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사순 시기가 되면 나쁜 습관을 고쳐 새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하시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계획대로 성공하는 분도 있지만, 나약한 인간이기에 실패하시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악습을 고치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하다가 끈질기게 하느님께 매달려 알코올 중독에서 탈출한 체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간신히 마쳤다. 고(故) 이임춘(펠릭스) 신부님께서 하양에 무학중학교를 설립하시고 장학생을 많이 뽑은 덕분에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남들이 고등학교 1학년일 때부터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빈곤의 대물림을 끊고 가난에서 탈출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어머님과 함께 고추 장사를 했다. 가게는 없고 보따리 장사였다. 시골 장터를 다니며 농민들이 갖고 오는 고추를 사들여 당일 대구로 돌아와야 했기에 늘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이 아까워 생두부 안주에 대포 한잔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렇게 배운 술이 뒷날 특급 태풍으로 내 인생의 중심부를 할퀴고 지나갈 줄을 그때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3학년일 때에 자신을 돌아보니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장사로 큰돈을 벌겠다는 꿈은 아득히 멀어져 갔다. 일류대학 진학을 꿈꾸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어깨는 축 처지고 가슴은 답답하였다. 온갖 고생을 하는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중학교 때에 친하게 지낸 친구를 만나러 갔다. 하교 시간에 친구가 다니는 학교 앞 다리 교각 위에 걸터앉아 그가 나를 알아보기를 기다렸다. 교복 차림으로 물밀듯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은 마치 정신이상자를 바라보듯 나를 보며 웃었다. 그 친구는 오랜만에 갑자기 나타난 허름한 모습의 나를 보고 몹시 부담스러워 하였다. 침이 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다시 만난 그 친구가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라며 자기 책을 건네줄 때에 입술을 깨물었다.
공장에 다니면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작업대 앞에 단어장을 붙여 놓고 외우며 망치질을 하기도 하고, 하루 4시간 잠자며 일과 공부를 했다. 179㎝ 키에 몸무게 58㎏의 깡마른 체격으로 힘이 부쳐 코피를 자주 쏟았다. 처음 응시한 시험에서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혼자 옥상에서 소주를 마시며 흐느껴 울었다. 술의 마력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공장을 그만두고 머리를 박박 깎고 독한 마음을 품고 공부에만 매달렸다. 하루 18시간씩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훗날 보니 앉은 자세가 바르지 못하여 몸통이 뒤틀려 양쪽 갈비뼈의 높이가 달라졌다.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재수생 친구들과 함께 대입 학원에 다녔다.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 주점에서 술을 마실 때에는 마치 딴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대학 입학시험에 실패도 하였지만, 학비를 댈 엄두가 나지 않아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였다. 9급 지방공무원시험과 국가공무원시험에 모두 합격하였다. 합격할 때마다 축하의 술잔을 기울였다. 공무원 채용시험 성적이 좋아서 합격 2개월 만에 임시직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연탄 부정 수송차량을 감시하는 일을 하였는데, 퇴근길에 동료와 어울려 술을 마셨다. 감시초소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기도 하였는데,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 술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었다. 정식 임용을 받아 동사무소에 근무하면서 회식 자리나 퇴근길 술자리에서 술 잘 마신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다.
군에서 제대한 후 복직하여 구청으로 자리를 옮겼고, 결혼도 하였다. 결혼 후에 생활이 안정되면서 술을 더욱 가까이하였다. 술은 자주 마셨지만, 타고난 근면성과 성실함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학교선배 등 인맥이 없어 직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승진에도 뒤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재물을 모으는 재주도 없었다. 동료는 아파트 입주권 추첨에 당첨되거나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어 큰 아파트에 살면서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데 정말 나는 되는 일이 없구나 싶었다. 세상을 원망하였고 술버릇이 점차 나빠졌다. 술을 마시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 가장 많이 마셨던 마흔 초반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 어떻게 집에 왔는지 술값은 누가 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술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 기억에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숟가락을 잡은 손이 떨리고 식은땀이 자주 났다.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와 끈질긴 권유로 통신교리를 받고 1992년 7월에 만촌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는 받았으나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이 공허한 메아리로 들렸다. 의무감에서 주일미사는 빠지지 않고 참례하였으나 미사 시간에 온몸이 뒤틀리고 지루하기만 하였다. 영세 후에도 나쁜 술버릇을 고치지는 못하였으나 양심을 속이지는 않았다. 죄를 지으면 한 달에 몇 번이라도 꼬박꼬박 고해성사를 보았다. 만취 상태에서도 “나는 절대로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며, 내 아내를 배반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에도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불쌍한 죄인을 보호해 주셨던 것이라 믿어진다.
