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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몬시뇰의 세상이야기
물따라 세월따라(18)


김영환(베네딕도) 몬시뇰

6월도 중순이 지나니 신학교 근처는 온통 나무그늘이 짙어간다. 신학교에 온 지도 한 달 반이 지났으니 이제 익숙할 때도 되었다. 6월이 되고는 한 번도 외출한 날이 없었는데 다음 주일은 외출을 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신학교 들어온 후 처음 외출이기 때문에 무언가 마음이 들떠 있었다. 외출이라야 갈 데가 별로 없다. 명동성당에 가서 옛날 기숙사를 들여다보는 것과 명동성당 뒤에 있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에 가서 누님을 만나는 것이다.

 

6월 25일 주일, 기다리던 외출, 명동성당으로 걸어갔다. 이미 명동성당에서 6년이나 살았기 때문에 자유스러운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학생이라는 위치에서 처음 가니 감개무량하다. 왜냐하면 내가 기숙사에 있을 때 신학생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성당에 오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던 것을 기억한다. 성당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성가기숙사 친구들을 만났고 오랜만이라고 인사도 하며 수녀원에 누님을 만나러 갔다.

 

반갑게 맞는 누님은 신학생 정복인 검정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맨 나를 보고 퍽 대견해했다. 평화스런 표정도 잠시, 나보다 더 소식이 빨랐던지 “야,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다. 내가 오히려 어리둥절하면서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되물었다. “전쟁이 났다며?”하고 의아한 눈치로 나를 쳐다본다. 북한 공산당이 쳐내려왔단다. 교전이 시작되었다는데 다시 북한으로 치올라 간다고 내게 상세히 일러주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우리는 학교를 나왔다. 부랴부랴 인사를 나누고 학교에 가봐야겠다고 그 길로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에 전차를 타고 불안해하며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또 피난가라면 어떻게 할꼬? 걸어가야 하나, 기차를 타야 하나, 하고 걱정하며 38선 넘을 생각을 하니 온몸에 힘이 빠진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내려 신학교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우리들은 전쟁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미 외출에서 돌아온 상급생들이 전쟁이 났다고 이렇게 설명했다. 오늘 아침 일찍 북한군이 남한으로 쳐내려 왔는데, 국군도 반격을 시작하여 벌써 해주는 국군이 점령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참에 북한을 통일한다고 한단다. 저녁 때가 되어 저녁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더니 전쟁 중에 북한에서 간첩도 내려올 수도 있다고 정부에서는 불침번을 서며 교대로 학교를 지키라고 했단다. 그래서 우리도 조를 짜서 학교를 지키기로 했다. 저녁 식사 후에도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전쟁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혜화동에서 미아리로 가는 길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군용차가 늘어갔다. 라디오에서는 점점 숨가쁜 전쟁이야기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26일 아침, 더 어수선한 가운데 미사가 시작되고 아침식사를 마쳤다. 아침식사 후, 수업시간이 되어 다들 교실로 들어갔고 우리는 최신부님 방에서 라틴어 공부를 했다. 그때 최신부님이 대단히 걱정을 하며 전쟁이 심각한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오전 공부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자 이미 전쟁이야기로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오후에 신학교 뒤에 있는 낙산에 올라가서 미아리 쪽을 보니 멀리 연기가 올라오고 간혹 폭음이 들린다. 시간이 갈수록 폭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연기가 더 짙어지게 피어오르는가 하면, 전쟁분위기가 고조되는 것 같다. 오후 다섯 시쯤 되어 전규만 학장 신부님은 전교생을 식당으로 모았다. 도저히 수업을 계속 할 수 없으니, 지금 저녁 식사를 하고 전교생은 모두 명동성당에 있는 주교관으로 모이라고 했다.

 

저녁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신학교 언덕길을 내려와보니 혜화동 로터리, 그 큰 길은 인산인해였다. 달구지를 몰고 오는 사람, 지게를 지고 물건을 나르는 사람, 어린 아이들은 어른의 목마를 타거나, 업히고, 손수레에 실려 가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 행렬이 큰 도로에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창경원 쪽으로 가는 큰 길도, 종로 5가로 가는 큰 길도 피난민 행렬로 꽉 찼다. 우리는 종로 5가로 가는 길,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의과대학(지금 마로니광장)이 있는 큰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푸른 플라타너스가 힘없이 늘어져 있고 그 밑으로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도 그 길을 지나가면서 언제 이 길에 다시 돌아올까 생각했다.

 

명동성당에 도착하고 보니 지금 문화관이 서 있는 곳이 옛날 계성초등학교 남자부가 있었던 곳이다. 김수환 총급장(현 추기경)이 주교관을 오가며 소식을 전했는데, 우리는 최종 결정이 날 때까지 불안한 마음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교관에서 최종 결정을 발표한다며 김수환 총급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전쟁은 예측불허의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 시간 이후 신학교는 해산한다. 모든 신학생은 재소집 명령이 있을 때까지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재소집은 각 교구를 통해, 가톨릭 신문을 통해 발표할 것이다.”라고 간단히 말하고, 될 수 있으면 남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소리를 듣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명동으로 쏟아져 나왔다. 뿔뿔이 헤어지면서 기약도 없는 이별을 앞에 두고 서로 무사하기를 빌어주면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가방 하나만 들고 정하권(마산교구 몬시뇰) 형과 동행했다. 같이 명동거리를 내려가면서 해방 후 만주에서 나올 때 38선을 넘으며 임진강을 건너고 산을 몇 개씩 넘어 개성까지 걸어오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남쪽으로 가는 길이 사는 길인지, 서울에 남아 있는 것이 사는 길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쟁이 언제 끝날지 김일성이 서울까지 올지 도무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불안은 더욱 커졌다.

 

수녀원에 있는 누님이 생각나서 정하권 몬시뇰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에 가더라도 누님과 함께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저는 여기 머물겠습니다.” 정하권 몬시뇰은 그 말을 듣고 “참말, 어느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남아 있어야 할지, 같이 걸어가야 할지. 어느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소신대로 하자.” 서로 무사하기를 바라며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성모병원에 있는 내 친구 서원식의 병실로 갔다. 병원에 가서 친구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 몸으로 움직일 수가 없어 집에서 무슨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 날부터 친구 병실에서 같이 지냈다. 간호를 맡아보던 신 보니파시오 수녀님이 같이 있어도 좋다고 허락했고, 아직은 병원에 별 일이 없으니 있어도 좋다고 하셨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서울 시내에 사는 환자들은 거의 퇴원을 하고 병이 중하거나 먼 곳으로 갈 수 없는 몇몇 환자들만 남아 있었다. 병원에서는 몇 남지 않은 환자들을 지하실 석탄 창고로 옮기고 거기서 대기하라고 일렀다. 우리는 저녁도 못 먹고 석탄 창고에서 지루한 밤을 보냈는데, 그 날 밤은 거의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대포 소리, 집 무너지는 소리,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샜다.

 

27일 아침이 되자, 사람들은 밖에 나와 서로 어떻게 된 일인지 걱정하며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국군 사병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 붙들고 물어보았다. 자기 소대도 뿔뿔이 흩어지고 인민군이 서울에 이미 들어왔다고 한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