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6일 연중 제9주일 : 마태 7,21-27
이동철(대건 안드레아) 신부, 인동성당 보좌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오늘 복음 단락은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설교이자 우리를 당신의 의로움으로 초대하시는 산상설교의 마무리 부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5,3-12의 행복선언을 통해 산상설교를 시작하셨고, 이후 우리가 의로움으로 들어가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와 버려야 할 태도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7,21-27의 단락에서는 산상설교를 마무리 하십니다. 이제 오늘 복음 단락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보겠습니다.(7,21ㄱ; 7,21ㄴ; 7,22-23)
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7,21ㄱ)
신앙적인 삶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약속하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다.’는 것을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7,21ㄱ은 구원을 받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라는 것은 곧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고 더 나아가서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믿는데 왜 구원받지 못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잘 살펴보면 믿음이란 구원의 최소한의 조건이 되는 것이고, 진정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 외에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요? 다음 문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7,21ㄴ)
우리는 ‘실행’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즉 믿는 것은 기본적인 조건이고 믿음에 실행이 더해질 때 진정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관념적인 부분이라면 ‘실행’은 실천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이 ‘머리와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이루어진다면 ‘실행’은 ‘몸’이라는 보이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머리로 그분을 알고 마음으로 그분을 믿고, 그렇게 아는 바와 믿는 바를 몸으로,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앎과 믿음과 삶이 일치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이 있는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7,22-23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다음에 이어지는 7,22-23까지의 내용은 앞 부분과 반대되는 내용으로 나타납니다. 7,22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주님께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이 내용을 들어보면 그들은 지상에서 주님을 알았고, 믿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행했던 이들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믿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그러한 기적들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7,23)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상하게도 그들을 구원에서 배제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원에서 배제시키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앞 문장의 ‘아버지의 뜻’이라는 부분을 잘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 7,22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고 마귀를 쫓아내었고 기적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음서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두 단어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형태로 펼쳐나가시는 공생활의 시작과 끝에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시작 때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직접 보여 주셨고 또 마지막에 남겨놓고 가신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 시작과 끝에 하신 이 말씀이 아버지의 뜻, 곧 하느님의 뜻인 것입니다.
회개와 사랑,?이 두 가지를 실천하지 않았기에 오늘 복음 단락에 나오는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었으며 기적을 행하였지만 주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회개와 사랑은 어느 한 순간만 행하였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모두 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님께로부터 칭찬받을 만한 많은 일들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몇 가지 순간들만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뜻’인 회개와 사랑을 끊임없이 실천해 나갈 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유혹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약한 본성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회개하고 다시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진정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들어가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3월 13일 사순 제1주일 : 마태 4,1-11
오영재(요셉) 신부, 효목성당 보좌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6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8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을 유혹하는데 실패한 악마들의 우두머리는 2011년 사순을 맞아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악마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한 번 들어볼까요?
악마 두목 : 자, 이제 사순 시기가 되었으니 사람들이 우리의 유혹을 더욱 경계할 것이란 말이야. 사람들을 유혹할 뭐 좋은 방법 없겠나?
악마 1 : 두목님,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맛있는 고기로 변해서 매주 금요일마다 사람들을 유혹하겠습니다.
악마 두목 : 음…먹을 것으로 유혹한다…아픈 기억이 떠오르는군. 2천년 전에 예수님이 광야에 와서 쫄쫄 굶었을 때, 돌더러 빵이 되게 해보라고 유혹했는데 실패했었거든.
악마 1 : 그거야 예수님이니까 그렇죠. 요즘 사람들은 금육 따위는 신경도 안 씁니다. 열심한 신자들조차도 ‘뭐, 고해성사 보면 되지.’라고 생각한다니까요. 특히 사람들은 ‘하지마.’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하죠. 왜 옛날에 뱀 선배님이 하와를 그런 방법으로 꼬셨잖아요? 그렇게 한 번, 두 번, 금육을 안 지키다보면 나중에 주일 미사도 안 나가고 그러다 결국 우리 식구가 되는 것이지요. 헤헤헤~!
악마 두목 : 음, 괜찮군. 또 다른 방법 없나?
