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6일 연중 제5주일 : 마태 5,13-16
이동철(대건 안드레아) 신부, 인동성당 보좌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 복음에서 오늘 복음 단락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대상으로 하는 첫 설교인 산상설교 중 한 부분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산상설교는 5장에서 7장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산상설교는 의로움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시작 부분인 행복선언(마태 5,3-12) 바로 다음에 위치한 오늘 복음 단락은 소금과 빛을 보조 이미지로 사용한 비유 이야기입니다. 이 소금과 빛의 비유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의로움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소금의 비유(5,13)
소금은 짠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 음식의 맛을 내고 또한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아주 유용한 자원입니다. 그러나 이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세상 어디에서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유지할 때 여러 음식들에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2. 빛의 비유(5,14-15)
빛의 비유는 5장 14절의 부분과 15절의 부분,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1. 마태 5,14 : 14절에서는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 언급됩니다. ‘산’은 구약에서부터 하느님의 현현이 드러나고 그 하느님과 예언자들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신약에서도 ‘산’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장소였고 신적인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였습니다(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등). 따라서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라는 표현은 바로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보호 아래에 있는 우리 신앙인들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2. 마태 5,15 : 15절에서는 빛의 역할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내는 등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함지 속에 감추어둔다면 그 등불의 빛은 방을 밝히는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 등불을 등경 위에 올려 그 역할을 다하게 만들었을 때, 그 방에는 빛이 가득할 것이고 집안사람들을 비출 수 있을 것입니다.
3. 종합(5,16)
16절은 빛의 비유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로 보았을 때 소금과 빛의 비유를 모두 종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간직하고 있을 때 쓸모가 있고 빛이 감추어지지 않고 드러날 때 온 집안을 비출 수 있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착한 행실을 해 나갈 때 하느님의 자녀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빛이 온 집안사람들에게 그 영향을 주듯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올바른 행실을 해 나갈 때 그 행실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믿고 그 믿음을 생활 안에서 착한 행실로 꽃피워나갈 때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동참하여 이 세상에 복된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월 13일 연중 제6주일 : 마태 5,20-22. 27-28. 33-34. 37
오영재(요셉) 신부, 효목성당 보좌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제1독서에서 집회서의 저자는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물과 불을 놓고 택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죽음과 생명을 놓고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무에게도 죄를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어찌 보면 하느님께서 무책임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꼼짝없이 순종하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감히 피조물에게 창조주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악에 빠지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는 사실이 2독서에 이어집니다.
지혜는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창조 이전부터 미리 감추어두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신비를 신앙인들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감추어진 그분의 지혜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혜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성령의 기준으로 통찰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과 법칙을 말합니다. 돈, 권력, 명예…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옛 율법들이 이처럼 과거에 우리를 움직였던 세상의 기준들이라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율법을 제시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 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욕하는 자들 또한 마음으로부터 살인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여라.”,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 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다. 그러니 눈에서, 입에서, 귀에서부터 죄에 대한 유혹을 끊어버려야 한다. 이런 순수한 사랑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정결하고 지극한 사랑이다.”, “‘이혼장을 써 주어라.’는 계명이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배우자를 두고 다른 상대와 결혼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부부의 사랑은 서로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는 계명이 있다. 그러나 맹세 자체를 하지 마라. 사람이 맹세를 위해 무엇을 걸 수 있다는 말이냐?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 아니더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을 파괴하고 새 율법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옛 율법 위에다 새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어쩌면 새 율법은 우리에게 좀 더 심한 구속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으로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율법의 근본정신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고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간음이라는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씨앗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라는 것, 마음에 안 든다고 배우자를 버릴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완성시켜 나가라는 것, 무턱대고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는 것이 아니라 ‘예’ 할 것은 ‘예’,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이러한 새 율법은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근본정신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고해성사를 집전하다 보면 많은 신자들이 죄를 고백합니다. “주일 미사에 빠졌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신자의 의무이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 명령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지키는 것인가요? 주일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리에 대해 함께 기뻐하며, 그 승리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기 위해 주일 미사를 참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일 미사는 축제입니다. 우리에게 축제라는 말은 조금 생소하지만, 세계 어디의 축제를 보아도 삶에 지쳐 죽을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설사 삶이 고달프더라도 주일만큼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리를 기억하며 기쁘게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에 대한 기쁨이 없는 주일 미사 참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금요일에 금육을 어기고 고기를 먹었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식욕을 막는 것이 아니라, 만찬을 할 돈을 절약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고기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고기를 안 먹고 자연산 회를 먹으면 되겠습니까?
