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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4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이동철, 오영재, 김기환, 김동진 신부

4월 3일 사순 제4주일 : 요한 9,1.6-9.13-17.34-38
이동철(대건 안드레아) 신부, 인동성당 보좌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

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오늘 복음 단락은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을 고쳐주시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 합시다.

 

1.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제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그 사람이 눈이 멀게 된 이유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가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려는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의 눈을 보이게 만들어 주십니다. 눈이 멀어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되어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눈을 뜬 그 사람은 이웃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고 묻자 빛을 보게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을 통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빛을 주러 오신 분이라는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2.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요한 9,30)
눈이 먼 사람이 눈을 뜨는 기적을 목격한 이들은 당시 종교적 지도층이었던 바리사이들에게 그를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날은 일을 할 수 없도록 규정된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법에 갇혀 이미 드러난 사실, 즉 예수님께서 빛이심을 거부합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이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증언하지만 이미 그들의 마음은 닫혀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 세상의 지위와 법으로 하느님의 일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이의 증언을 진정한 증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증언마저 예수님을 올가미에 가둘 미끼로 사용합니다.

 

3.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 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예수님께서는 태생 소경의 기적을 통해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빛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지만 세상의 지위로 인해 영적으로 눈이 먼 바리사이들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은총을 받은 태생 소경은 그분을 진정한 빛으로 받아들여 세상의 빛 뿐 아니라 영적인 빛까지 받았지만 바리사이들은 세상의 어둠에 갇혀 영적인 빛까지 어둠으로 덮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빛과 어둠의 관계가 그렇듯이 어둠이 빛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단지 빛을 보면서도 그것이 빛이 아니라 우길 뿐입니다. 태생 소경은 세상의 빛을 통해 영적인 빛까지 받았지만 바리사이들은 빛을 보면서도 그것을 애써 어둠으로 가리려 합니다. 복음의 다른 구절에서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라고 하였습니다. 빛을 빛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영적인 빛을 무한히 받을 것이지만 가려지지 않는 빛을 애써 가리려 하는 이들은 극심한 영적인 어둠에 허덕일 것입니다. 마치 태생 소경과 바리사이들이 대조되듯이 말입니다.
사순절도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준비하며 부활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떠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혹시 바리사이들과 같이 세상적인 감정과 지위 탓에 영적인 빛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보이는 세상의 일들을 영적인 빛으로 조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태생 소경과 같이 세상의 빛과 영적인 빛을 모두 얻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중 내 마음의 영적인 빛을 통해 세상의 일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3주 앞으로 다가온 부활의 빛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여야겠습니다.

 

 

 

4월 10일 사순 제5주일 : 요한 11,3-7.17.20-27.33-45
오영재(요셉) 신부, 효목성당 보좌

 

3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7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37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하였다. 