악마 2 : 예, 두목님. 제가 용한 점쟁이로 변해서 사람들을 유혹하겠습니다. 그럼 하느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점점 흔들릴 것입니다.
악마 두목 :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종종 자신들의 믿음을 의심하고는 하지. 하느님이 자기들을 사랑하는지 의심하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옛날에 예수님한테 하느님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시험해 보라고 하니까 안 넘어오던데?
악마 2 : 에이, 그거야 예수님이니까 그렇죠. 요즘 사람들은 무늬만 신자입니다. 결혼하기 전이랑, 아기 이름 지을 때는 신자들도 죄다 점 보러 옵니다. 간단한 것 몇 가지만 맞추면 우리더러 용하다며 우리가 하는 말은 죄다 믿습니다. 참 쉽죠잉?
악마 두목 : 그것도 좋군. 또 다른 방법 없나?
악마 3 : 두목님, 다 필요 없습니다. 돈이 최고죠. 사람들은 돈만 보면 환장합니다. 사람들에게 돈과 신앙 중에 택하라면, 백이면 백 모두 돈을 선택할 것입니다.
악마 두목 : 하지만 옛날에 예수님한테 말이야, 나한테 절하면 돈뿐 아니라 뭐든지 다 준다고 했는데, 절 안 하던데?
악마 3 : 그거야 예수님이니까 그렇죠. 뉴스 보세요. 돈 앞에서는 형제, 친척, 부모, 자식도 없습니다. 신자들도 똑같아요.
악마 두목 : 음, 좋아. 세 가지 의견 모두 마음에 드는군. 당장 실행에 옮기자. 예수님한테는 졌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모두 우리 식구로 만들어서 복수해야겠다. 하하하~!
악마는 결코 ‘내가 악마다.’하고 드러내 놓고 덤비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약할 때, 가장 약한 부분만을 골라서 덤비죠. 인간적인 힘과 의지로 악마에 대항하려 든다면 이길 수 없습니다. 악마가 훨씬 세기 때문이죠. 그러니 우리는 악마보다 훨씬 세고 위대하신 하느님께 의지해서 악마를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인간적인 힘으로 악마를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에 걸친 악마의 유혹을 모두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하여 이겨내셨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가장 강력한 악마 퇴치법은 바로 “말씀”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말씀으로 무장하여 악마의 유혹에 대항해 봅시다.
3월 20일 사순 제2주일 : 마태 17,1-9
김기환(미카엘) 신부, 동천성당 보좌
1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하고 명령하셨다.
영광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 저희에게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심에 감사드립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지 엿새, 주님께서는 당신을 더욱 열어 보이십니다.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이 날은 마치 창조의 여섯 번째 날인 듯하며, 동시에 창조의 일곱 번째 날인 듯합니다. 이 산은 마치 주님의 산인 듯하며 높이 솟은 예루살렘의 성전인 듯합니다. 저는 시간과 공간의 신비로움에 숨이 멎을 듯하면서 아름다움에 설렙니다. 이 시간은 인간의 창조 날이며, 주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공간은 인간을 만나러 하느님께서 내려오신 곳이며, 하느님을 만나러 인간이 올라간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초대하신 이 때와 곳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며, 당신께서 지금 여기서 저희를 만나고자 하시기에 제 마음은 종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합니다.
눈앞에서 당신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당신의 옷은 빛처럼 하얘집니다. 아! 태양보다 더 빛나는 것을 보았다면! 빛보다 더 하얀 것을 보았다면! 당신의 모습을 겨우 태양과 빛으로 선포하는 부족한 입술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태양처럼 빛나는 주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을지 너무나 궁금하지만, 그 내용은 당신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저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모세 이전부터 엘리야 이후까지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주님 당신 한 분을 향해 있으며, 당신으로서 완성되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시대의 흐름을 초월하여 서로 대화하듯 통교하며 완성됨을 확신합니다.
저희 안에 자리 잡은 하느님 구원에 대한 확신은 평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저희는 그 평화에 매혹되어 그곳에 머무르고자 하는 열망이 생깁니다. 사도가 저희의 마음을 대변하여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뜻이 시대를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거대한 신비는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인지요!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께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징표가 되어 제 영혼은 평화의 강으로 흘러듭니다.