신앙인이라면 새로운 율법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율법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지키고 있던 옛 율법에 살아있는 성령의 혼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무적으로 하고 있는 모든 전례와 신앙생활에 “왜?”,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을 던지면 우리의 신앙은 늘 살아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인도할 것입니다.
2월 20일 연중 제7주일 : 마태 5,38-48
김기환(미카엘) 신부, 동천성당 보좌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닮게 하소서.
사랑하는 주님, 저를 당신 말씀 앞으로 불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당신 말씀 앞에 앉아 머무르니, 마치 교향곡(交響曲)을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로운 선율이 저의 영혼을 어루만집니다. 그 아름다움은 마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여, 저는 매혹되고 그분처럼 완전해지고픈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을 찬찬히 듣습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며,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까지 내어주어라.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당신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
한 곡을 관통하는 주된 선율이 여러 악장(樂章)의 변주(變奏)로 반복되어 들려오기를 몇 차례, 그 선율이 더욱 깊고 분명히 귓가에 새겨지듯, 당신의 말씀도 저의 영혼에 자리 잡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실 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네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탈출 21,24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듯 그분의 백성 역시 거룩해져야 합니다.(레위 19,2 참조) 이제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삶과 죽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분을 통하여 모든 인간은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소유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하시기 때문입니다.(1코린 3,23 참조)
교향곡의 화음은 점점 최고조에 이르고, 당신의 말씀 역시 그 원의(原義)를 드러내십니다. 저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을 당신은 원하십니다. 어버이와 자녀의 닮음은 외면 뿐 아니라 그 마음에 있기에, 저희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그 사랑은 정말 어버이의 사랑이십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거룩함을 알려주시며, 그 속의 완전한 사랑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그분의 강한 오른손에, 그리고 공정하신 그분의 정의로움에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사랑이신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기에 그렇습니다. 그 사랑에로 우리를 초대하시어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당신을 통하여 저희는 아버지의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당신 말씀의 아름다운 조화를 즐기며,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주시고자 하는 당신의 성심의 달콤함을 만끽합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고, 당신께서 저희의 주인이 되신 그 행복을 맛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사랑으로 저희를 불러주시는 당신의 말씀으로 저희가 아버지를 닮게 하소서.
2월 27일 연중 제8주일 : 마태 6,24-34
김동진(제멜로) 신부, 칠곡성당 보좌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신앙의 힘!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재물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신과 같은 풍요의 신을 숭상했다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바로 돈과 재물을 숭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물질만능의 풍조 속에서 신앙인들이 재물에 대해 초연하게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재물에 대한 주제로 글을 쓰려니, 언젠가 동기 수사신부님께서 본당 젊은이들에게 재물과 돈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던져주시며 하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수사신부님의 말씀에 따르면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떤 종류이든 힘을 가지면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힘에는 네 단계가 있는데 가장 낮은 단계의 힘이 바로 무력이라고 합니다. 육체적인 힘! 삼국지를 예를 들면 장비, 여포와 같은 인물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무력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낮은 단계의 힘입니다.
두 번째 단계가 바로 재력, 돈의 힘입니다. 돈의 힘이 굉장히 높은 단계의 힘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돈의 힘은 낮은 단계의 힘 중의 하나입니다. 삼국지에서는 동탁과 같은 인물이 재력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탁이 여포를 부렸듯이 재력이 있는 사람은 무력이 있는 사람을 부리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가 바로 지력, 지혜의 힘입니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처럼 지혜의 힘은 강력한 힘 중의 하나입니다. 동탁이 돈을 가지고 무력의 신이라 불리는 여포를 부리지만 늘 제갈공명과 같은 지혜 있는 이에게는 패배하기 십상이듯이 지혜가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힘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모든 힘, 무력, 재력, 지력을 뛰어넘는 가장 높은 단계의 힘은 바로 덕의 힘입니다. 장비, 관우, 제갈공명 등은 뛰어난 능력과 힘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충성을 다했던 사람은 바로 능력 없는 유비 현덕이었습니다. 덕의 힘은 사람을 얻을 수 있는 내공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수사신부님께서는 사람들이 돈, 돈, 돈 이야기하는데 재물의 힘은 낮은 단계의 힘일 뿐이니 사람을 얻으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기 수사신부님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지만, 아직 더 높은 다섯 번째 단계가 남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바로 신력(信力), 믿음의 힘입니다. 살아가다보면 체력이 떨어져 힘이 없고, 재물도 사라질 수 있고, 심지어 사람들도 아무도 나의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찾으면 다른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신앙의 힘으로 아버지께 내어 맡기고,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내버려두고, 그분께서 갚아주시리라 믿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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