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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성지를 찾아서 ③ - 비산성당 일대
선조의 신앙과 현재의 신앙이 공존하다


취재|김선자(수산나) 기자



대구 서구 비산동 일대는 조선시대 말기부터 신자들이 살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민족분열통치시대인 1928년 비산성당이 설립되었고 한국전쟁 중 구상 시인이 피난생활을 했던 곳이다. 또한 교회사적으로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가 경기도 용인 묵리로 이장되기 전까지 45년간 묻혀 있던 현장(현재의 비봉초등학교 근처로 추정하고 있다.)이며, 서 베드로의 형 서인순(시몬)과 함께 순교한 이 알로이시오 공사가가 살던 터가 있는 곳이다.



1838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알로이시오 공사가는 구교우 집안의 신자인 아버지로부터 신앙을 물려 받았다. 어머니, 두 명의 여동생과 함께 날뫼(현재의 비산동 :  날뫼 못은 메워져 지하차도로 변했고 벌거숭이 날뫼당산은 학교, 주택, 빌라가 들어섰다.)에서 동정을 지키며 검소하게 산 이 알로이시오 공사가는 가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후, 칠곡 산중 신자촌인 한티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책도 쓰며 열심히 기도와 묵상생활을 해 나가는 중에 단식과 금육을 지키면서 육신을 보속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이 알로이시오 공사가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하양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대구로 들어오는 중에 체포되어 칼을 쓰고 옥에 갇혀서도 아침저녁 기도를 드리며 참 신앙인으로서 모범을 보였다.

서 시몬과 한양 좌포도청으로 압송되어 갈 때 이 알로이시오 공사가는 어머니와 두 여동생에게 “내가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오며,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평안히 지내소서.”라고 위로하였고 한양 감옥에서 만난 신자들에게는 “어찌 이제까지 살았느뇨?”라고 말했으며, 포졸들에게는 천주교를 믿을 것을 당부했다.

31세의 나이로 순교한 이 알로이시오 공사가는 어릴 때 풍에 걸려 눈과 귀가 비뚤어졌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목숨 바쳐 하느님을 증거한 참 신앙인이었다.

오늘날 비산성당 일대는 이윤일 요한 성인이 묻혀 있었던 곳이며 이 알로이시오 공사가가 살던 터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하느님이 계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