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관구 대신학원 신학생들의 ‘거룩한 독서’영성수련기 - ①
끊임없이 말씀 안에 머무르며
권호섭(스테파노)|대구관구 대신학원 연구 1
처음 한티에 왔을 때, 강아지 다섯 마리가 있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녀석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집 밖을 나와 바람을 쐬더니, 지금은 온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다. 그렇게 강아지들이 자라는 동안 나의 영성도 주님의 말씀을 먹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보았다.
이번 영성수련은 사제직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하고자 준비하는 나에게 분명 중요한 시기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많은 것을 기대하며 시작하게 되었다. 특히 평생 하느님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얻고자 했다. 이처럼 기대가 컸던 터라, 욕심 역시 컸었다. 그러나 나는 그 욕심을 ‘거룩한 욕심’이라 포장하여 거룩한 독서를 할 때마다 ‘평생 잊지 못할 하느님 체험’을 기다렸고, 그 체험을 위해 말씀 안에서 들은 내용을 실천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한 주가 지나기도 전에 체험을 하게 해 주셨다. 은근히 사람들 앞에 나서서 주목받기 좋아하고,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며 하고서는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던 나에게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 16)
그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빛으로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밝혀주고, 내가 아닌 나의 착한 행실만을 보게 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것인데, 나는 사람들이 내 착한 행실이 아닌 나를 보아 주기를 바랐고, 나를 찬양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던 것이기에, 죽음의 구렁텅이로 가고 있던 나를 살려 주시는 말씀이었다. 그 때 내가 느낀 기쁨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고, 주님의 궤가 들어올 때 옷을 벗고 춤을 추었다던 다윗처럼 제대 앞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낚시를 좋아하는 나에게 누군가가 낚싯배를 선물로 주었더라도 그만큼 기쁘고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통해 주님의 선물을 받고 난 후, 스스로 더욱 겸손해지자며 수없이 기도하고 더욱 열심히 주님의 말씀 안으로 빠져 들고자 했다. 그러나 ‘거룩한 욕심’도 욕심은 욕심이었다. 마음속 깊이 또 다른 선물을 바라는 내 자신이 너무 커서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올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처럼 말씀을 내 안에 모셔도 나의 욕심들이 가시덤불이 되어, 말씀을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말씀의 씨앗을 잘 키울 수 있는 좋은 땅이 되고자, 나를 없애기 위해 기도를 하고 실천을 해도 내 안의 가시덤불들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없애기 위해 기도를 하며 힘든 싸움을 하던 중, 얼떨결에 주님께 이러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저는 이 세상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과연 내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포기한 것이 무엇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내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응답하고는 포기하고자 했던 것이 고작 하나, 가정을 이루어 살고 싶은 꿈. 그 꿈 하나를 포기하겠다고 해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할 사람이라며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다. 한없이 부족한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님께서는 내게 부족한 것들과 필요한 것들을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 채워 주고 계심을 느끼게 되었을 때, 나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 있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나의 욕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고, 거룩한 독서를 하며 말씀을 듣는 것 자체가 기쁘고 행복했다.
그러나 순조롭기만 할 것 같던 거룩한 독서 시간에 또 한 번의 고비가 찾아 왔으니,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주님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분명 주님을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너무도 쉽게 죄를 짓고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내가 감히 주님께 사랑 고백을 한다는 것이 죄송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송한 마음으로 차마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주님께서는 또 다른 말씀으로 찾아오시어, 내가 자신 있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을 통해서였다. 주님께서는 기도 열심히 하고 선행을 하는 ‘흠 없는 나’만을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니라, 나약하고 부족해서 끊임없이 죄를 짓는 ‘흠 있는 나’까지도 사랑해 주셨던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사랑 앞에서 내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나?’하고 말씀 앞에 머무르던 중, 주님께서는 다시 말씀해 주셨다. “서로 사랑해라.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가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라.”
그렇게 주님 말씀과의 만남을 통해 ‘그래, 주님처럼 나도 사랑하자!’하는 결심을 하고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을 때, 모든 형제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내가 나의 흠을 통해 받은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나아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은 분명 조금씩이나마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는 주님을 알아야 하고,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말씀 안에 살아계시고, 그 말씀이 곧 주님이셨다. 그리고 성령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며 바람처럼, 때로는 태풍처럼 나를 말씀에로 이끌어 주셨고, 나는 그 이끄심으로 말씀 안에서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제 나는 그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말씀 안에 머무르고자 할 것이며,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다닐 것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 49)
대구관구 대신학원 신학생들의‘거룩한 독서’영성수련기 - ②
나의 모든 것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한승호(베드로)|대구관구 대신학원 연구 1
신학교에 입학한 지 어느덧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 4학년을 마치고 거룩한 독서 영성수련을 받게 되었다. 사실 군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면서 영적으로 무엇인가 부족하고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음을 많이 느꼈기에 이것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들었었다. 그래서 복학해서 틈틈이 거룩한 독서와 묵상을 통해서 이런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었지만, 제대하고 복음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는 공백기 때문인지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바빴고, 학교행사, 논문, 시험 때문에 조금씩 소홀해지는 나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거룩한 독서 영성수련이 기다려지면서 내가 갈망하고 채우고 싶었던 그 마음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희망과 믿음을 안고 나는 한티에 올랐다.
