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증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살바도르(구원자 그리스도)’ 성당의 예비 신학생인 리까르도의 글입니다.(이름을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기에 밝힙니다.)
<무책임한 한 가장으로 인해 고통 받는 소년의 글>
“우리 아빠는 할머니의 두 번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5명의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아빠는 전부인과 결혼해서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착실하지 못했기에 아빠는 그녀를 때렸고 그녀는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갈라서고 난 후에 아빠는 우리 엄마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8살 때에 집에서 도망쳐 나와 산타크루즈로 왔기에 가족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아빠는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부터 엄마를 심하게 다루었습니다. 아빠는 엄마를 잘 돌보지도 않았고 그저 매일같이 맥주만 마셔 대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난 후로 우리는 ‘로떼스’라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때부터 아빠는 여섯 달밖에 되지 않았던 나를 허리띠로 심하게 때리기 시작했고 내 옷이랑 엄마 옷을 태워 버렸습니다. 결국 엄마는 아빠를 감옥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아빠는 다시 엄마를 찾아왔고 후회하고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 주 뒤에 다시 맥주를 마셔대기 시작했고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미 숫자도 늘었습니다. 마리아와 야께린, 그리고 로시셀라가 새로 태어났습니다. 아빠는 술에 취한 채 돌아와 그릇들을 길거리에 내던지고 새벽 1시에 저녁을 하고 맥주를 사오라고 우리들을 깨우곤 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살던 집에 내 의붓 자매가 이사를 와서 살기 시작했고 엄마와 부딪히기 시작했습니다. 왜냐면 그네들이 자기네 오디오 세트를 구입하기 위해 우리 집을 저당 잡혀 버렸고 우리는 집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더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살아갈 돈이 부족해 거의 매일 밤 울곤 했습니다.
엄마는 내 동생들의 어린이집 비용과 나의 학교 등록금을 지불했습니다. 어린이집이 방학일 때에는 내가 여동생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나는 네살 때부터 그렇게 동생들을 돌봐왔습니다. 엄마는 학교 앞에서 엠빠나다(역자주 : 주먹만한 튀김만두 모양으로 치즈, 혹은 감자와 닭고기를 넣어 만드는 볼리비아 전통 음식)를 팔았습니다. 반면 아빠는 매일같이 맥주는 퍼마시면서 엄마가 간절히 청할 때에만 수도요금과 전기요금 내 줄 돈만 있노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텔레비전, 라디오, 냉장고, 가스레인지와 같은 것들이 사라져 갔습니다. 우리가 집세를 제때 내지 못할 때 집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그것들을 팔아서 돈을 갚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집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새로 셋방살이를 시작했을 때엔 그 모든 것들을 잘 지켜야 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우리 앞에서 늘 싸웠고, 난 맏이로서 형제들을 데리고 길거리에 나와 있어야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울었고 우리도 엄마랑 함께 울었습니다.
엄마는 내 공부를 도와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엄마는 아빠가 술을 마시는 걸 결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성탄절에 아빠는 내 동생들 모두에게 선물을 사 주었고 엄마에게도 선물을 하나 사 주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선물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다음날 나를 시장으로 데려가 신발과 바지와 티셔츠를 사 주었습니다. 엄마는 우리가 잘 차려입고 다니는 걸 좋아했습니다. 전에는 우리 가족에게 성탄절이란 없었습니다. 아빠는 이 날이면 늘 술을 마셨고 나랑 내 동생들은 챠로 아줌마 집에서 늘 함께 저녁을 얻어먹곤 했습니다.
 
내가 어느덧 좀 많이 자랐을 때 아빠랑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왜 미사에 가지 않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아빠는 오래 전에 자기도 복사단이었고, 교리교사도 했었노라고 했습니다. 주일마다 왜 우리들과 함께 머물지 않는지 그리고 늘 술만 마시는지도 물어 보았습니다. 아빠는 그렇지 않노라고, 술을 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 아빠의 이 말은 거짓말인 것 같습니다.
그 셋방에서 산 지 6년이 지난 후에 다시금 집을 옮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집을 옮기는 건 정말 싫었습니다. 우리 남매들은 아무도 집을 옮기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올 수 있노라고 했지만 아무도 새로 이사 간 집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빠는 집을 옮기는 동안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엄마랑 나랑 내 동생들이 일하기만 했습니다. 2년째 살던 셋집 주인아주머니는 우리를 정말 사랑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습니다. 집을 옮긴 후에 나의 졸업이 다가왔습니다. 언제나 나의 등록비를 대어주던 엄마에게는 나의 졸업이 크나큰 다행이었습니다.
아빠는 우리가 간절히 청할 때조차 내일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하고 집세 낼 돈 따윈 없다고만 했습니다. 엄마는 이런 아빠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었던 날에도 아빠는 닭고기 요리를 먹으면서 우리에게 가서 빵이나 사먹으라고 말만 한 적도 많았습니다.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난 그저 아빠를 노려보았고 정말이지 화가 났습니다. 이렇듯 아빠는 아무것도 우리를 도와준 적이 없습니다. 엄마는 이제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고 덕분에 동생들 등록비랑 수도요금과 전기요금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땅값을 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빠는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술도 많이 마시지 않고 엄마랑 싸우지도 않으며 올해는 우리들이랑 성탄절을 보내었습니다.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게다가 다행히도 아빠랑 엄마, 그리고 온 가족들은 내 성소를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우리 공동체의 신부님들의 지원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적지 않은 가장들의 행태입니다. 물론 성실하게 자신의 가정을 돌보는 가장들도 많지만 이따금씩 마주치게 되는 이런 무책임한 가장들의 모습에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가정은 모든 가치들의 보금자리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모습에서 올바름을 배우고 익힙니다. 반면 이런 가정이 어지러울 때에는 그 반대의 결과도 나타납니다. 청소년들의 비행은 십중팔구 가정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행히도 이 소년, 이제 청년이 되어가는 리까르도는 이런 어두운 가족사에도 불구하고 고운 심성과 활달한 성격을 지니고 복사단으로서, 교리교사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학교를 가 보지 않겠느냐는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성소의 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쪼록 볼리비아의 수많은 청년들이 신앙 안에서 환경적인 어두움들을 잘 이겨내고 올바른 길을 찾아 나갈 수 있도록 기도 안에서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비록 경제적으로는 조금 더 나은 모습일지 몰라도 마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의 수많은 불우한 가정들도 주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돌보아 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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