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입학 전에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하느님 앞에서 정의란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베풀고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베푸는 것이며, 무한 경쟁 사회에서 내 자질, 내 능력, 내 노력조차도 하느님께서 맡기신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왜 내가 피땀 흘려 노력해서 얻은 것들을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을 위해 나눠야 하나? 개인에 따라 선택은 할 수 있지만 필수는 아닐 테니까.
지난해 본당 신부님께서 처음으로 의료 봉사를 추진하실 때도 ‘왜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서 굳이 외국으로 가나?’ 하고 의문을 가졌었다. 우리나라도 많은데, 혹시 ‘영웅’ 흉내를 내고 싶으신가? 그냥 미사나 열심히 집전하시면 편하실 텐데 소공동체다 뭐다 허구헌 날 남들 안하는 일만 하시니, 인생 참 힘들게 사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부님의 무모한 시도와 엄마의 강압에 의한 나의 첫 번째 베트남 의료봉사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봉사가 아닌 배움이었다.
우리 일행이 간 벤쩨는 호치민에서 버스로 3시간 떨어진 우리나라 1950년대 농촌과 비슷한 곳이다. 수도도, 화장실도, 학교도 없고 평생 의료진을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 길도 차가 들어가지 못해서 한 명씩 오토바이에 매달려 들어갔다. 그들에게 한국에서 온 의료진과 봉사자들은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이상한 냄새 때문에 음식을 먹지 못한 채 지옥 같은 더위 속에서 진료를 돕고 공터에 학교를 세우는 일은 고된 노동이었지만, 그 속에서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만났고 더 큰 기쁨을 알게 되었고 더 많이 성장하게 되었다. 내가 뭔가를 가졌을 때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눔의 기쁨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의료 봉사는 의사 분들 말고도 우리들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 의료봉사는 스스로 참여했다. 류승기(바오로) 신부님과 의사 5분, 약사 1분, 일반 어른 5분, 의대생 3명, 한의대생 1명, 중고생 19명 포함 총 38명이 3박 5일 동안 밴쩨를 다시 방문한 것이다. 이번에도 베트남에서 18년째 사시는 한인 목사님이 안내를 해주셨고 지난해 통역봉사를 한 호치민 대학교 형, 누나들이 함께했다. 나를 기억해주고 반겨주는 형들이 너무나 좋았고 낮에 고된 일을 하고 밤에 형들과 서툰 영어로 노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우리는 효율적인 봉사를 위해 이경호(안셀모), 김귀란(젬마), 서경주(말가리다), 백인화, 오지원(라파엘) 의사 선생님과 김선희(데레사) 약사님을 도와 팀을 나눠 환자들을 안내하고 혈압을 쟀다. 그리고 방문자 모두에게 구충제를 먹이고 치약, 칫솔을 나눠줬다. 작년에 펼친 의술이 소문나 2~3시간을 걸어와서 아침부터 장사진을 친 사람들 때문에 질서 유지를 하느라 인간 사슬을 만들기도 했다. 더위에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혹시나 진료를 놓치거나 약을 받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얼굴들을 보니 한시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우리가 가져간 약들은 비타민, 파스, 안약, 피부 연고, 위장약 등 천만 원어치였고 이틀 동안 1,200명의 환자들을 진료했다. 사실 열악한 현지 환경 때문에 의사 선생님들이 제대로 진료하시기가 어려웠지만 선생님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의 마음까지 보듬어주시려 노력하셨다. 진료를 마친 사람들은 ‘플라시보 효과’처럼 정말 병이 다 나은 표정으로 약을 타러 갔다. 팀 중에서는 치과 치료팀의 화합이 돋보였는데, 특히 치과 선생님은 환자를 눕힐 수 없는 ‘야생 진료’ 상황에서 한국에서 1년 치 발치량을 이틀 동안 다 하셨다. 위험한데도 고통 때문에 발치를 간절히 원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의료 봉사를 마치고 작년에 우리 봉사팀이 세운 학교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학교에 담장을 세우고 유치원에 오르간 두 대를 기증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흙바닥에 방치되었던 아이들이 신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무척 안심이 되었다. 베트남 출발 전 특전미사 때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는 놀러 가는 것이 아니다. 사실 아주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작은 수고를 통해 그들이 남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곧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해야 할 일이다.”

지금까지 ‘영웅’은 슈퍼맨처럼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진정한 ‘영웅’은 하느님께 받은 능력을 이웃과 나눠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어린이들이 미래의 꿈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우리 성정하상성당 신자 모두가 ‘영웅’이다. 세상에 ‘영웅’들이 많아질 때 우리 모두가 기도하던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는 이루어질 것이다. 끝으로 우리에게 이 모든 능력을 주신 하느님, 쌩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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