한티는 여전히 내가 처음 입학할 때와 다를 것 없이 고요하고 조용한 가운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학교 입학부터 나의 성소의 길을 바라보며 행복했던 시간들과 힘들었던 시간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영성수련을 시작하면서 새롭게 우리만의 전례력을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대림부터 시작해서 연중, 사순, 부활, 성령 강림,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첫날 말씀 묵상 중에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임마누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씀이 우리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해서 그리고 나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함께 현존하시며 몸소 표징을 보여주시기를 청했다. 하지만 그 청은 쉽지 않았다. 묵상을 하는 중에도 자꾸 다른 생각이 나고 집중도 안 되고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면서 침대에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싶고 쉬고 싶다는 생각만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너무나도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말씀을 읽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기조차 힘들어졌다.
하지만 이 또한 그분께서 나를 이끌어주시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말씀 앞에 앉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적응이 되어 묵상도 잘 되고 기도도 잘 되면서 말씀 앞에 머무르는 시간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또 어느 날에는 말씀 앞에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시간이 다가오기도 하였다. 그러면 그냥 복음서를 읽거나 그날의 말씀을 계속 읽으면서 말씀 안에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처음 거룩한 독서를 할 때는 1시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지만 시간도 남고, 세밀한 독서와 묵상, 기도 부분에서 많은 부족한 부분들이 드러났다. 그러다 점차 시간이 갈수록 세밀한 독서와 묵상, 기도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성경 안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행동과 여러 말씀을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덧 사순시기가 다가왔다. 은총의 시기, 사순시기 동안은 더 열심히 전념하겠다는 다짐과 그분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서 더 깊이 묵상하고 느끼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사순시기 동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너무나도 크게 느꼈다. 특히나 세족례를 행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는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목숨까지 내어 놓는 그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시고자 그리고 그들이 깨닫기를 바라며, 또한 자신을 팔아넘길 유다가 지금의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이라도 악의 유혹을 버리고 당신에게 다시 돌아와 그가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성 금요일이 왔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상한 것은 사랑과 기쁨이었다. 당신께서는 십자가에서 두 팔 벌려 세상의 모든 죄와 인간의 모든 짐을 다 짊어지셨다. 그리고 그 두 팔로 세상 모든 것을 다 끌어안으시는 모습이었다. 나 또한 그분께서 그 두 팔로 당신 품으로 끌어안아주신다는 것을 너무나도 크게 느꼈다. 비록 죄인이며, 나약한 인간이고 더구나 당신을 따르기에는 너무 부족한 제자이지만 그래도 나를 끌어안고 함께 이 길을 가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끌어안으시고 목숨까지 내어 놓으셨다는 사실을 묵상하며 사순시기의 마무리와 동시에 부활이 찾아왔다.
부활은 기쁨이다. 부활시기 안에서 결국 나는 내가 바랐던 그 희망과 기쁨을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그 말씀에서 느끼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처럼 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신다는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으로 선택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나아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부족한 나를 통해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고자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내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께서 나눈 그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나를 양떼 속으로 이끄시는 듯했다. 나는 이제 이 말씀 속에서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과 기도 속에서 큰 희망과 기쁨을 느꼈다. 이 기쁨이 그리스도의 기쁨이고 또 나의 기쁨이 되기를 바라며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크고 평화로운 그 기쁨을 내 안에서 보여주시고 그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기쁨 속에서 성령으로 거룩해지고 진정한 진리를 바라보고 그 진리 안에서 숨 쉬기를 바라고 그 진리를 통하여 내가 변화되기를 바라고 계셨다.
나에게는 짧지만 길었던 24일의 시간이었고, 그 24일의 시간은 다시 태어나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물을 마신 듯, 당신을 향한 그 모든 갈망과 부족함을 채워주는 시기였다. 이제 그 24일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말씀 안에서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 갈 수 있는 희망을 얻은 것 같다. 비록 부족하고 나약한 모습이지만, 이 모습까지 사랑해주시고 나를 이끌어 주시고자 하신 그 분의 사랑이 나에게 이런 기쁨과 희망이 되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나 또한 당신께 희망을 거는 사람이 된 것이다.
무언가를 갈망한다는 것은 그 안에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갈망을 다른 곳에서 찾기를 바랐고 다른 것이 나를 채우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특히 나와 제일 가까이 있는 성경 속에서 그 갈망을 채워주는 희망의 길을 보여주셨다. 이제 매일 들려주시는 그 말씀 안에서 나는 이 희망의 길, 사랑의 길, 기쁨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또한 내 주위의 사람들, 동기들, 모든 것들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는 것 같다. 말씀으로 창조된 모든 것들이기에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기쁨과 평화 속에 있는 나의 마음을 바라본다. 어느덧 예수님은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콜로 3,11)라는 말씀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것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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