38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1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44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오늘은 사순 시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순 제5주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사가와는 다른 독특한 관점으로 예수님의 일대기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순 시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제1주일에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십니다. 제2주일에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잠시 드러내시면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제3주일부터 요한복음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제3주일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빵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당신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을 알려주십니다. 제4주일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생 암흑 속에서 살아온 태생 소경의 눈을 고쳐주심으로써 빛이신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의 갈등이 고조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십니다. 이 놀라운 기적은 당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며 또한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요한 11,45-57 참조) 교회는 성주간에 앞서 오늘 복음을 배치함으로써 극적인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중요한 대목이니만큼 순차적으로 자세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복음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 먼 이를 고쳐주심으로써 바리사이들과 갈등을 빚으셨는데,(요한 9,1-41 참조) 그 후에는 유다 백성 전체와 갈등을 겪으십니다.(요한 10, 22-39 참조) 유다인들은 극도로 흥분해서 예수님께 돌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피해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물러가셨는데, 이런 상황에서 라자로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으십니다.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남매는 예전에 예수님과 친분을 맺은 관계입니다.(루카 10,38-42 참조) 자매는 예수님의 위태로운 상황을 알기 때문에 오빠가 아프다는 연락을 지체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베타니아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건이 벌어진 예루살렘으로부터 3km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 당장 와달라는 말을 전하기보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라며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사실만 전합니다. 이런 자매의 애타는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예수님께서는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들 또한 갑작스레 위기의 순간이 닥쳐오면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장 답이 없으면 실망하면서 초조해 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때를 기다리시는 것이니 조급해 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자매의 연락을 받으신 지 이틀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유다로 가실 결심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시려는 예수님을 말리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의 또 다른 주제인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시면서 라자로와 자매들에게 빛을 비추기 위해 떠나십니다. 사물에 빛이 비치면 어둠의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라자로에게는 빛이 예수님께는 어둠이 됩니다. 토마스는 이런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료 제자들에게 당당히 “함께 죽으로 갑시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비추기 위해서 어둠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추는 양초처럼 자신의 몸을 태울 때에, 비로소 주님의 빛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다다르시자 마르타가 마중을 나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 계셔서 오빠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이미 죽었지만 다시 생명을 주시리라는 희망을 이어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믿음을 확인하시며 영원한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소생이 아니라 부활, 즉 다시 죽음을 겪을 소생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을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를 길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어질 라자로의 소생과 예수님의 부활로 드러날 것입니다.
마르타는 돌아가서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부르신다고 전합니다. 언니와 함께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지 않았던 마리아의 상황을 우리는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이야기에서도(루카 10,38-42) 마리아는 언니를 돕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만 있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다리가 불편했으리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자매의 성향을 좀 더 생각해 봅시다. 활동적인 마르타는 오빠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이겨내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늦게라도 오셔서 다시 오빠를 살려 주시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조문객들의 위로도 받지 않았고, 마르타가 집을 나서지만 조문객들은 따라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마리아에게는 이겨낼 수 없는 절망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넋 나간 사람처럼 하염없이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마리아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문객들은 “오빠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너는 힘을 내야지.”라고 마리아를 위로했을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가 일어나자 조문객들은 마리아가 걱정되어 따라나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만났던 그 자리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눈물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시고 같이 우십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아픔에 겨워 울고 있을 때에, 예수님은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오빠를 잃은 절망 속에서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 집을 나섰듯이 우리도 절망 속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바로 앞에 계십니다. 한 발짝만 그분께 다가서면 당신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고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며 따뜻하게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무덤을 찾아 가십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으시고 곧바로 실제적인 도움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당신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흔들리지 않는 굳은 신뢰를 통해서 라자로의 소생이라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들의 기도 역시 이런 감사의 기도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 … 해 주시면 성당도 열심히 나가고 기도도 열심히 할게요.”라고 조건문이 아니라, “하느님, 언제나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꼭 들어주시리라고 굳게 믿어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물론 말뿐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하겠지요.
성주간을 맞기에 앞서, 빛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합니다. 굳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청하면 언제나 “감사”드리며 살 수 있지 않을까요?

 

 

 

4월 17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마태 21,1-11
김기환(미카엘) 신부, 동천성당 보좌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 벳파게에 다다랐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2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매여 있는 암나귀와 그 곁의 어린 나귀를 곧바로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풀어 나에게 끌고 오너라. 

3 누가 너희에게 무어라고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러면 그것들을 곧 보내 줄 것이다.” 

4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 

5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6 제자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하였다. 

