과 친척간이라고도 하시던데, 사실인가요?
요한 : 예. 저의 아버지 즈카르야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오랫동안 저를 기다리셨죠. 두 분 모두 연세가 높으셔서 아이 낳기를 포기하실 때쯤에, 주님의 천사가 성소에서 분향하고 있던 아버지께 나타나셨어요. 그리고는 제가 태어날 것을 예고해 주셨죠. 어머니께서 저를 배시고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성모님이 방문하셨어요. 당신도 예수님을 잉태하셔서 불편하실 텐데 저와 어머니를 위해 먼 길을 마다하고 오신 것이죠. 성모님을 만나시자 어머니는 성령을 받아서 큰 소리로 성모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저 또한 뱃속에서 뛰놀았다고 해요. 태어나기도 전에 성령에 힘입어 제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니, 오늘 복음에서처럼 30여년이 지난 뒤에 만나도 한 눈에 알아보았죠. 물론 그때처럼 성령께서 알려주셨지요.
사회자 : 예. 그렇군요. 그런데 예수님을 보자마자 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하셨나요?
요한 : 어린양은 우리 유다인들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동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실 때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죠. 그 중 열 번째 재앙은 이집트의 모든 짐승과 사람의 맏배, 즉 첫 자식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 주님의 지시에 따라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렇게 하면 재앙이 그 집을 건너뛰고 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서 그 집은 목숨을 건졌지요. 이사야서 53장에 7절에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희생하여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죄를 없애셨다는 이미지와 어린양의 이미지가 딱 맞는 것이지요.
사회자 : 아하~그럼 미사 때에 사제가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하고 바치는 기도는 요한 님의 말씀에서부터 온 것이군요. 그런데 요한 님의 사명은 무엇이었나요?
요한 : 저는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살았습니다. 성령께서 “광야로 나가서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물로 세례를 베풀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머무시는 분을 볼 것인데 그분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다.”라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그분께서 제게 세례를 받으러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분이 세례를 받으시자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고, 하느님께서 친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에 확신했습니다. ‘아!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분이시구나!’ 그리고 제가 예수님을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고, 그분께서 오시기 전에 길을 고르게 닦아 놓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엘리야의 영과 힘을 가지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백성이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를 두고 지금까지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인물이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가 빛을 내며 타오르는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예수님이라는 큰 빛이 나타나기 전에 작게 빛나는 별빛입니다. 태양처럼 눈부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직접 보면 눈이 멀어 버릴까봐 제가 먼저 와서 작게 빛났던 것입니다.
사회자 : 이렇게까지 겸손하시다니 역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신 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조금도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고 철저하게 성령의 이끄심대로 예수님을 위해서만 사셨군요. 우리도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시는군요.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1월 23일 가해 연중 제3주일 : 마태 4,12-23
김기환(미카엘) 신부, 동천성당 보좌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는 하느님 나라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요한의 체포는 마치 죽음의 그림자처럼 저희의 영혼에 어두움을 드리우지만, 저희는 그 안에서 시작되는 거대한 여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원죄를 범한 인간에게 구원이 선포되던 창세기의 그 순간처럼, 저희는 당신의 거대하고 신비로운 구원 계획에 몸담게 됩니다. 그 계획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저희의 영혼까지 어루만져 주십니다. 이민족들의 땅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저희에게 큰 빛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 빛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저희를 회개로 불러주십시오. 저희 형제, 자매들을 불러주십시오. 저희 일상의 삶에 당신 말씀이 울려 퍼질 때, 하루하루 그저 흘러가는 실개울 같던 저희 삶은 그 은총의 파도에 휩쓸려 회개의 바다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의 영혼은 여전히 얕고 작은 실개울입니다. 당신의 은총으로 그 줄기를 키우시면, 개천이 되고 강이 되어 굳건하게 흐를 것입니다. 회개가 세상에서 눈을 돌려 당신만을 바라보는 것이듯,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흐름이 막히지 않도록 깨끗이 비워내는 것입니다. 저희 영혼이 당신을 향해 흐를 수 있도록 깨끗하게 지켜주소서.
