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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부의 먼 곳에서 만나는 예수님
생명


마진우(요셉)|대구대교구 신부, 볼리비아 선교 사목

집에서 키우던 개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로트와일러 종인데 이름은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숫놈은 ‘을지’로 암놈은 ‘문덕’으로 지었습니다. 제가 올 때부터, 아니 석상희 신부가 올 때부터 있던 놈들이라 적어도 나이가 4년 반 이상은 된 친구들입니다. 을지의 인생사는 화려합니다. 어릴적부터 불의의 사고를 당해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니던 녀석은 외양은 매서운 맹견의 모습이었지만 너무나 유순한 성격 탓에 ‘똔또(멍청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늘상 먹을 걸 밝히고 장난감을 던져주면 쪼르르 달려가 물고는 숨어버리던 녀석은 결국 지난 겨울 수르(남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가 오던 날 급격히 악화된 상태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쓰러져 버렸고, 동물병원에 데려가 보았지만 희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을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 그리고 죽은 을지를 실어와 앞마당에 묻는 기분은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문덕이의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두어 달쯤 전부터 옆집 개가 우리 문덕이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저는 녀석과 우리 문덕이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반쯤 지나자 문덕이가 새끼를 배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황스런 마음에 동물병원을 찾아가서 새끼를 밴 우리 문덕이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으니, 수의사 아주머니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그냥 두면 자기가 다 알아서 해요. 먼저 녹색 양수가 터질 거구요, 그리고 한 시간 간격으로 새끼가 나올 거예요. 혹시라도 그 간격이 너무 길어지면 서둘러 이리로 데려오세요. 새끼는 탯줄이랑 태반이 달려있을 건데 어미가 알아서 끊을 거예요. 새끼가 몇 마리나 들었나 알아 보시려면 초음파 촬영을 해보시면 돼요.” 사람 마음과 비교할 순 없겠지만 자식 가진 아빠의 긴장된 마음이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그 날이 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려는데 집 주변이 온통 피범벅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문덕이를 찾았습니다. 문덕이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집 창고에서 아직도 태반이 달린 채 신음하는 새끼 한 마리를 찾아 내었습니다. 얼른 방으로 데려와 가위로 탯줄을 끊고는 수건에 쌌습니다. 그리곤 분명 한 마리만 나오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집 주변을 돌아다녀 보았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새끼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려고 애썼습니다. 결국 흙 속에서 신음하는 녀석 하나, 벽돌로 만든 아궁이 밑에서 두 마리를 더 찾아 내었습니다. 하필이면 추운 날이라 새끼들이 모두 추위에 떨고 있었고 첫 출산이었던 문덕이는 어찌할 줄을 모른 채로 제 주위만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더 찾아 낸 몇 마리의 녀석과 제가 보는 앞에서 낳은 녀석까지 모두 합쳐 총 아홉 마리의 새끼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두 마리는 개미들의 공격으로 죽어버렸고, 다른 한 마리는 문덕이가 너무 세게 무는 바람에 죽어버렸고, 또 다른 세 마리는 추위와 젖을 물려주지 못한 어미로 인해 굶주림에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남은 세 마리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가서 꼬리를 끊어주고, 분유를 사고 작은 주사기를 얻었습니다. 작은 조명으로 강아지들을 따뜻하게 해주고 4시간마다 분유를 태워 따뜻하게 데워서 먹이라는 수의사의 지시를 받고는 돌아왔습니다. 이토록 정성이 필요한지도 모른 채, 문덕이와 그 강아지들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입니다.


저만 해도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늘 강아지들이 있었고, 제가 살던 아파트의 앞은 논이라서 개구리, 잠자리, 메뚜기, 여치, 미꾸라지, 땅강아지들이 모두의 훌륭한 동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과연 어디서 생명을 마주하는지 의문입니다. 자연은 잘 꾸며져서 동물원의 우리 안이나 수조 안에서 겨우 마주할 수 있을 뿐이고, 산모와 환자들은 병원으로 노인들은 요양원으로 몰아버린 채로 주변에서 사람의 ‘생로병사’의 신비와 진리를 마주하기는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아이들이 컴퓨터로 마주하는 가상 애완동물은 죽으면 리셋하면 그만이고 주변의 숲과 강과 산은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점점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생명’에 대해 말로야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이 직접 손으로 느끼는 조그만 강아지의 심장 소리와 커다란 황소의 눈망울과 힘차게 달리는 조랑말보다 나을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느껴본 적이 없는 이에게 생명의 존엄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소 귀에 경 읽기’와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많은 독자 분들은 물질적인 유익을 위해 생명을 그저 ‘이용’하려는 어른들 사이에서 젊은이들에게 ‘생명’의 위대함을 체험시키는 분들이었으면 합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되려는 3월입니다. 굳어져 있던 몸을 풀고 자녀들의 손을 잡고 가까운 산에라도 올라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