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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주교관과 포도밭


김정숙(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100년이면 강산이 열 번 변한다. 지난 100년 동안 대구교구의 중심지 주교관 주변은 그 세월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나이든 신자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대구 교구청 구내에 있던 포도밭에 포도를 서리하러 들어갔다가 신부님께 잡혀서 종아리를 맞았다는 추억담을 자주 말한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포도를 가꾸고자 했던 이유는 미사전례용 포도주를 제조하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미사에서는 빵과 포도주를 쓴다. 지중해 연안에 살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밥이나 막걸리처럼 일상적인 음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수난을 예비하면서 성체성사를 세워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변화하는 기적은 미사를 통해서 재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미사전례용 포도주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나라 초기 교회시절, 오(吳) 세자요한은 중국 베이징의 선교사들에게서 성작 한 개, 미사경본 한 권, 성석(聖石) 한 개, 제의 등 미사성제 거행에 필요한 제구(祭具)를 받아왔다. 그는 또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한 다음 미사집전에 필요한 순수한 포도주를 마련하기 위해 포도로 술 만드는 법도 배워 왔다.



우리 역사를 보면 포도주에 관한 기록이 일찍부터 있었다. 즉 고려 충렬왕에게 원나라 황제가 와인을 보낸 일이 몇 번 기록되어 있다. 또 『동의보감』, 『지봉유설』 등에도 와인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주로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술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조선 인조 14년(1636)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김세렴은 서구식 레드와인을 대마도에서 대마도주와 대작했던 기록을 남겼다. 한편 1653년 네덜란드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했을 때 난파선에서 건진 레드와인을 지방관에게 상납했다. 그 후 고종 3년(1866년) 이후에 이르러서는 쇄국정책을 뚫고 적포도주(赤葡萄酒)와 백포도주(사리,瀉   ), 샴페인(상백윤,上伯允) 등이 수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이러한 수입산 ‘포도주’ 이외에 우리 선조들은 포도주를 직접 제조하기도 했다. 즉 포도주는 18세기에 지어진 책들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등에 보이고, 술 빚는 방법을 기록한 『양주방(釀酒方)』에 보면 포도주를 만들 때 포도즙과 함께 누룩과 밥을 넣고 있다. 몬순 기후대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포도들은 수분의 함량이 많아서 누룩이 들어가야 초(醋)가 아닌 술로 빚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 전례 규정에 따르면 미사에 사용되는 포도주는 포도 열매로 생산된,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술이어야 하고, 보존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시거나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재래종 포도로는 순수한 포도주를 만드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미사용 포도주를 들여와야만 했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순수한 포도주를 제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시대에는 별도의 포도원을 두어 포도를 재배하지 않았다. 포도의 대량재배가 이루어진 것은 1901년 안성에서 유럽종 포도가 재배되면서였다.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공베르(Antoine Gombert, 孔安國) 신부가 안성천주교회의 초대 신부로 임명되어 오면서 마스캇 함브르그 종(種) 포도 묘목과 불랙 함브르그 종을 가져와 안성(구포동)성당 구내에 심었다. 그 이후 이곳의 토질과 기후가 포도재배에 적당하다고 확인되면서 당시 안성천주교 평신도 회장이었던 박숭병이 삼덕포도원을 일궈 포도를 대량재배하게 되었다. 안성사람들은 이 포도를 ‘공신부 포도’라고 불렀다.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는 교구청을 세우고 바로 포도를 가꾸기 시작한 것 같다. 성모당이 1918년에 완성되었는데, 그보다 앞서 주교관 주변에는 포도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있었다. 그리고 드망즈 주교의 일기를 보면 늘 이 포도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1917년 1월 8일 월요일   …   오늘 새벽엔 영하 15도, 온도가 제일 올라갔을 때가 영하 9도였다. 이 같은 추위가 계속되면 우리의 포도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얼지도 모른다.

1917년 8월 2일 목요일   …   3주 훨씬 전부터 비 한 방울 오지 않고,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여기는 36도를 넘고 시내는 39도를 넘는다. 모든 것이 달아오르고 있다. 우리는 샐러드를 먹지 못하고 있고 포도는 익기도 전에 마르고 있다.  

1918년 1월 2일 수요일   …   오후에도 영하 5도에 세찬 북풍이 불므로 포도나무들을 전지하고 짚으로 싸주게 하였다. 기온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로베르 신부와 베르모렐 신부의 포도나무들이 완전히 얼어 죽었다.

1918년 7월 27일 토요일   …   태풍으로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 아직 크지 않은 소나무들이 모두 노랗게 떴으며,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포도잎들이 체처럼 구멍이 뚫려 말라 버렸다.>

드망즈 주교는 계속해서 여러 포도종을 받아 심었다. 이렇게 남산동 일대는 포도로 뒤덮여 갔다. 사실 포도밭은 하느님의 교회로, 포도나무는 그리스도로, 포도덩굴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비유된다. 따라서 붉은 벽돌의 주교관이 포도밭 사이에 있는 것은 한국인에게 낯설기는 하지만 매우 성서적인 풍경이었다.

그 포도밭을 가꾸었던 신부들은 우리의 ‘도둑질’이 아닌 ‘서리’에 대한 풍습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담넘어 들어와 포도를 훔치는 꼬마들을 보면서 그들의 영혼을 걱정하며 매를 때렸을 선교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그 포도를 심었던 곳에는 교회계통의 건물들이 계속해서 들어섰다. 100년의 세월은 주교관 일대의 경관을 열 번도 넘게 바꿔놓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포도서리 때문에 매 맞았던 꼬마들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그들이 사라지면 교구청 포도밭은 전설로 화할지도 모른다.


* 이번 호부터 새로 연재를 맡은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