술로 말미암은 실수도 잦아지고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워졌다. 술값으로 지급한 금액이 신용카드 한도액을 초과하기도 하고, 가계수표를 끊어주고 기억이 나지 않아 부도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술이 나를 파멸과 죽음의 길로 끌고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술기운에 의지한 또 다른 세계에 미련이 남아 술의 노예로 살았다. 술을 마시고 새벽에 귀가하면서 큰 대자로 엎드려 땅바닥에 입을 맞추며 중독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도 하고, “내가 누군데, 어떻게 살아왔는데, 내 인생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는가?”라며 울부짖기도 하였다. 옷에 술 귀신이 붙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옷을 모두 벗어서 쓰레기통에 던지고, 발가벗고 집에 들어온 날도 있었다. 술이 정말 싫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새벽 운동도 하고 기도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거의 매일 마시던 술을 끊으면 황량한 겨울 들판에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 마냥 몹시 외롭고 불안하였다.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유혹에 넘어가곤 하였다.
술이 반쯤 취해서 퇴근한 2001년 여름 어느 날 일이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이제 네 목숨이 다 되어 간다. 술과 담배를 끊어라.”라는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상사의 음성이었다. 온몸이 뒤틀리며 팔다리와 허리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움직였다. 무서움에 떨면서도 그 충격적인 음성과 나를 움직이는 기운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겠다고 결심했다.
본리성당에 교적을 두고 있을 때인 2002년 1월에 남성 제180차 꾸르실료 3박 4일 교육을 받았다. 누구의 권유도 없이 스스로 교육을 신청해 놓고 기도를 많이 바쳤다. 하루에 한 갑 반씩 피우던 담배도 교육 이전에 미리 끊었다. 교육을 받으면서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한 자신이 한없이 후회스럽고 하느님 보기에 부끄러웠다. 끊임없이 양팔 기도를 하시는 봉사자들 앞에 머리가 숙여졌고, 강사 선생님 말씀이 모두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 여겨졌다. 교육 중에 회개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교육을 수료한 다음 날 월요일 새벽 미사에 참례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술을 끊지는 못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허전하고 불안하며, 힘도 빠지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주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더욱더 주님께 매달렸다.
남을 위한 봉사도 하고 인생을 새롭게 살아보고자 성당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위원 교육을 받으러 월성성당에 갔다. 마침 그곳에 알코올 중독 상담소가 있었다. 혼자 문답형 진단을 해보니 알코올 중독임이 분명하였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이다.”부터 시작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지켜야 할 12가지 수칙”을 매일 아침 마음에 새겼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찬물로 몸을 씻었다. “주님,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하며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5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계산성당으로 향하였다. 어떤 때는 잠이 모자라 눈을 감고 걷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매일 새벽 미사 참례가 어느덧 9년이 되었다.
그동안 남들 앞에서 술을 끊겠다고 공약을 한 후에 실패를 거듭하여 이제 약속조차 하기가 두려웠다. 탁상 달력에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금주(禁酒)가 아닌 ‘주금(酒禁)’으로 적고 속으로 ‘주검’으로 읽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내가 죽고, 지키면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술 귀신이 죽는 날이라고 마음 깊이 새겼다. 마침내 성공하였다. 제사를 지낸 후에 나누어 마시는 음복술도 거절하였다. 하느님께서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2002년 3월 22일은 결국 술 귀신이 죽은 날이고 알코올 중독에서 탈출한 날이다.
9년 전 사순 제5주간 금요일, 그날 미사의 본 기도문이 “주님,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나약한 탓으로 저지른 죄의 사슬에서 저희를 인자로이 풀어 주소서.”였다.
2005년 3월에 성모당과 남산성당, 그리고 계산성당도 가까운 송림아파트로 이사하였다. 매일 새벽 성모당에 들러서 기도하고, 교구청과 수녀원, 신학교 담장을 따라 걸으면서 성당으로 향하는 길이 지상의 천국을 걷는 기분이다. 지난 9년 동안 매일 미사를 빠진 날은 외국출장과 같이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주님께서 매일 미사에 참례하도록 이끌어 주셨고, 미사의 은총으로 내 인생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뀐 것이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크신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릴 뿐이다.
이제 술 귀신이 빠져나간 자리에 주님 사랑과 가족 사랑을 심고 열심히 가꾸고 있다. 다음 호에서 “베라노의 행복 가꾸기”로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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