그러나 그 평화의 흐름도 잠시, 빛나는 구름이 저희를 덮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의 말씀, 살아계신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저희에게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이 말씀들은 저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나약하고 부족하여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기에는 합당하지 않은 저희 죄인의 모습을 직시합니다. 저희는 고개를 들 수 없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두려움에 떱니다. 주님께서 거룩한 변모로 하느님의 아드님의 엄위를 떨치실 때, 인류가 첫 범죄를 저질렀던 그 때의 그 동산에서처럼 평화는 온데간데없고, 두려움에 떠는 죄인만 남았습니다.
그때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다가오시어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죄인에게 다가오셔서 손을 대시며 말씀을 건네시는 주님. 당신 앞의 그들은 바로 저희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만이 저희를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당신만이 저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산에서 내려올 때에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하고 명령하십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있기 전까지 이 산 위에서 겪은 모든 일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큰 아쉬움이자 슬픔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당신의 거룩한 변모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질 것임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거룩한 변모로 보여주신 하느님 아드님으로서의 위대한 모습이 십자가의 길에서 완성됨은 당신 순종의 결과이며 하느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이 세상의 눈은 십자가를 바라보기 보다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원할 테지만, 당신께서는 위대한 순종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하는 저희에게 희망이 되어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당신의 길을 따르고자 하나 자주 걸려 넘어지는 저희에게 주님께서는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진정 성부의 사랑받는 아드님이십니다.
주님, 저희도 당신의 거룩한 변모에서 희망을 얻어, 십자가의 길을 계속해서 걷게 하소서. 그 길의 끝에서 당신을 다시 만나, 그 거룩한 변모의 순간을 다시금 깨닫고 부활의 영광 안에 들 때에 저희가 평화로이 기뻐 즐기게 하소서.
3월 27일 사순 제3주일 : 요한 4,5-42 또는 4,5-15.19-26.39.40-42
김동진(제멜로) 신부, 칠곡성당 보좌
5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9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
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을 바라며 살아가자!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가 주일학교를 다닐 때는 ‘신앙학교 후유증’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즐거웠던 겨울 피정과 여름 캠프가 끝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그 끝 맛이 허탈하고 허무했던 것을 일컬어 그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니 그것은 학생 때의 미숙한 신앙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신앙학교를 통해 신앙적 성숙을 도모해야 하는데 인간적인 재미만을 너무 추구하다 보니, 함께 어울려 있던 시간들이 사라질때, 그 허탈함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랐던 상태들이 마음앓이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도 없이 느낀 것인데, 인간적인 즐거움은 늘 한계를 가진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깨달을 때가 허다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가끔은 분위기에 취해, 아니면 마음이 약해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분별하지 못했던 일들은 인간세상사에서 흔히 빚어지는 일들일 겁니다. 하지만 신앙인의 삶은 일반인들의 삶과는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사순 제3주일에 듣는 요한 4,5-42까지의 긴 복음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부분입니다. 이 복음부분은 생활성가 가수 김정식 씨의 ‘생명의 물’이라는 곡을 기억나게 하는데,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좋아해서 즐겨 부르곤 합니다. ‘생명의 물’이라는 곡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아!”라는 구절입니다. 인간이 주는 기쁨들은 다시 목마르게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준다는 것을 일상 속에서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캘커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무나 힘들게 많은 일정을 소화해내는 마더 데레사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마더! 수녀님은 그렇게 매일 힘들게 초인적 일정을 소화하는데 힘들지도 않으십니까?” 그러자 마더 데레사가 빙긋이 미소로 화답하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인간이 주는 힘으로 하면 힘이 들겠지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하면 어떤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힘은 늘 소진되고,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답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은 현대의 세계에도 여전히 선포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은 다시 또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지만, 내가 주는 행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행복하리라!’
현실 속에서 늘 목마른 갈증을 느끼십니까? 인간적 행복을 누리고는 있지만 왠지 모를 허탈감에 빠져 계십니까? 그렇다면 세상이라는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것을 그만두고 교회라는 우물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수를 퍼 올리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만이 우리의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시켜 줄 유일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인간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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