7 그들은 그렇게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앉으시자, 

8 수많은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9 그리고 앞서 가는 군중과 뒤따라가는 군중이 외쳤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10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저분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군중이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제 영혼이 진정으로 다시 노래하게 하소서.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에 저를 불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필요하신 것’을 마련해 주시며 또한 저희 영혼에 필요하신 것까지 마련해 주신 당신 사랑에 감복(感服)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모습 앞에서 오히려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모든 감정이 마음속을 뒤흔듭니다. 당신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이 저의 마음에 쏟아져 들어옵니다. 겸손하신 임금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그분께서 수난의 장소로 들어오심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픕니다. 군중들이 그분께 외치는 호산나! 소리에 저의 마음도 기뻐 뛰지만, 곧이어 배반할 것임에 분노하게 됩니다.
아버지, 당신의 은총으로 저는 예수님처럼 이 위풍당당하게 입성한 뒤에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은총에 힘입어 조금이나마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45 참조) 아드님의 모습과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아버지의 말씀(이사 55,11 참조)에서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이 온전히 저희 인간을 향해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버지! 당신께서는 진정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참조)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만이 아버지의 사랑을 저희에게 보여주십니다.(요한 14,7-10 참조) 저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끌어주소서.
당신의 사랑을 이루 헤아릴 수 없으나, 저희의 부족함에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시는 신비를 허락하시는 아버지! 당신 아드님께 대한 환영의 환호 소리 뒤 들려올 배반의 외침에도 당신의 사랑은 흔들림이 없고, 당신 말씀을 실현하기 위한 아드님의 수난과 죽음에도 저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또한 수난과 죽음 뒤에 텅 빈 허무(虛無)가 아니라 충만한 부활의 영광과 기쁨을 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령께서 저희를 이끄시게 하시어 당신 사랑이 온 세상에 충만함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저의 영혼은 이렇게 노래하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4)하고 외쳤던 저의 죄악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찬양이 이 두려움을 이겨내게 하소서.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죄악을 이겨내게 하소서.(이사 50, 7 참조) 당신의 아드님의 죽음으로 구원하신 저를 잊지 마소서. 세상이 저에게 “저분이 누구냐?”하고 물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하소서.(필리 2,11 참조) 제 영혼이 진정으로 다시 노래하게 하소서.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4월 24일 예수 부활 대축일 : 요한 20,1-9
김동진(제멜로) 신부, 칠곡성당 보좌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 부활 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은 예수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부활 아침에 신자들은 서로에게 “부활 축하드립니다.” 하며 인사하곤 합니다. 부활이라는 단어는 ‘다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부활을 축하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니 우리도 언젠가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기뻐합시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이 부활이라는 단어 앞에 한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이라는 단어입니다. 육신의 부활! 예수님은 예수님의 육신과 함께 부활하셨습니다.  
육신의 부활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어느 신부님께서 병자영성체를 다니시며 겪은 의미심장한 일화가 기억났습니다. 신부님께서 병자영성체를 다니시는데, 연세 많은 한 할머니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신부님께서 오실 때마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병자영성체가 끝나면 늘 신부님과 식사를 함께하시기를 원하셨답니다. 그럴 때마다 신부님께서는 “할머니 지금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와서, 식사를 하기가 좀 그렇습니다.”하며 거절하셨답니다.
그러던 일이 계속 반복되던 어느 날,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할머니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상을 차려놓으셨고, 신부님은 식사 제의를 거절하고는 바삐 다른 집으로 병자영성체를 하러 가시려 했답니다. 그 때 할머니께서 신부님의 손을 꼭 잡으시며, “신부님, 오늘은 못가십니다! 신부님, 왜 거짓말 합니까? 예수님을 모시고 와서 식사를 못하신다고 하셨는데, 성경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사를 하셨다는 구절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같이 오셨다고 해서 왜 식사를 못하십니까? 오늘은 드시고 가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신학을 공부한 적도 없으신 할머니께서 육신의 부활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하시는 것을 보고 신부님께서 감탄하셔서 그 할머니와 함께 맛있게 식사를 하고 다음 집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예수님의 빈 무덤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면서 가지신 지상육체를 가지고 함께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 지상에서 병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지닐 수 있는 나약한 육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희생제사 이후로 완전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완전한 형태로 변화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신학생 시절, 창조종말론 시간에 교수신부님께서 신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학사님들! 우리 육신의 부활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육체를 가진 동물들도 부활하겠습니까?” 그 질문에 대해 신학생들은 갑론을박 논의를 벌였고, 의견은 반반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때 교수신부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한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은 견해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이 완전한 형태를 가지게 되고, 그때는 모든 세상 만물이 구원받게 됩니다.”
그때 교수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때’에는 모든 것이 바로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부활하게 된다는 말씀은 지금도 저의 가슴 속에 깊은 희망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완전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으며, 부활의 삶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육신의 부활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세상 안에서 육신의 부활을 체험하며 살아갑시다.

(*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전례적인 의미를 고려하여 복음묵상을 입당식 복음으로 하였습니다. -편집부)