그렇게 흘러 당신 은총의 바다에 다다르면 저희가 손에 붙잡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의 어리석은 그물이 아니라, “나를 따라오너라.”하신 당신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으로 인해 저희의 삶은 변합니다. 어부이지만 이 땅의 어부가 아니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도 당신 나라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바람은 단순히 이 땅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당신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단 하나의 희망입니다. 그 희망은 제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선포함으로써 더욱 강해지고, 나눔으로써 더욱 풍족해집니다. 그 희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주님, 당신의 눈길을 직접 반사하고, 당신의 말씀이 귀를 열어 영혼을 울리고, 당신의 발걸음에 자신의 발을 포개었던 사도들은 얼마나 복된지요! 그들을 집어삼킨 그 은총이 저희에게도 여전히 쏟아지고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지금 이 순간 새로운 세상의 꽃봉오리가 계속해서 피어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을 부족한 입술로 읽는 지금, 은총으로 그 부족함을 채워주시어 당신의 목소리가 저희 영혼을 가득 채웁니다!
당신의 발길이 저희 삶에 물들 때, 저희는 그 빛 속에서 춤출 것입니다. 당신을 따라 걷고, 당신을 선포하여, 당신의 구원을 이 세상에 흩뿌리게 하소서. 부족한 저희가 당신의 도구가 되어갑니다. 회개의 은총은 저희를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는 당신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요한이 잡혀간 때처럼 세상의 어둠이 저희를 뒤덮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희를 당신 말씀의 빛으로 비추시어 당신의 도구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를 따라오너라.”하시는 그 한 마디 말씀을 붙잡은 저희 두 손에,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담아주소서. 그 영광이 세상의 연약하고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서 드러나게 하소서.
1월 30일 가해 연중 제4주일 : 마태 5,1-12
김동진(제멜로) 신부, 칠곡성당 보좌
1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복과 갓바위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오늘 복음은 우리가 수도 없이 들은 예수님의 진복 선언입니다. 사람들은 복을 얻기를 바라고 하느님께서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어떤 이들은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감성을 가지고 복을 받으려고 빌고 또 빌고 합니다. 빌기만 한다고 과연 하느님께 복을 받을 수 있을지 묵상하다 보니, 예전에 갓 바위에 올랐던 때가 기억났습니다.
신학생 때,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기 산행 날을 맞아 동기 신학생들과 함께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갔었습니다. 갓바위 정상에 오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제가 상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갓바위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청하는 복이 대체 어떤 것일까 잠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귀에 특이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찰을 끼고 있는 산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불경 외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한 스님께서 마이크에 대고 주소와 사람이름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대구시 북구 읍내동 536번지 칠곡천주교회 김동진 ….”아니, 내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지 하며 놀라고 있는데, 그 뒷말이 이랬습니다. “사업성취, 소원성취, 수능대박….”그 소리를 듣고 동기 신학생들과 함께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원하고 바라고 복을 받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주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큰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열심히 빌기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복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은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복이 굴러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힘껏 노력을 하고 그래도 부족하니까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 복을 청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 할 수 없고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그 부분이 진짜 복입니다. 혹시 노력하지 않아도 굴러들어오는 무엇이 있다면 그런 것은 복이라 하지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합니다. 그런 이름이 따로 있는데, 횡재라고 하지요. 횡재는 굴러들어오면 바로 발로 차버려야 합니다. 왜냐면 횡재는 복과 함께 화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복음서가 가르치고 있는 복은 빌기만 잘 하면 받는 엉터리 복과는 아주 다릅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 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아주 정확하게 따져 말하자면, 참된 행복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아직 철이 없는 아이는 자기가 귀여워서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은 아버지 마음보다는 아버지께서 사 오신 장난감이 더 기쁘겠지만, 정말 귀하고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물은 사실 장난감이 아니라 거기 깃들어 있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재물이든 권력이든 인간의 노력이나 재능으로 이룰 수도 있겠지만, 우리를 귀엽게 보시고 안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은 오직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사랑이 빠지고 없는데 세상 온갖 장난감을 다 가진들 과연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살이에 필요한 것들을 정당하게 추구하면서도, 우리가 간절히 바라야 마땅한 한 가지 복은 사업이나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아버지 품을 떠나지 않고 그분 사랑 속에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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